5.18 학살의 당사자들이 지난 40년 동안 누려온 온갖 부와 권력은 그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지만 현실은 아주 잘 처먹고 잘 산다는 것이다. 국민학교 시절부터 보아왔던 만화책에서부터 우리는 ‘정의’라는 말을 들어왔고 지금도 여전히 ‘정의’라는 말을 듣고 때로 하기도 한다.
아파트 경비원을 죽음으로 내 몬 당사자는 쌍방 과실, 또는 죽은 경비원이 자해했다는 소리를 지껄이며 ‘죽은 자는 말이 없다’라는 法諺에 기대어 본인을 방어한다. 법적 ‘정의’를 구현해야 하는데 그 ‘정의’는 현재 ‘정의’롭지 않아 보인다.
로마시대 법학자 Ulpianus는 ‘정의’를 이렇게 정의했다. “각자에게 그의 것을 주는 항상 부단의 의지” 계급적 악취가 물씬 나지만 당시로서는 아마도 최선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후로는 이런 딱 부러지는 ‘정의’의 ‘정의’도 찾을 수 없다. 중세시대는 그나마 기독교가 그 역할을 다했다. 하나님이 곧 ‘정의였다.
근세 이후 ‘정의’를 정의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순수 법학으로 유명한 독일의 유명한 법학자 Hans Kelsen은 그의 책 ‘Was ist Gerechtigkeit?(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정의를 다양하게 이야기 하지만 딱 부러지게 한 마디로 요약하지 않는다. 그만큼 사회가 복잡해졌기 때문에 한 마디로 요약하는데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100만 부나 팔렸다는 Michael J. Sandel의 저서 ‘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는 교묘한 번역 탓에 ‘정의’를 정의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여 책이 많이 팔렸을 것이다. 책 제목을 본래 영어 제목과는 약간 차이가 있는 ‘정의란 무엇인가?’로 번역해버렸다. 내용은 잘 알다시피 토론을 옮겨 놓은 것인데 우둔한 나는 책을 보아도 딱 부러지는 ‘정의’의 뜻을 발견할 수 없었다. 옳은 일? 참 웃기는 이야기다. 뭐가 옳은 일인지?
좋다! 정의는 몰라도 살아가는데 지장이 별로 없다. 정의롭지 않다고 해서 처벌받지는 않는다. 적극적으로 법률을 위반했을 때 처벌받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최소한의 ‘정의’만을 지킨다. 즉 법률의 저촉되지 않을 만큼만 정의롭다.(이마저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끔 어기기도 한다) 법률 역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사회적, 법적 ‘정의’의 정말 최소한이다. 그러면 사회는 무난하게 유지된다. 그 수면 밑의 이야기는 법적 효력이 미치지 않고, 동시에 법도 거기까지는 관심이 없다. 그것이 ‘정의’든 아니든 간에.
그러고 보니 ‘정의’의 뜻이 희미하게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법으로부터 요구받고 또 법에 근거하여 국가 및 사회에 요구하는 것은 ‘정의’의 최소한이다. 이를테면 최소한의 ‘정의’가 보장되는 사회와 ‘정의’의 최소한이 실현될 수 있는 사회다. 그것뿐이다. 더 이상도 이하도 아닌데 위에서 말한 5.18 학살 주범들과 아파트 경비원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은 그 조건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 그리고 그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분노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