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tropolitan Museum of Art 그림 여행(3)
Le Wagon de troisième classe(3등 열차, 1862~4년)
Honoré Victorin Daumier(오노레 도미에, 1808~1879)
아직도 열차라는 교통수단에는 등급이 있다. 뿐만 아니라 같은 열차에서도 등급을 달리 하는 칸이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차별을 반대하면서도 열차 등급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별 다른 반대도 없고 또 이렇다 할 저항도 없다. 아마 오랜 관행으로 굳어진 일이어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열차 등급이 유쾌하지는 않다.
사실 차별의 역사는 깊고 유구하다. 道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장자』 속에서도 차별을 수용하는 자세를 보인다. 『장자』 제13편 天道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군주가 앞서고 신하는 뒤따르며 아버지가 앞서고 자식은 뒤따르며 형이 앞서고 아우는 뒤따르며 연장자가 앞서고 어린 사람은 뒤따르며 남자가 앞서고 여자는 뒤따르며 지아비가 앞서고 지어미는 뒤따른다.”
“尊卑의 차별과 先後의 순서가 있는 것은 천지자연의 운행 법칙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후세의 유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슬쩍 끼워놓은 이야기로서 ‘장자’의 생각은 아니라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찜찜하기는 마찬가지다.
어쨌거나 19세기 프랑스에서 열차의 등급은 현재의 사정에 비추어 볼 때 계급에 따른 철저한 분리였을 것이다. 그 열차의 마지막 등급인 3등 열차는 당시의 하층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중교통 수단이었을 것이다. 사실 이 열차조차도 타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그러한 3등 열차에 모여있는 사람들의 한 순간을 묘사한 것이 바로 이 그림이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19세기 프랑스 사실주의 작가인 오노레 도미에다. 위대한 시인 Charles Baudelaire(샤를 보들레르)에 의하면 도미에는 “근대미술의 모든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 중 한 사람”이라고 그를 격찬하였는데 이는 도미에가 근대 미술사에 남긴 영향을 웅변하고 있다.
도미에의 인물 묘사는 돈키호테(1868), 파리의 세탁부(1863)에서 보는 것처럼 당시의 사실주의 화풍을 넘어서고 있다. 윤곽의 묘사에 있어 굵고 강렬한 표현을 사용하면서 과감한 생략을 통해 사물을 묘사하여 보기에 따라서는 마치 미완성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인물 묘사는 다가오는 인상파 회화를 넘어 야수파 회화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도미에가 살았던 시기는 프랑스 최대의 정치적 격변기였다. 7월 혁명과 루이 필리프의 입헌 왕정, 그리고 보불 전쟁의 참패와 이에 대한 격렬한 시민운동이었던 파리 코뮌, 이것을 파기하는 제3공화정이 연속되는 시기였다. 표면적으로는 민중을 위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정치적 변화는 거의 없었고 오직 권력 투쟁과 지배층들의 이권 다툼의 연속이었다. 이 암울했던 시기에 희망 없는 프랑스 민중들의 삶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곳이 삼등 열차였을 것이고 도미에는 이 장면에 그의 눈을 맞춘 것이다.
도미에는 1808년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태어났다. 가난함 때문에 이렇다 할 미술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타고난 재능과 노력으로 1830년 시사 주간지 『라 카리카튀르 La Caricature』의 시사만화가로 데뷔하여 풍자만화가로 이름을 알린다. 하지만 국왕을 모독한 죄로 실형을 받았고 잡지도 곧 폐간되어 버렸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들은 속이 좁은 모양이다.
아기에게 젖을 물린 엄마, 초점 없이 멍하게 앞을 보는 노파, 어두운 구석에 풀썩 주저앉아 눈을 감고 있는 사람, 좁은 차창 탓에 아무런 조명도 없는 어두운 실내에서 실루엣만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표정은 한결 같이 무표정해 보인다. 고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예나 지금이나 무표정한 모양이다. 하기야 무슨 표정을 짓는다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 아닌가? 삶에 지친 사람들이라 함은 이미 그 에너지가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지금 보는 이 그림은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3개의 버전이 존재한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그림은 사실 약간의 미완성에 가깝다. 이 그림과 거의 유사해 보이지만 수채화 버전(1864년 버전)이 있는데, 현재 그 그림은 미국 볼티모어에 있는 Walters Art Museum에 전시되어 있다. 이 그림과 거의 비슷하지만 다른 그림(유화 버전으로 그려진)은 완성작이기는 하지만 여러 번의 광범위한 재 작업을 거쳐 현재는 오타와에 있는 캐나다 국립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