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용 Feb 20. 2024

하필 책이 좋아서 _ 김동신, 신연선, 정세랑

책을 쓰고(작가) 만들고(디자이너) 알리는(홍보기획자?) 세명의 저자가 함께 쓴 책이다. 정세랑 작가의 이름을 보고 산 책인데 김동신 디자이너의 글이 너무 좋았고, 신연선 역시 내가 알고 있던 책읽아웃 켈리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다.

정세랑은 주로 출판계의 아쉬운 점을 다룬다. 그는 '언어를 다루는 업계에서 폭언은 변명의 여지가 없고 환경을 개선해야 할 때 감정만 폭발시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썼는데, 언어를 다루지 않는 업계는 없다는 사족을 달고 싶다. 나 역시 늘 하고 싶던 이야기를 그 역시 지면을 빌려 말하고 있었다. 김동신은 디자이너의 글쓰기를 보여준다. "균등한 위상", "수직적 긴장감", "경쾌한 강조점", "율동감과 주목성" 등 눈으로 보이는 것들을 어떤 언어로 풀어내야 하는지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신연선은 출판계의 어두운 전망과 달리 그럼에도 책이 좋아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이곳이 좋아서, 계속 이 일을 한다고 이야기한다.


-

발췌


7

꾸준히 걸어왔지만 남은 길도 많은 상태에서 방향을 가늠하는 이야기를, 그다지 무겁지 않게 해보고 싶었다. 하필 책을 지나치게 사랑하여, 직업으로 삼게 된 이들의 여전한 애정과 가끔 찾아오는 머뭇거림에 대해서 드문드문 나누는 말들을 담아보았다. 분석이라기보다는 빠른 미디어의 시대에 가장 느린 미디어를 만들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 표면에 천천히 떠오른 질문들을 모은 것에 가까운 것이다. 그 말들은 출판계 안쪽을 향하기도, 바깥쪽을 향하기도 한다. 


47

책은 느린 매체이지만, 그럼에도 가장 첨예한 생각들을 담는다. 첨예함은 때로 폭력적인 이들의 주의를 끌고 만다. 상상하기 싫은 사람들이 상상하기 싫은 일들을 저지르려 할 때, 더 준비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57

언어를 다루는 업계에서 폭언은 변명의 여지가 없고 환경을 개선해야 할 때 감정만 폭발시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사수가 단계별로 경험을 전수할 수 없다면 명확한 메뉴얼이라도 정리되어 있어야 하는데 매뉴얼이 갖춰진 곳보다 갖춰지지 않은 곳이 훨씬 많을 것이다. 메뉴얼의 부재는 잦은 구성원 교체의 결과일 수도 있고 원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82

누구든 표현의 욕구가 있다면 자기 삶에 대해, 일에 대해, 현실에서 가깝고 먼 허구에 대해 마음껏 쓰는 쪽이 좋지 않은가? 매일매일 책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결국 자신만의 책을 쓰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89

디자인 일을 해온 동안 사람들 앞에서 디자이너로서 말을 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

그런 자리를 제안해주신 분도 들으러 와주신 분들도 내가 하는 말을 듣기 위해 시간을 내보겠다고 생각해준 것이니 무척 감사한 일이다. 그래도 언제나 쉽지 않은 자리다. 생각만 해오던 것을 사람들이 들음 직하게 표현하려면 글을 쓰고 적절한 이미지를 만들고 평소보다 목소리를 키워서 말도 해야 하니까. 힘들지만 평소 머릿속에 흐릿하게 있던 것을 읽히고 보이는 또렷한 형태로 꺼낼 수 있다는 점에서 생각을 정리하는 좋은 계기이기도 하다.


94

클래식 음악은 몇 백 년 전에 결정된 곡을 반복해서 해석해온 장르이기 때문에 다른 음악 장르보다 "감상의 단위가 매우 세밀"하다. 그 단위에는 소리의 속도와 음량, 질감 등 미세한 부분까지 포함되는데, 때문에 모든 곡은 연주라는 행위에 의해 해석되고 표현되어 이 모든 변수가 실제화한 다음에야 비로소 '음악'이 된다는 듯했다. 

