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문고 산책 길에 우연히 발견한 책이다. 웬만하면 누군가의 추천 없이 책을 사진 않는데 이 책은 왠지 사게 되었다. 표지와 내지 디자인이 독특했고 잠깐 서서 몇 페이지 읽는 것만으로도 글이 좋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신생공간이라는 사건을 복기하며 저자가 전해준 여러 인상들은, 마치 신생공간의 태도나 자세처럼 읽혔는데 그것들이 마음에 들었다. 책의 제목인 미술 사는 이야기가 '미술을 사는 이야기'가 아닌 '미술이 사는 이야기'라는 중의적 의미 같기도 했다.
좋았던 지점들
아주 활기차게 수지에 맞지 않는 장사를 하는
나를 부르는, 내가 가야 할 것 같은, 나에게 가깝다고 느껴지는 지점들
깊이 혹은 저 너머에 숨겨진 의미 대신 표면에 머무는 질감을 옹호하는 현장
단일한 목적을 향한 연대보다 각자의 자리에서 무엇인가 되어가는 과정을 공유하는 자발적인 움직임
비장한 상승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를 발견하고 시간을 보내며 유무형의 자원을 길어 올리는 일
올라갈 수 없다면 오히려 즐겁게 게걸음 치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지도
수평적인 관계에서 동료들과 피드백을 주고받고 재미있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도모하는
대가를 요구하지 않되 서로를 착취하지 않는
창작자가 벌인 무모하고 흥미진진한 일에 대한 피드백
중대한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동료의 이야기를 들어줄 시간과 마음
유해한 선례를 남기지 않도록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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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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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누군가 내게 미술에 대한 책을 쓰게 될 거라고 말했다면 헛소리라며 일축했을 게 분명하다. 막 상경해 대학교를 다닐 당시에는 미술과 거리가 먼 전공을 공부하며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도시를 살아내느라 '미술 같이 고상한 것'에는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거니와 어디서 미술을 만날 수 있는지조차 몰랐으니까. 하지만 우연에 우연이 포개지고, 만남이 만남을 부르면서 어느새 전시를 만들고 미술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이 업이 되었다. 누구나 인정하는 등용문을 통과한(그런 것이 있기는 했나?) 적은 없지만 분명 시작이라 할 만한 기회, 여기 어딘가에 내 자리가 있는 것 같다는 어렴풋한 확신, 어떤 세계의 발견 끝에 따라오는 설렘을 선사한 사건과 사람이 있었던 건 분명하다. 돌이켜보건대 그것은 나만의 경험에서 끝나지 않고 2010년대 동시대 미술계에서 펼쳐진 어떤 흐름, 즉 '신생공간'의 시공간과 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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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무어라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어쩐지 '재미가 없다'고 입을 모으는 각자도생의 시대를 맞이하고야 말았다. 방학숙제를 마무리하지 못한 채 맞이한 신학기의 초조함, 끝나버린 관계를 매듭 짓지 못한 채 시작되어버린 새로운 만남의 찝찝함 같은 것이 따라붙는다.
불확실한 과정 속에서도 미술을 하며 사는 삶이 지속가능한 것인지,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고민한 이들이 있었고, 나는 어쩌면 이들이 펼쳐 보인 때로는 기발하고 때로는 실패가 예견된 시도들의 목격자 같은 것이었다. 나 스스로 미술을 하며 살아야겠다는 비장한 결심을 해본 적은 없었지만, 전형적인 생애주기 혹은 성장서사에 대한 신뢰가 붕괴되는 가운데 젊은 창작자들이 조직한 시공간은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불과 몇 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이러한 목격에 대한 증거품이 옷장 한구석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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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력이 좋지 않은 나를 대신해 어느 사건 한복판에 있었던 사물들을 앞세워 서울이라는 도시에 정착하여 살아가는 일, 취향을 발견하며 나를 찾아가는 일, 행동반경을 확장하고 사람을 만나는 일, 돈을 벌고 쓰는 일, 즉 '미술 사는 일'이라 요약될 법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에 불과하다. 이 이야기가 기록되어야 하는 이유는 단지 나뿐만 아니라 한 움큼의 사람들이 미술 사는 일을 함께 겪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미술관으로 출근을 하고, 퇴근하면 미술이 어땠느니 하는 글을 쓰고, 주말이면 충무로의 작은 미술공간에 사람을 모아보려 하는 현재 내 삶의 양식에 대한 지분이 그들에게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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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즈'는 티켓을 파는 입구에서부터 창작자와 방문객 사이의 거리가 팔 하나 길이밖에 되지 않는 좁은 부스까지, 모두가 대놓고 사고팔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태도 때문이었을까, 우려 섞인 시선도 있었다. 미술이 이렇게 가볍게 거래될 수 있는 것인가? 젊은 창작자들은 결국 시장에 편입되기를 희망하는 것일까? 