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역사의 마지막을 더듬어보면 늘 나는 우울한 기분에 빠지고 만다. 나만의 경우인지는 모르겠으나 망국의 여러 징조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음에도 우리의 선조들은 망연자실, 결국 나라의 주권을 다른 나라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하기야 당시 그런 징조들을 분석하고 대처할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해 보면 우울함에 이어 참담해지기까지 한다.
거기다가 머리에 먹물이 든 계층들은 오로지 자신의 일신과 족속들의 안위만을 위해 움직였으니 그 폐해는 배우지 못하고 천대받던 민중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되고 말았다. 다른 나라에 기생하여 호의호식하던 족속들은 그 뒤로도 그 영화와 권력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하지 않는 일이 없었고, 놀랍게도 해방 이후에도 심지어 지금까지도 그 조상의 부정한 축재와 권력을 바탕으로 하여 이 나라를 장악하고 있다.
황준헌이라는 청나라 사람이 있다. 그는 중국 남부 광동 출신으로 4세 때 이미 공부를 시작한 천재로서 29세에 외교관으로 일본에 파견되어 당시 급박하게 돌아가던 동북아 정세를 조망하고 오지랖을 발휘하여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이라는 책을 집필한다. 황준헌의 속마음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이 책을 통해 유추해 보자면 황준헌은 조선을 결국 청나라의 지배권 밑에 두고 싶었고 그 방법의 하나로 이 책을 썼을 것이다.
황준헌이 이 책에서 주장한 핵심은 러시아에 대한 방어였다. 아마도 황준헌에게 당시의 러시아는 청나라에게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그 책을 가져온 김홍집이 이 책을 얼마나 잘 이용했는가 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왜? 결국 조선은 외교적으로 실패했고 마침내 일본에 의해 합방되었기 때문이다. 그 뒤 청나라도 일본에 지배당했고, 러시아는 일본에게 전쟁에서 지고 만다.
하지만 21세기 중국은 19세기의 청나라가 아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중국은 거대한 소비와 생산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수치를 따질 필요까지도 없다. 중국은 이미 지구 상에서 우리의 상상을 넘는 경제적 가치와 역할, 그리고 위치에 서 있다. 이것이 동북아시아를 넘어 새로운 세계 질서가 되고 있다. 하지만 태평양 너머에 있는 미국은 이 사실을 부정하고 싶다. 미국은 자타가 인정하듯 세계 경찰(깡패가 더 적절하지만)이자 세계 최고의 국가이고 싶어 한다. 그 와중에 현재의 미국 대통령은 우리가 아는 바 그대로 정상은 아니다.
이 두 나라가 서로에게 험한 얼굴을 보이며 대치하는 장면은 우리에게 참으로 난감한 현실이다. 이른바 고래 싸움이 있기 직전 바다 전체에 거대한 긴장이 조성되는 시기인 것이다. 이들이 싸우는 이유는 간단하다. 누가 최고인지 가리는 것이다. 어수룩한 골목길에서 건달들이 짱을 가리듯이 이들도 짱을 가리고 싶어 한다. 세계질서를 자신들의 의도대로 가져가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되면 그 두 나라 사이에서 두 나라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우리의 입장은 언제나 난처하다. 약소국의 비애는 19세기 조선에서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고래 싸움에 새우는 거의 초주검이 되는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국가와 민족보다는 자신의 안위와 영달을 꾀하는 자들은 미국과 중국 편으로 나뉘어 이 나라 외교적 입지와 상황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마치 19세기 그때처럼. 누구를 막론하고 대외적으로 우리 모두는 우리나라의 이익을 위해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 그나마 초주검이 다 된 새우가 기사회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