이런한 음악을 북디자인과 비슷하다고 느꼈던 것은 둘다 오래전에 결정된 형식의 반복과 변주를 지속해왔다는 부분 때문이었다. 물론 책의 역사에도 기술의 발명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많은 변화가 있었고, 때로는 변주라는 말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혁신과 비약의 순간들도 있었지만 그 결과로 빚어진 차이는 관심을 기울여 살펴보지 않는 이상 좀처럼 감지하기 힘들다. 그리고 이 점 또한 두 분야가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한 분야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쌓이면 재능이나 감식안의 유무와 상관없이 누구든 전에는 보이지 않던 부분을 볼 수 있게 되는 법이다. 이 글에서는 북디자이너로서 나에게 흥미롭게 느껴지는 디테일과 거기서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작은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96

특별한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잘 디자인된 지면 위에는 글자들을 반듯하게 정리할 기준이 되는 보이지 않는 축이 존재하게 된다. 이 축의 위치에 따라 왼끝맞춤, 가운데맞춤, 오른끝맞춤, 양끝맞춤 등으로 정렬의 종류가 나뉜다. 


97

왼끝맞춤과 양끝맞춤 간이 논쟁은 20세기 초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둘의 관계에서 '대세'이자 표준의 자리에 있었던 것은 양끝맞춤으로, 왼끝맞춤은 양끝맞춤의 단점이 극복된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합리적 형태로서 제시되었다. 왼쪽맞춤 지지자들이 주장한 왼쪽맞춤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양끝맞춤은 동일한 글줄 길이를 달성해야 한다는 목적으로 단어들을 양쪽 축에 붙이기 위해 억지로 잡아 늘려서 글자 사이 간격이 고르지 않다. 그러나 왼끝맞춤은 한 줄에 속한 단어들의 길이에 따라 문장의 길이가 자연스럽게 달라지므로 글자 사이 간격이 고르다. 둘째, 단어를 중간에서 끊지 않아 글의 의미를 손상시키지 않는다..


98

표지 타이포그래피에서도 정렬은 기본적인 작업이긴 하지만 본문에서처럼 호불호가 첨예한 안건은 아니다. 일종의 광고 역할을 겸하는 지면으로서 조형적 실험이 권장되기도 하고, 단 한 페이지이기 때문에 가독성에 대한 요구가 본문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더해 표지 타이포그래피에서는 애초에 본문만큼 '정렬되었음'이 드러나기 쉽지 않다는 점을 들고 싶다. 본문에서는 페이지당 적게는 17행, 많으면 28행 정도의 글줄이 하나의 축을 기준으로 도열해 있지만 표지의 글줄 수는 짧으면 2행, 많아도 10행을 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마치 지지자가 적은 정치인은 권위를 갖기 어려운 것처럼 따르는 글줄이 적은 기준선은 하나의 축으로서 확고하게 인지되기 힘들 수밖에 없다. 

물론 여기에도 경향성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있다. 일단 이제까지 언급되지 않았던 가운데맞춤이 이 영역의 전통적 강자다. 가운데맞춤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글줄 가운데에 맞추어 글줄을 배열하는 문자 정렬 방식. 글줄의 가운데를 중심으로 양쪽 끝이 대칭을 이루어 위엄 있고 우아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예는 라틴 알파벳 문화권 도서 표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데, 글자들을 가운데 축을 기준으로 행을 바꿔가며 배치한 결과 글상자의 윤곽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우아한 분위기를 만든다. 축은 이 모든 요소를 중심에서 지지하는 뼈대로서 지면 전체에 수직적 구도를 형성하며 그 존재감을 뽐낸다.