게다가 서브컬처나 아이돌 산업에서 제작사의 정식 허가를 받아 만들거나 개인이 2차 창작으로 제작한 소품류를 통칭하는 '굿즈'를 행사의 제목으로 제시했으니, 의심을 살 만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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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호는 수채 드로잉을 벽에 걸어놓고, 규격에 맞추어 원하는 구간을 잘라서 살 수 있게 했다. 꽤 인기가 많았던 터라 마지막날쯤 돼서는 그림이 너덜너덜했다. 김웅현은 2015년부터 이어질 3부작 개인전 '공허의 유산'의 프리퀄 격으로 정육사를 자처하여 소를 제작해 살을 발라 판매했다. 조익정과 퍼포머들이 굴렁쇠를 굴리며 붐비는 사람들 사이를 날렵하게 스치며 달리는 사이, 김동규는 판매할 만한 굿즈가 없다며 행사 기간 내내 거지로 분장하여 구걸을 했고, 박보미는 정체불명의 검은 물을 팔았다. 젊은 작가가 주도한 대안적인 미술 시장이라고 부르기에는 가벼운 농담이 야심과 포부를 눌러버렸고, 돈을 벌겠다고 장을 펼쳤다기에 판매가는 재료비나 인건비조차 건질 수 없어 보였다. 이들은 아주 활기차게 수지에 맞지 않는 장사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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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국면으로 이행하기 위한 발판의 소실은 청년 창작자에게 위협적인 정황이 분명했으나 동시에 소위 '데뷔'를 위한 통과의례가 약화되면서 작가로서의 성장 기반을 재구성할 수 있는 공백이 마련된 것이기도 했다.
이런한 맥락에서 등장한 '굿-즈'는 기성 미술 제도나 시장에서 순환하기 위해 마땅히 갖춰야 할 경력이나 젊은 작가로서 잠재력을 증명해내기 위한 일련의 단계 중 하나로 마련되었다기보다, 굿즈라는 개념 혹은 양식을 공통 질문 삼아 창작자가 당도한 현실에 대한 각자의 답을 내놓는 장에 가까웠다. 각 창작자는 거래된 적이 없는 작품 혹은 실천을 가질 수 있는 단위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스케일과 매체 측면에서 변주를 감행하고, 창작자로서의 자신의 태도와 방향성을 재고하게 된 것이다. 판매의 여부와 그 형태는 수익과 생존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작가가 작업을 대하는 태도와 직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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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미술을 소비하기 전까지는 작품이나 전시를 보고, 이로부터 발생한 감정을 눌러 담아 누가 읽을지도 모를 글을 쓰곤 했다. 미술을 뜯어보고, 생각하고 그러면서 작업과 나의 삶과 이를 둘러싼 더 큰 세계를 글로 엮어내는 활동은 미술에 대한 애증을 표현하는 일이자 이를 '가지는' 일이었다. 물론, 작품 감상의 세계는 넓고 깊어서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수없이 많은 생각을 자아내는 데다가 글쓰기에 감히 끝은 없기에 그 어떤 작품도 가질 수 없다. 때문에 적극적인 감상과 글쓰기라는 활동은 결코 소비로 대체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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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로겐 조명과 마법의 거울을 갖춘 드레싱 룸에서 볼 때 멋있던 옷이 형광 조명과 일반 거울 앞에서도 근사하리라는 법이 없듯, 전시장에서 본 좋은 작업이 집에 와서 조화롭게 자리 잡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피규어를 모으는 한 지인이 알려주길, "덕질의 완성은 부동산"이라는 말이 있단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제 위치를 잡기 위해서는 능력껏 환경을 조성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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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사진을 구매하는 경험은 공간을 조성하는 데 사용된 이케아 가구처럼 딱 맞아떨어지는 모듈을 조합하는 것과 유사한 쾌감이 있었다. 총 1,020장의 사진은 작가와 작품에 대한 정보 없이 모두 A4 사이즈로 출력되어 데이터 용량의 오름차순으로 진열되어 있었다. 이것저것 재거나 눈치 볼 것 없이 그 많은 선택지 중에서 직관적으로 좋아 보이는 사진을 고르면 그만이었다. 사진을 골라 고유 넘버를 적어 넘기면 사진과 함께 관련 정보를 포장해서 건네주는데, 그제야 각 작업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게 된다. 뭘 알고 작품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구매해야 비로소 알게 되는 시스템을 통해 많은 이가 사진을 난생처음 구매했다. 결제하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며 한 운영자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사진이 팔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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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견은 가족의 행복과 불화뿐 아니라 각 구성원의 치부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는 구성원으로, 함께 살게 된 순간부터 떠날 때까지 언제나 아기로 머물면서 인간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한편 심경을 복잡하게 헤집어 놓곤 한다. 그에게 최선의 것만 주려고 하지만 그들의 언어를 알지 못하는 인간으로서는 이 동물이 행복한지 결코 알 수 없다. 