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기 첫 번째 철학 수업
슬픈 예상은 늘 빗나가는 법이 없다. 물론 방학 전에 이미 예상했던 일이고, 또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지만 막상 상황에 마주하고 보면 약간은 힘이 빠지고 난감해진다. 방학을 지내고 아이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내 앞에 다시 앉아있다. 물어볼 필요도, 물어볼 수도 없는 완벽한 백지상태로 방학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들에게 마음에도 없는 고맙다는 말을 불쑥했다. 그러나 내 본마음은 어쩌면 고마웠는지도 모르겠다.
이 코로나로 어수선한 시국에 아이들과 최소한 건강하게 마주했고 철학자 이름이 적혀 있는 네임텍을 달고(몇은 아니었지만) 심지어 방학 전에 내 준 유인물까지 들고 내 앞에 앉아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것은 분명하다.
방학 전 마지막 주제는 변화였다. '변화'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세계의 항변 성과 그 속에서 존재하는 사물, 인간, 그리고 우리 자신의 모습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1학기 끝 무렵에는 제법 많은 아이들이 나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1학기 마지막 날 질문을 던진 그 아이를 생각하며 방학 내내 어떤 이야기를 해 줄까 하고 고민을 했다.
오늘 그 아이에게 1학기 마지막 시간에 했던 질문이 기억나는가를 물어보았다. 전혀 기억이 없다는 그 아이의 표정은 몹시 난감했다. "변화를 다스리는 것은 무엇(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마지막 질문이라고 해 주었더니 난감함과 더불어 뜨악한 표정까지 겹쳐진다.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표정이다.
다시 방편을 든다. 먼저 변화의 모습을 아이들이 경험할 수 있는 사물의 방편을 든다. ‘곤충’의 탈피를 예로 든다. 알-애벌레-성충의 변화의 바탕은 특정한 이름으로 불리는 곤충인데 알에서 성충으로 다만 그 모습만 변화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식물의 씨앗과 새싹과 성장의 과정, 그리고 계절의 변화를 이야기했다. 아이들 표정은 약간 이해하는 느낌이다.
조금 더 나아간다. 그러면 변화하기는 하는데 그 변화가 언제나 잘 통제되어 나타나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를테면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이 방편으로 그 통제의 현상을 설명한다. 아이들이 이해한다. 통제는 이해했다. 그러면 조정과 시범을(변화를 다스린다는 말은 통제, 조정, 시범을 포함하는 말이다.) 설명하기 위해 다시 새로운 방편을 사용한다.
해마다 벼는 동일 시간에 심고, 익고 또 수확된다. 이렇게 벼를 키우는 것은 온도다. 그럼 온도는? 지구의 움직임이다. 지구의 움직임은? 이 단계부터 대부분의 우리는 다시 철학적 미궁에 빠진다. 일단 아이들은 온도와 지구의 움직임이라는 것 까지 인도하고, 그다음을 생각해 보게 한다.(이것은 다음 주 이 시간에 글로 써 볼 주제이기는 하다.) 여기서 신과 종교, 운명과 노력 등의 다양한 의제와 아이들은 만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시범이다. 시범은 학습이다. 변화의 통제 과정에서 이 시범의 역할은 상당히 미미하지만 시범이 가지는 함의는 매우 크다. 시범이라는 말은 사실 적절한 용어는 아니다. 영어 Simulation을 시범으로 번역했지만 통제된 환경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미리 예측해보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말이다. 즉, 모든 사물들은 다양한 경로의 변화를 거치며 스스로의 상황을 유지하고 또 존재한다. 이러한 과정은 지극히 미세하고 동시에 감지할 수 없는 시간적 공간적 상황에서 발생하고 또 사라지기 때문에 그 추이를 설명할 적절한 방편을 찾기 어렵다. 학교 앞 들판에 일어나는 사계절의 변화를 방편으로 차용한다. 사 계절이라는 시간적 공간적 상황과 그것을 보는 우리는 객관적이며 동시에 주관적 상황이 교차하는 과정을 경험한다. 그 속에서 매년 일어나는 변화는 다음 해 일어나는 변화의 기초이며 원인이 되고 동시에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이와 같은 상황이 우리 주변에는 중첩적으로 나타나면서 우리는 전체적으로 변화를 수용하게 된다.(적확한 방편은 아니다. 하지만 근접한 최선의 방편이다.)
아이들은 나의 이야기를 듣기는 하지만 뭔 말인지 모르는 눈치다. 그래! 모르는 부분도 있을 수 있다. 아이들을 격려한다. 사실 “선생님도 잘 모른다!”라고 이야기하며 방학 후 첫 시간을 마쳤다. 아주 긴 90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