그러나 모든 가운데맞춤이 위엄과 우아함의 장식적 효과를 의도하고 선택되는 것은 아니다. 표지 요소 배치의 관습적 원칙 - 중요한 건 크게, 덜 중요한 건 작게 - 을 따를 때 가장 손쉽게 정리되어 보일 수 있는 방식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가운데맞춤이 되어버린 경우도 많다. 이런 상황에서는 축의 존재는 물론이고 심지어 같은 이유로 왼끝맞춤이 되어버렸다 한들 누구도 그런 선택의 당위를 묻지 않는다. 그 선택이 표지 전체의 미적 완성도를 좌우할 핵심적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105

그림 3은 왼끝맞춤 다단정렬을 여러 세부 조절을 통해서 흥미롭게 만든 예시다. 제목과 저자 사이에 극단적인 크기 차를 두는 대신 한글 제목, 영어 제목, 저자명으로 구성된 세 가지 덩어리에 비교적 균등한 위상을 부여함으로써 관습적인 느낌을 피했다. 또한 글자가 화면 위쪽에서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일반적인 진행과는 반대로 아래에서 위로 세 개의 축을 따라 계단을 올라가듯 배치되었으며, 전체적인 무게중심도 지면 아래쪽에 있다. 정렬축이 가시적으로 드러나 시각 요소로 활용되고 있는데, 표지 전체에 강렬한 수직적 긴장감을 자아내는 한편 '수용소'라는 작품 제목을 직관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림 4의 표지도 그림 3처럼 축이 시각적 요소로서 직접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눈에 잘 띄는 것이 중요한 한글 텍스트는 지면 상단에 왼끝맞춤으로 안정적으로 배치했다면, 영어 원제는 부제와 함께 지면 중간 아래쪽에 가운데맞춤으로 배치되어 장식적인 효과를 더한다. 파란색 직사각형으로 표시된 축이 바탕의 그림을 가로지르면서 지면에 경쾌한 강조점을 만들어낸다. 


107

복수의 축을 기준으로 하는 가운데맞춤도 흥미로운 레이아웃 방식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가운데맞춤이 장엄한 우아함을 풍길 수 있는 것은 중앙의 수직축이 지면의 유일한 축으로서 권위를 갖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한 가운데 맞춤의 축이 한 지면에 둘 이상 동시에 존재하게 되면 변칙적인 느낌이 든다. 


111

신체와 관련된 책의 세부 명칭 가운데 가장 절묘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책등이다. 등에는 인체를 지탱하는 기둥인 척추가 있기 때문이다. 코덱스의 구조적 정수가 종이를 엮었다는 점인 만큼 엮인 부분들이 모여 만들어진 면을 등이라고 일컫는 것이 퍽 적절하게 들린다. 영어권에서는 직접적으로 spine이라고 부르는데, 실제로 노출 바인딩으로 제작한 책에서 표지를 입히지 않은 책등을 보면 종이 묶음을 실로 엮은 모습이 뼈마디와 닮아 보이기도 한다.


119

로고를 미워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은 통제할 수 없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디자인의 실행은 내가 만든 형태, 내가 고른 색깔, 내가 선택한 글자가 내가 세운 질서에 따라 비어 있던 지면을 채우면서 존재하지 않았던 하나의 이미지를 있도록 하는 과정이기도 하고, 이 순간 느껴지는 감정 가운데 모종의 전능감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로고는 디자이너의 개입 이전에 이 책에 태생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다. 내가 만들지도 선택하지도 않은 이 조그만 아이콘은 디자이너의 얄팍한 뿌듯함에 쉽게 균열을 냈다. 로고가 표지 안으로 들어오면 요소들 사이에 흐르던 긴장감이 맥없이 풀리면서 아까까지는 썩 괜찮았던 표지가 순식간에 진부하게 바뀌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넣지 않을 수 없었다. 자본이 자신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사물에 지울 수 없는 인을 찍어 넣는 것이 로고의 본질이니까 이 위력에 반항해보겠다며 이런저런 시도를 했던 몇 년이 있었다. 