균형 잡힌 영양분을 제공한다고 소문 난 사료를 먹이고, 좋은 장난감과 쿠션으로 집을 가득 채워도 그것이 인간의 죄책감을 덜고 외로움을 채우려는 일이 아닌지 의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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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서는 어떤 작품도 지시 또는 허락이 없는 한 만질 수 없기 때문에 옷깃이라도 스칠세라 극도로 경계하지만 내 생활공간에 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물리적, 심적 거리감이 좁혀지고 관찰할 시간도 무한정 늘어나면서 손이 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나와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반려사물 같은 것이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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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조각만 만질 수 있는 건 아니다. 드로잉을 한곳에 오래 걸어두면, 눈이 이리저리 선과 공백을 왕복하며 그 표면을 어루만지게 된다. 박아람의 연필 드로잉 '굴리기'(2012)에는 서사나 재현의 요소를 빠뜨린 채 두 칸에 걸쳐 네 개의 원이 그려져 있다. 단순하게 표현된 원이 먼저 눈에 들어오지만 어느새 그 주위의 거친 연필 선을 따라 위아래로 시선을 왕복하기 시작한다. 박아람은 눈을 굴리는 행위를 일종의 퍼포먼스로 보고, 눈 굴리기를 지시하거나 유도하는 작업을 해왔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두 쌍의 원은 데구루루 운동하는, 눈동자가 아래를 향하는 두 쌍의 눈알처럼 보인다. 거기에 더해 연필선을 따라가며 배경을 함께 칠해볼 수도 있다. 그러다 여백에 시선을 두고 잠시 쉬어갈 수도 있겠다. 이렇듯 드로잉에서도 시선이 선과 형상과 여백 사이를 살뜰하게 훑어내는 시간이 쌓인다. 만질수록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이 있는 양 다가오는 조각처럼 드로잉도 오래 두고 보면서 서로를 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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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과 함께 산다는 것은 같은 공간에 머물면서 손과 눈으로 그것을 만지고, 더 알아가고, 그것만의 고유한 특징과 위치를 발견해가는 과정이다. 이는 소유자가 사물에 의미를 부과하는 일방적인 관계에 그치지 않는데, 생활공간으로 들어온 작품은 동거인의 동선과 시선을 재조직하기에 이른다. 아무것도 없던 벽에 드로잉이 하나 걸리면 몇 초나마 시선이 머물게 되고, 책을 쌓아두었던 선반에 작은 조각을 얹어 놓으면 지나칠 때마다 그것을 괜히 쓰다듬을 테니 말이다. 다양한 재료의 조각과 상상의 여지를 남기는 드로잉이 일상을 침범할 때, 비활성화되어 있던 감각이 순간순간 살아난다. 이러한 각성의 경험은 미술 전시를 관람하는 태도나 작품을 구매하는 기준에도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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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논리로 볼 때, 이러한 행사는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근본적인 이유는 판매자와 구매자가 동질적인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미술 시장과는 거리가 먼 젊은 작가들이 서로의 창작물을 구매해주었던 것이다. 쉽게 말해 새로운 소비자층을 개발하지 못한 채 우리끼리 돈을 돌려쓰면서 수입과 지출이 상쇄된 샘인데, 이 지점이 바로 작가 장터의 궁극적인 실패 원인이자 동시에 새로운 교환의 가능성을 볼 수 있는 지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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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의 태도와 마음처럼 어쩌면 전시를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정작 기록할 수도 붙잡을 수도 없는 것은 어디로 가는 걸까? 당시에 시간을 함께 보낸 사물은 구체적인 정보를 전달해주지 못하지만 지나간 사건에 대한 일종의 저장 장치가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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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순례 놀이에 국공립미술관이나 대형 사립미술관을 포함시키지 않았던 것이 꼭 제도권 공간이나 기성 미술계에 대한 반항심을 표명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나를 부르는, 내가 가야 할 것 같은, 나에게 가깝다고 느껴지는 지점들을 중심으로 움직였을 뿐이다. 그 점들은 결코 한 동네에 몰려 있지 않았고, 운영자나 작가를 안다든가 하는 당위성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각 공간들이 홍보에 대단히 적극적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정확히 아는 것처럼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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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직설법 대신 리듬으로 소통하는 연약한 연대와 흔히 평가 절하되는 여성적 언어, 깊이 혹은 저 너머에 숨겨진 의미 대신 표면에 머무는 질감을 옹호하는 현장이었다. 