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기 두 번째 철학 수업 교재(13)
지수중학교 철학 수업 교재
제4 절 우리는 왜 살고 있을까?
1. 삶
모든 생명체는 시작과 끝은 그 생명체의 의지와는 무관하다. 생명의 시작과 끝을 결정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사실 의미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현재의 지식과 인식 수준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삶이 부여된 이후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까지에 대한 것이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일단 몇 개의 가정이 필요하다. 먼저 생명체 중에서 ‘인식’을 가지고 있는 존재는 ‘인간’뿐이라고 가정한다. 두 번째 인간 생명의 시작과 끝에 대한 어떤 종교적 신화적 의미부여를 하지 않는다. 세 번째 여기에서 이야기되는 ‘생명체의 의지’라 함은 첫 번째 조건인 ‘인식’에서 출발한 것임을 밝혀둔다.
일반적으로 ‘삶’은 사람이 살아가는 일 또는 살아 있는 상태를 말한다. 다른 뜻으로 사람의 목숨을 의미하기도 한다. 살아가는 일을 엄격하게 살펴보면 사실 살아가고 있는 존재인 인간이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물론 아주 작은 부분(먹고, 자고, 즐기는)에서 스스로의 의지를 개입시킬 수 있으나 전체적으로 살아가는 일은 우리의 의지와는 사실 무관하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살면서도 끝없이 그 삶의 과정에 의문을 가진다. 지금 우리처럼 매우 적극적으로 “왜 살고 있나?”에 대한 생각을 해 보려는 것은 우리의 삶이 우리의 의지와는 거의 무관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쉽게 풀이하자면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든 또는 아니든 삶의 여러 과정은 나에게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고, 나는 내 의지와 무관한 그 일과 과정을 매우 주체적으로 겪어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교육을 통해서 이러한 삶의 과정을 수용하여야 한다고 배우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주체적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매우 타당한 일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2.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그러면 우리의 삶은 특별한 목적을 가진 것인가? 아니면 목적이 없는 상태로 다만 유지되고 있는 것인가? 만약 목적이 있다면 그 목적은 무엇인가? 목적이 없다면 목적 없이 삶은 유지될 수 있는가?
스피노자라는 철학자가 있다. 그는 부유하고 안정된 가정에 태어났으나 자신의 신념을 위해 평생 안경이나 망원경의 렌즈를 갈면서 어렵게 살다가 45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지은 ‘에티카’는 후세 수많은 철학자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된다.
스피노자는 과연 무엇을 위해 삶을 살았을까? 스피노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깊이 이해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롭게 살고자 하였으나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철저하게 정신을 통제당하고 있었고 그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피노자의 자유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다. 즉, ‘자유인’이었던 스피노자와 ‘예속인’이었던 당시 사람들의 대결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왜 스피노자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예속인’이 되었을까? 거기에는 ‘욕망’이라는 것이 개입하게 된다. 이 ‘욕망’은 대단히 본질적인 것으로서 대표적으로 ‘오래 살고 싶다’는 아주 간명한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인간의 이 근본적인 욕망으로부터 출현한 것이 특별한 능력을 가진 존재에 대한 의지였다.
일반적인 인간의 능력으로 이해할 수 없지만 매우 강력하고 절대적인 존재를 인간들은 오랜 시간을 통해 창조했고 그 창조된 구조에 스스로를 예속시킴으로써 심리적 안정을 얻으려 하는데 이러한 상황을 만드는 중요한 힘이 바로 ‘욕망’이라는 것이라고 스피노자는 생각했다.
결국 인간은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스스로 그 욕망의 틀에 예속되고 마는 역설에 갇혀버렸고 스피노자는 이것을 과감히 벗어던지고자 했으며 그 결과 그는 어려움 속에 삶을 유지해야만 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고민해보자. 각자에게는 각자가 꿈꾸고 각자가 희망하는 ‘욕망’이 있다. 그것을 위해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그 ‘욕망’의 모습을 스스로의 삶에서 찾기 위해 노력해 보자. 어쩌면 그 ‘욕망’이 삶의 목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3.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의 삶을 유지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 매일매일을 살아가고 있다. 아주 가끔씩 스스로의 일상을 유지하는 것에 스스로의 의지가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있다. 특별한 결정이나 선택의 순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대로 결정하게 되지만 그 ‘의지’의 실체를 알지는 못한다.
‘의지’는 앞서 우리가 배운 주관과 객관으로부터 시작한다. 독일 출신의 위대한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그의 책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에서 ‘주관’을 이렇게 설명한다. “모든 것을 ‘인식’하면서 어떠한 것에 의해서도 ‘인식’되지 않는 것이다” 이 말은 곧 주관이라는 것은 스스로에게 판단되는 세계, 그 자체인 것이다. 즉 주관이란 내가 보려는 ‘인식’=’의지’를 가지고 사물을 보는 것이기 때문에 이 순간에는 나의 ‘의지’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개입되지 않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순수 ‘의지’를 통해서 우리 삶을 유지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 앞에 서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분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매우 복잡한 개념들이 쏟아져 들어오지만 여기에서는 우리의 삶을 유지하는 ‘인식’, ‘의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로 한다.
위의 그림은 Caspar David Friedrich의 Wanderer über dem Nebelmeer(a walker on the fog- 안개 위의 방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