120

로고는 기업이나 상표를 상징하는 이미지인 심벌마크, 기업과 상표를 나타내는 글자를 디자인한 로고타입, 로고타입처럼 글자만으로 구성됐으나 심벌 역할을 겸할 수 있도록 이미지 성격이 강하게 디자인된 워드마크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125

이 시기 탈네모틀 담론을 추동한 것은 합리성, 경제성, 추상성으로 상징되는 근대화를 향한 열망과 한국 고유의 시각 문화를 만들겠다는 민족주의적 의지였다. 전자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네모틀 폰트를 만들려면 최소 2,350자를 그려야 하지만 탈네모틀에서는 최소 67개의 자모만 그려도 폰트 한 벌을 만들 수 있다. 둘째, 파일 용량이 적고 기술적 대응에 용이하다. 셋째, 글자별 형태 차이가 커서 판독성이 좋다. 

후자에 대해서는 탈네모틀이야말로 초성, 중성, 종성을 모아서 한 글자를 구성하는 위대한 한글 창제의 원리를 온전히 살린 것이라는 점이 강조되는데, 이때 네모틀은 일종의 안타고니스트로서 중국 문화의 잔재이자 한글의 본성을 억압하는 질곡으로 규정된다. 

이처럼 선명한 의도를 갖고 디자인된 탈네모틀 글꼴은 당시에는 낯설고 읽기 힘든 서체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그 점이 어떤 층에서는 새롭고 전위적인 디자인의 증거로 여겨질 수 있는바, 1980, 90년대 막 시작하는 지적 야심이 넘치는 출판사라면 자신들의 시각적 상징으로 탈네모틀 글꼴을 선택했으리라고 상상해볼 법하다. 


127

이제까지 말한 로고타입들이 여전히 텍스트성이 강했다면, 아래의 사례들은 좀 더 워드마크에 더 가까워졌다. 자모들을 원소적 도형의 형태로 환원시켜 다양한 기준선에 맞춰 정렬하거나 모아쓰기 원리를 자유롭게 변주해서 율동감과 주목성을 얻고자 한 디자인들이다. 

..

하나 이상의 기준선을 갖는 로고타입들. 중성 윗선이나 초성 중심선을 기준으로 하되 중성의 밑선이나 중심선을 함께 기준선으로 쓰기도 한다. 정렬을 맞추면서도 한 두 글자는 기준선에서 어긋나도록 상하로 크게 움직여 리듬감을 살렸다. 

..

기로쓰기 정렬에서 벗어나 글자를 상하좌우로 자유롭게 조합했다. 낱자의 기하학적 특성이 더 강해진다.


128

이 유형에서는 위의 사례에서 보이던 이미지성이 보다 극대화되었다. 한글 자모를 기하학적 원소로 추상화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쓰기의 원칙과 무관한 조형적 의지로 획과 낱자의 형태를 과감하게 변형한다. 

..

바탕체와 손멋글꼴을 사용한 로고의 비중은 낮은 편이었다. 이 중에서도 기성 폰트에 기반한 바탕체 로고타입은 더욱 적었다. 가는 획과 섬세한 부리가 특징인 바탕체는 회사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삼기에 다소 약하게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

로고타입을 영문으로 만드는 경우는 많지 않았으나 조금씩 늘어나는 추세다. 한글에 비해 낱자의 구조가 단순해서 그래픽적 변형을 가하기 유리하다는 장점이 있다.

..