무질서하게 놓여 있는 듯한 작품은 게으름이나 포기가 아니라 긴밀한 대화, 긴장과 갈등 끝에 도출된 절묘한 균형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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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한 목적을 향한 연대보다 각자의 자리에서 무엇인가 되어가는 과정을 공유하는 자발적인 움직임은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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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곳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 그것이 무얼 해줄 수 있는 걸까? 일련의 '함께 하기'는 생각이 굳어지거나 사건에 이름과 판단이 붙기 전 몽글몽글한 잠재적 구간을 최대한으로 연장하여 야금야금 맛나게 먹는 상태에 가까웠다. '전문' 미술가의 일이 작품을 만들고 그것을 전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이를 위해 제도권 기관의 호명을 받거나 아르바이트와 기금으로 필요한 자원을 끌어 모으고, 한 번 쓰고 버릴 집기를 제작하고, 여러 전문 인력을 동원하여 그럴듯한 모양새를 만들어 전시를 하는 일은 때로 창작의 동력 자체를 비용으로 요구하곤 한다. '성공한 작가 되기'라는 불확실한 목표를 좇다가는 지치고 길을 잃을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적절한, 아니 유일한 선택지는 적당한 기회에 발탁되기를 기다리거나 비장한 상승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를 발견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유무형의 자원을 길어 올리는 일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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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과 상승의 서사는 고장 났다. 그렇다면 더 이상 제도권의 승인을 선망할 필요도, 권위 있는 인물의 발탁이나 추천을 기다릴 이유도 없다. 올라갈 수 없다면 오히려 즐겁게 게걸음 치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지 모른다.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동료들과 작업에 대한 직접적인 피드백을 주고받고, 재미있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도모하는 공동의 정서가 있다면 그것으로 이 시기를 충분히 함께 날 수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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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함이나 지위를 부여하는 단단한 조직이 아닌 마치 구름 같이 성긴 네트워크에서 위계형 폭력이 가능했다면, 그것은 애초에 그 기반이 매끈하기보다 울퉁불퉁하며, 평평하기보다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또 다른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가해자의 무기, 즉 그를 향해 쏠려 있는 관심과 기회를 끊어내야 한다는 데 여론이 모여 들었다. 신생공간 활동이 경제적인 이윤이나 사회적 지위를 가져다주지는 않았지만 '관심'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자본을 나눠 가질 수 있게 했다는 관점이 등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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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간을 통과한 이들은 이제 거론할 수 없는 인물과 사건을 공유하게 되었다. 무언가 신나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던 기대감이 사실 누군가의 고통과 공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식한다면, '우리'는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서로의 신원을 확인하지 않고도 같은 곳을 보고 있다면 함께 할 수 있다는 개방성은 불신으로 대체된다. 누구든 공간을 열고 흥미로운 일을 도모하는 기동성에 제약이 걸린다. 학연이나 지연에 얽메이지 않는 우연한 만남에 거는 기대감에는 검증되지 않은 접선에 대한 두려움이 드리운다. 큰돈을 벌거나 유의미한 커리어의 성취를 얻지는 못해도 큰 재미가 남는다고 믿었지만, 흥의 기억은 변질되고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았던 책무가 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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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태그 운동이 소셜 미디어를 공론장으로 전환했다면, 소셜미디어의 상업화는 온라인 플랫폼을 하나의 커다란 스팸 게시판으로 만들었다. 소셜미디어의 알고리즘은 더 이상 내가 좋아할 만한 미술공간이나 창작자의 계정을 소개해주지 않는다. 대신 낮밤으로 내 말소리를 훔쳐 듣고 귀신같이 필요한 상품을 눈앞에 들이미는 카탈로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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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소비가 정체성과 완전히 일치될 수는 없고 그 사이를 벌려 놓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겠지만, 오늘날의 소비는 불가피하게도 시간과 관심, 돈을 어딘가로 향하게 하는 선택을 아우르는 활동이 되었다. 나의 소비와 그 결과물에 대한 처신은 나의 관심과 애정(혹은 애증), 기대감을 보여주는 증거물이 될 것이다. 그러니 무언가를 집에 들인다는 것은 한순간의 즐거운 소비 경험을 넘어 일정 정도 책임을 지는 행위가 된다. 많은 시간이 흘러, 이 사물이 하나의 군집이 된다면 그것이 무엇을 말하게 될지 궁금하고, 또 두렵다. 동시에 바로 이러한 두려움을 안고, 보다 의식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물론 이 과정이 마음에도 없는 당위를 억지로 만들어내 나를 검열하는 불행으로 향하기를 원치 않는다. 