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로부터
자연의 세계는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지만 끊임없이 변화하고 그러면서도 커다란 조화를 유지한다. 또한 모든 것이 저절로 충족되고 살아있는 모든 것은 나름대로 편안한 삶을 즐기다가 생애를 마친다.
그러나 인간 세계는 혼란과 무질서, 투쟁과 추한 대립만이 존재한다. 인간 세계는 무언가 잘못되었다. 인간의 지혜가 새나 물고기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인가? 군주의 권력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정치가, 무장, 학자, 장사치, 강자, 약자, 부자, 빈자 모두 마찬가지였다. 결국 인간의 위험한 마음이 문제인 것이다.
복잡하고 불가해한 인간의 마음은 변덕스럽고 불안정하다. 인간의 마음만큼 위험한 것도 없는데, 그 마음을 모든 인간이 저마다 가지고 있으니 인간만큼 위험한 존재도 없다.
그래서 장자 또한 공자와 마찬가지로 인간관계의 규범이 되는 도덕의 필요성을 수긍했다(命/義). 그러나 도덕규범이 인간 존재의 실상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인간 마음의 미묘한 사정을 면밀히 통찰하여 만들어져야 하는데, 공자의 도덕규범은 그렇지 못한 것으로 보았다.
공자 자신은 언행이 일치하고 권력에 야합하지 않은 위대한 인물이지만 공자의 도덕적 이상주의는 선택받은 인간, 즉 군자, 지배계급의 가르침일 뿐이다. 공자 이후 공자 학파는 공허한 형식화에 치중하고 정치권력과 야합했으며, 규범과 존재, 이상과 현실의 거리를 망각함으로써 규범이 인간을 속박하는 질곡, 허위, 위선이 되어 인간의 진실을 왜곡했다.
그들은 권력에 대해 나약했고 무분별했으며 또 변덕스럽고 심지어 매우 위험하기도 했다. 위태로운 존재인 인간의 마음을 아는데 무관심했고, 인간 삶의 포착하기 어려운 복잡함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은 측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위험하고 갑자기 변할 뿐만 아니라 끝없는 욕망을 만들고 한량없는 지각 작용을 전개시키는 거대한 괴물이다. 욕망과 지식, 이것이 인간을 위태롭게 한다.
욕망은 인간 삶의 본질이며 그 자체는 선이나 악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을 위한 것이(예: 부유함, 명예, 권력) 부유함, 명예, 권력을 위한 인간으로 전도될 때 욕망은 인류를 타락시키고 파멸시키는 위험한 살육의 칼이 된다. 이렇듯 인간의 안정된 삶이 욕망 때문에 위협받고 손상될 때 욕망은 악이 된다.
지식의 본질은 현상 세계에 대한 이분법적 법칙이다. 지식은 ‘대롱을 통해 하늘을 보는 것’이고 ‘송곳으로 땅을 찌르는 것’이다. 가치관도 지식의 산물이다. 대상 세계를 분류하고 구별하고 서열화한다. 지식과 가치관의 작용 역시 인간을 타락시키고 파멸시키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의 가치 기준은 무한한 인간의 가능성을 한정하고 단면화하며, 자유로운 인간 본연의 모습을 속박하고 왜곡한다.(혼돈의 죽음)
온전한 인간의 생명은 질서가 없는 혼돈이다. 지식은 그 혼돈을 자기 질서에 포섭하려고 죽는 줄도 모르고 구멍을 뚫는다. 모든 이론은 체험하고 직관할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 생명을 잿빛으로 바꾼다. 생기를 잃은 지식은 단순한 정리함 속에 갇히고 만다. 지식은 인간에게 자기를 잃게 하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지식으로 ‘나’의 시원과 종말, 인간의 재앙과 축복의 필연적 근거 등을 해결하고자 하나 지식의 유한성과 불완전성을 지식 그 자체로 극복하는 것은 헛수고다. 인간은 죽어야 하는 존재이다. 죽음은 자기 삶과 세계의 근원에 가로놓인 ‘우연성’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죽음 그 자체는 결과적으로 보면 필연적인 것이지만 나 자신에게 예측할 수 없는 돌발적인 그 어떤 것이라는 점에서는 우연이다. 하여 한정된 자기의 삶을 가장 잘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관심사가 되었다.
학자들은 논쟁을 통해 편 가르기를 한다. 대립과 투쟁 속에서 소득 없는 논쟁이 계속된다. 게다가 논의가 아무리 훌륭하고 정밀하며 치밀하더라도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한계성을 갖는다. 인간의 언어 자체가 가진 한계성. 인간의 언어와 진리 사이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메울 수 없는 틈새가 남아있다. 더구나 메울 수 없는 틈새의 저쪽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
논쟁자들의 ‘옳다’, 혹은 ‘옳지 않다’와 ‘그렇다’와 ‘그렇지 않다’로 상호 부정 속에서 끝없이 순환하고 반복하기 마련이다.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다. 결국 주장하는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 되고 대립은 해결되지 않는다.
이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대립의 근원에 있는 그 대립을 포괄하면서 모든 대립을 만들어내는 근원적인 ‘하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意’를 전달하는데 ‘言’이 필요하지만 ‘언’은 동시에 ‘의’를 손상시킨다. 언어문자는 언어문자로 전해지는 의미 내용을 아는 것이 목적이다. 그 내용은 옛 성인의 체험에서 우러난 예지이다. 게다가 그 체험에서 우러난 예지는 언어문자로는 그 전모가 설명될 수 없다. 책은 단지 ‘옛사람의 찌꺼기’ 일뿐이다. (책 읽는 제 환공과 수레바퀴 만드는 목수) 지식을 위한 지식은 삶의 근본과는 무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