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부터 2019년까지 뉴욕 브루클린의 한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하며 쓴 일기를 모은 책이다. 요즘은 그냥 다른 사람의 '일'에 관심이 많은데, 카운터 너머의 '일'은 어떤 모습일지 문득 궁금해 책을 읽었다. 뉴욕이란 도시나 바리스타란 직업에 흥미가 있지는 않았다.
카페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와 커피를 사가는 손님과 예상치 않게 등장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 크고 작은 사건을 만나며 느끼는 감정들. 바리스타로 일하며 해야 하는 각종 일들을 적어 놓았다. 뉴욕 브루클린의 작은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해보고 싶은 사람에겐 꽤 괜찮은 참고도서일 것 같다.
책 말미, 저자가 카페를 떠난다고, 단골들에게 이별을 고하는 것이 걱정이라고 말하는데, 나도 모르게 작게 탄식했다. 아.. 가면 안돼.. 나도 그의 단골이 된 걸까.. 크게 드러나지 않지만 저자가 사람과 일을 대하는 마음이 참 좋았던 것 같다. 이 책이 번역되어 그 카페에 놓이고, 그의 단골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어떨까.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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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는 단지 카페가 아니다. 제2의 집, 제2의 작업실이다. 작업실이 따로 있어도 일주일에 두어 번 또는 거의 매일 들를 정도로 업무 효율이 높은 공간이며 나른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게으른 마음이 스르르 스밀 때 떠오른느 곳 역시 카페다. 편안하되 적당한 긴장감, 고요와 소요를 오가는 활력, 인물과 사물이 빚어내는 다채로운 풍경, 남이 내려주는 커피가 그곳엔 있다. - 이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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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여기에 와버린 걸까? 분명 서울의 어두침침한 사무실 형광등 밑에서 공기청정식물과 함께 누렇게 말라가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뉴욕 브루클린에 위치한 어느 카페의 카운터 앞에 서 있다. 평생을 책상 앞에 앉아서 산 사람답게 하체 근육이라곤 없었는데 어느덧 내 다리는 반나절은 거뜬히 서 있을 만큼 탄탄해져 있고 발은 딱딱한 구두가 아니라 말랑한 운동화를 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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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벅스에나 가!"라는 모진 말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중소규모 바리스타들이 마음속에만 품고 다니는 금기어다. 마치 서랍 속에 감춰둔 사직서가 직장인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듯,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는 그 말을 속으로 구시렁거리는 것만으로도 무례한 이에게 소심한 복수를 한 듯 통쾌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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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시작한 첫날 나를 트레이닝시키던 바리스타가 해준 말이 있다.
"넌 이제 커피의 신이야. 커피를 달라고 들어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커피를 마시기 전이니까 제정신이 아닌 좀비들이거든? 그들에게 커피를 줄 수 있는 너는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거야. 그러니까 그들이 아무리 재촉해도, 무례하게 굴어도 쫄지 말고 네 페이스대로 천천히 해줘. 어쩌겠어? 커피를 가진 자는 너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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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바리스타였다면 그러거나 말거나 상대 안 했겠지만 손님이 왕인 나라에서 온 데다 천성적으로 노예이자 갈등 포비아이자 소심한 나는 "죄송합니다"라며 최대한 미안하고 안타까운 얼굴을 해 보였다. 그러곤 돌아서서 '내가 주인도 아니고, 가격 결정권도 없는 나한테 왜..' 와 '그래도 손님 입장에서는 내가 업장을 대표하는 얼굴이니까 나에게 호소하는 게 맞겠지'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며 슬쩍 속상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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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스트리트 부근의 광고 회사에서 30여 년을 종사한 그는 젊은 시절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시간이 없다'는 생각을 매일 하다 어느 날 '이대로라면 평생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 굳은 결심을 했다고 한다. 매일 남들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해서는 회사 옆의 카페에 앉아 한 시간 동안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매일 아침 그림을 그리다가 은퇴를 한 이후에는 여전히 같은 시간에 집을 나서 집 근처 카페인 이곳에서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그렇게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림을 그린 지 이제 40여 년이 되어간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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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틀어놓고 무아지경으로 청소를 하다 보면 창밖에서 '똑똑똑' 소리가 날 때가 있다. 지나가던 단골손님이 유리창을 두드리며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몸을 일으켜 보라색 고무장갑을 낀 내 오른손을 한껏 치켜올려 흔들어 화답하고는 다시 열심히 청소를 한다.