조사 결과 200개 출판사 중 과반수 이상이 탈네모틀 돋움체를 로고타입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부리가 있는 바탕체보다 조형적으로 해석하기에 더 간편한 데다 또렷하고 합릭적인 인상이 강한 주목도를 지향하는 로고타입의 특성에 잘 부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로고의 목적 가운데에는 다른 회사와는 차별된 자신만의 이미지를 시장에 각인시키는 것도 있다. 명백한 주류 디자인의 존재를 가늠할 수 있는 지금과 같은 상황은 어찌 보면 역설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138

많은 출판인들이 독자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궁금해하고 어떻게 해야 그들이 좋아할지 고민하는 모습을 보아왔지만, 개인적으로는 독자에 대해 불가지론에 가까운 입장을 갖고 있었다. 디자인에 대한 호오라는 것이 사람마다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특정한 경향을 예상하고 따라간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145

북디자인은 텍스트나 이미지를 책이라는 매체로 구축하는 일이다.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상 책으로 만들 내용은 디자인보다 먼저 존재하며 내용을 만든 사람과 디자이너는 별개의 인물이다. 이와 같은 선후 관계의 존재는 북디자인을 작가/내용 대 디자이너/형식이라는 이분법적 대립 구도로 설명하기 쉽게 한다.

..

현장에서 이 디자인이 좋은 디자인인지 나쁜 디자인인지, 형식이 내용에 얼마나 잘 부합하는지 판가름할 수 있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을 만들기는 어렵다. 지금 눈앞에 있는, 혹은 메일창 너머에 존재하는 편집자와 그의 상급자, 출판사의 대표, 그리고 작가라는 구체적인 개인들이 제각기 지닌 잣대의 충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다양한 입장들이 디자이너가 만들어낸 시안을 두고 경합한 끝에 최종 디자인에 다다른다.

이것이 어떠한 디자인도 가치를 판단할 수 없으며 오직 취향의 다름만 있을 뿐이라는 뜻은 아니다. 한 권의 책을 만드는 낱낱의 사건들 속에서 기준이 적용되는 방식을 말한 것이다. 디자인의 판단은 사람들 간의 관계라는 형태로 작동하므로 관계 속에 존재하는 권력의 문제가 개입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관계에서 더 많은 힘을 지닌 사람은 자본과 텍스트를 소유한 사람, 남성들일 때가 많다. 이들의 의견은 개인의 호불호를 넘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가치, 이를테면 내용에의 적합성과 가독성, 그리고 시장 트렌드와 자주 동일시된다.


149

책표지는 자주 얼굴에 비유된다. 만약 이 얼굴에 성별이 있다면 그것은 여성일 것이다. 요즘 표지 디자인의 스타일이나 유행이 '여성적'이라는 게 아니다. 표지-얼굴이 처한 상황이 여성의 그것과 닮았다. 호감이 가야 하고, 항상 웃어야 하고, 예쁘면 가장 좋은, 손쉬운 평가의 대상이 되는 얼굴. 꾸미면 화장이 너무 진하다고 훈계를 듣고 때로는 얼굴보단 마음이 고운 게 진짜 예쁜 거라며 칭찬을 듣는 존재. 너무나 익숙한 말들이다.


151

가장 아름다운 것을 고르는 일은 정치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인간 사회에서 강한 영향력을 지닌 아름다움이라는 가치의 분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 집에서 가장 아름다운 식물을 정하는 일이라면 즐거운 대화로 결론에 이를 수 있겠지만 국가 정도로 규모가 커지면 갑론을박을 피하기 어렵다. 선택의 결과가 어떤 식으로든 구성원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되니 당연하다. 한편으로 다양한 의견이 나온다는 것은 사회의 건강함을 드러내는 지표이기도 하다. 조용한 조직, 한 가지 목소리만 크게 들리는 사회는 위험하다.


153

이제까지 책 디자인은 텍스트를 기준 삼아 가치를 평가받는 경향 - 내용을 얼마나 잘 반영하는가, 가독성이 얼마나 좋은가 등 - 이 강했고, 이것은 텍스트와 디자인의 관계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로 확장되기보다는 결과적으로 디자인을 가장 관습적인 형태로 수렴시키려는 힘으로 작용해왔다. 그렇기에 북디자인을 하나의 독자적 장르로 자리매김하려는 이 행사가 '내용'이라는 강력한 극점으로부터 멀리 달아나 새로운 극이 존재함을 선언하는 것은 필연적인 선택이었으리라 생각한다. 