다만, 이미 내려온 선택 기저에 있는 무의식적인 기준을 발견하며 더 다듬는 것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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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문을 다는가'가 아니라 어째서 이러한 공간이 열렸는지를 질문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수익성 사업을 진행하지 않고, 심지어 비용의 상당 부분을 사비로 부담하면서 서로의 작업 활동을 지지하는 공간이 한 도시에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것이 오히려 예외적인 상황이었다. 전시 기회를 얻기 어려웠던 신진 창작자들의 문제의식으로부터 탄생한 신생공간은 부담되지 않은 정도의 대관료를 받거나 그조차도 받지 않고 주변의 동료나 비슷한 상황의 창작자에게 공간을 내어주었다. 대가를 요구하지 않되 서로를 착취하지 않고, 금전적 거래가 아닌 다른 종류의 상호교환을 통해 형성된 관계망은 체계적 기반 위에 있었다기보다 같은 시기와 조건을 함께 겪는 이들이 무의식적으로 선택한 임시방편이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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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신생공간을 주제로 한 학위 논문이 몇 편 발표되었다는 것을 알고 적잖이 반가웠다. 아직 매듭 짓지 못한 숙제를 뒤늦게라도 해보려는 듯 찾아서 정독하며 당시에는 희미했던 연결 고리를 추적하거나 서로 다른 입장의 차이를 발견하기도 했다. 미술사 연구의 주제가 되었다는 것은 신생공간이 그만큼 중요한 흐름이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로부터 비평적 거리가 확보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나가버린 일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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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대에 젊은 컬렉터 층을 겨냥하며 우후죽순 생겨난 젊은 아트페어는 어쩐지 내가 굳이 갈 이유가 없어 보였다. 마치 나를 부르는 것 같았던 이전의 판매 행사에서 취급했던 것은 상품으로서의 가치는 가늠하기 어렵지만 창작자의 실천과 행보, 행사의 취지 및 맥락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때문에 때로는 하찮아 보이는 것조차 의미 있는 시공간에 대한 기념품을 구매하듯 사물 그 이상의 무언가를 가지는 경험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것이 제값을 할 만한 완성도를 보장한다거나 가치 상승을 기대할 수 있어서라기보다 창작자가 벌인 무모하고 흥미진진한 일에 대한 피드백을 보내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게임의 규칙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창작자들은 자신이 들인 공력과 재료비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가격을 제시해 손해 보는 장사를 했다. 창작자는 부러 어설픈 판매자를 자처했고, 관객은 스스로를 소비자로 주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다음 시대의 행사는 어쩐지 나를 위한 것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들썩이는 서울에 우리의 자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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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생각을 했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얼추 비슷한 채도와 명도의 절망과 소망을 공유하며 한 시절을 통과하며 나온 우리는 이제 어디에 있을까? 마치 집단 최면에 걸린 듯한 시기를 지나며 지독한 숙취에 시달리고 있는, 갑자기 밝아온 내일에 어리둥절한 것은 분명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분위기에 휩쓸려 이어진 충동구매로 양손 한가득 잡다한 것을 들고 온다거나 한참을 한구석에서 처음 만난 작가와 수다를 떠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나는 이제 냉정한 소비자 혹은 냉철한 투자자가 되어야 하는 걸까? 과연 그게 가능할까?
이전보다 조금은 더 겁이 많아지고 지친 스스로를 발견해도 실망하지 않기로 한다. 한 시기가 지나간다고 그때 목격한 힘의 응집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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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 아닌, 심지어 물건조차 아닌 것이 사고 싶기도 하다. 어쩌면 여유란 고가의 작품을 사들일 수 있는 능력이라기보다 중대한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동료의 이야기를 들어줄 시간과 마음, 서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동료들을 이어줄 수 있는 통찰, 유해한 선례를 남기지 않도록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용기 같은 것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그것을 지탱하는 것은 커피 한잔처럼 부담 없는 것일 수 있지만, 누구라도 들어와 사용할 수 있는 방이나 집, 건물과 자리에 이르는 묵직한 것일 수도 있겠다.
2010년대 미술은 다름 아닌 이런 자원을 기반으로 함께 생존하기를 도모한 장이었고, 나의 미술 사는 일은 이러한 실천에 참여하는 방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