혼자만의 세계가 일시정지하고 다정한 얼굴의 타인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지나가는 그 순간이 나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이 이방인의 도시에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들어온 존재에게 아주 잠시라도 작게나마 자리가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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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 하나를 둘러싸고도 세상은 이렇게 광대하다. 그에 비해 내가 안다고 생각한 것, 내가 상식이라고 생각한 것들은 이토록 얄팍하다. 오늘도 30여 년간 내 몸에 밴 설거지 본능에 저항하며 따듯한 비눗물 안에 그릇들을 목욕시키면서 설거지의 우주 앞에 작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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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 것을 지키자고, 남을 다치게 했다. 나는 정당한데, 정당함이 죄책감을 지워주진 못했다. 그까짓 이야기 좀 들어줄걸. 아니면 최소한 내 사정을 설명하고 이해라도 구할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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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네 부모들의 양육 방식을 보며 감탄하는 부분이 한둘이 아니지만 그중 인상 깊은 것은 아이에게 항상 "너는 뭘 먹을래?"라고 묻는 것이다. 아이가 어려도 의사 표현이 조금이라도 가능하면 의사를 묻고 그것을 존중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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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아직 말문도 트이지 않은 어린아에게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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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모든 대화는 혀 짧은 '아기 말투'가 아니라 동등한 어른을 대하는 말투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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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부산스러운 테크닉도, 부재료도 없이 그저 고기와 물, 불, 시간이 만들어낸 곰탕의 맛은 그 과정만큼이나 단순하고 소박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무언가가 항상 그러하듯 만든 사람의 일부가 녹아들어 있다. '정성'이라 부를 수도 있고 '애정' 또는 '염려'나 '관심'이라 부를 수도 있는 그 무언가가 스무 시간 가까이 뭉근하게 녹아난 것이 집에서 만든 곰탕 국물이다. 곰탕이 몸에 좋은 이유는 사실 모호하고 형태 없는 그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를 위해 곰탕을 끓여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바로 나에게 기운을 불어넣고 뼛 속 깊이 영양을 채워주는 근본적인 요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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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재치 있는 문구를 쓰기 좋아하는 친구가 보드에 이렇게 썼다.
COFFEE, BECAUSE
ADULTING IS HARD
"어른 짓 하는 건 힘든 일이니까 (어른의 특권인) 커피라도 마시자"라는 뜻으로 '어른'이라는 뜻의 명사 'adult'를 동사처럼 변형해서 쓴 일종의 언어유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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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를 떠날 날짜가 결정되고 가장 큰일은 단골들에게 이별을 고하는 것이었다. 너무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타이밍에,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진심을 담아 인사를 건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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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내일은 어쨌든 온다는 거죠? 그럼 떠나기 전에 우리 같이 뭐라도 해요. 우리 집에 와서 놀거나 밖에서 만나도 되잖아요. 같이 밥이라도 먹어요."
조숙한 여섯 살짜리의 파격적인 제안에 아이의 엄마와 내가 모두 움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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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짜리의 세계는 좀 더 솔직하고 단순하다. 호감이 있는 상대는 만나면 된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깊숙하고도 동시에 얄팍한 관계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
마지막으로 J를 힘껏 끌어안고 작별 인사를 할 때 저릿하게 가슴이 아팠다. 후회가 밀려왔지만 번복하기엔 늦었다. 그저 언젠가 우리의 길이 다시 만나는 순간을 기다리는 수밖에. 그때까지 그들의 이야기를 소중히 보관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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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와 커피를 파는 공간의 무용함은 얼마나 소중한가. 카페에 찾아와서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사람을 구경하고 그리운 이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