189

그러고 보면 을로 일해야 한다는 말을 하던 사람들은 정작 그럴 수 있을 때에는 언제든 자신이 아니라 상대를 을로 만들어버리곤 했던 것 같다. 어째서 일터에서 위계를 나누고, 상대를 낮은 곳 혹은 높은 곳에 두어야 한단 말인가. 


190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친절을 베풀어야만 합니다.


191

예의바른 태도,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 상대의 인격을 나의 인격과 같은 것으로 여기는 지극한 태도는 어디 소속의 누구, 어떤 경력의 누구같은 라벨보다 훨씬 더 상대를 고유한 한 명의 사람으로 만날 수 있게 한다.


207

더 잘 살고 싶어지게 하는 사람, 내가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사람들을 나는 모두 출판계에서 만났다. 지금 함께 일하고 있는 팟캐스트 책읽아웃의 동료들은 각자가 아주 능력 있는 사람들인 동시에 '저 사람이 뻘소리를 하면 어떡하지' 같은 걱정은 거의 하지 않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드문 사람들이다. 출판계 동료들과는 페미니즘, 비거니즘, 노동권과 환경 문제 등의 주제를 기본적인 공감대 아래에서 편하게 의견 나눌 수 있다.

이건 원래 엄청나게 어렵고, 놀라운 일이다. 오래 알고 지낸 친구나 심지어 가족과도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어딘지 덜컹거리는 것을 느끼지 않나. 아니, 이 주제를 꺼낼 수조차 없을 때가 훨씬 더 많다. 그러니 번번이 놀라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타심과 공감능력도 키워나가야 할 능력이라고 굳게 믿고 있고, 출판계에는 그런 능력자들이 아주 많아서 자주 기쁘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출판계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들을 마주하며 느끼는 환멸들로 모든 게 지긋지긋해질 때조차 내가 만난 이 멋진 친구들이 다 내가 책을 사랑하고, 출판을 사랑했기 때문에 만날 수 있었던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한없이 안심이 된다. 


208

공부하는 사람들, 작은 목소리를 들으려는 사람들, 자신의 이야기를 용기 내어 하려는 사람들, 그렇게 서로를 성장시키는 사람들이 여기에 있다. 그런 이유로, 나는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이곳이야말로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확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214

도서관이 존재하는 이유는 책의 '공공성'을 사회적으로 공감해서가 아닌가. 돈이 없어도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시민 모두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한 사회라면 출판 사업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들도 훨씬 다양하게 두어야 한다.


225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나는 '자기효능감'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일을 할 능력이 있다고 믿는 마음. 타인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다는 확신.

이때 자기효능감은 많은 사람의 관심이 집중되는 유명하고 커다란 프로젝트를 해야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무리 하찮게 느껴지는 일도 그 일이 필요한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고 수행한 뒤 끝내 완수하고 나면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 자기효능감이다.

동료와 함께 일할 때 일의 목표와 각자의 역할에 대한 대화를 정확하게 나누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그 일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일의 큰 그림을 조망하게 되고, 그 속에 선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나만의 목표를 설정할 수 있으니까. 나는 그것이 자기효능감의 첫 발이라고 생각한다. 


249

'알면 사랑한다'는 말을 늘 좋아하는데 나로 말하자면 책이 가져다준 다양한 세계 덕분에 사랑과 용기를 가진 사람이 되었다고 믿는다. 책과 저자에게서 알게 된 새로운 세계를 '잘' 알고자 하면 그 세계를 이내 사랑하게 되었고, 그 사랑 덕분에 세상에 대한 환멸이 닥쳐올 때도 그것을 물리칠 용기를 갖게 되었다. 나에게 그런 용기를 준 책이 몇 권쯤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언제나 가장 큰 용기이고.

매거진의 이전글 일 멈추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