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교여행은 하루를 새롭게 사는 연습을 하는 시간
결혼 후 첫 해외여행으로 홍콩을 예약했었다. 홍콩은 남자와 가고 싶어 아껴두었다. 홍콩은 여자끼리 가서 쇼핑하고 노는 곳이지 남자랑 가는 곳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도 내게는 로망이 있었다. 홍콩의 야경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바라볼 시간을 기다렸다. 출발 2주 전 임신인 걸 알았다. 처음 만난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은 너그러운 분이었다.
“당분간은 산모 위주로 식사하세요. 먹고 싶은 걸로 드세요. 회도 참치회만 조심하고 드셔도 되고, 커피도 하루에 한 잔은 괜찮습니다. 매운거 땡기면 드셔도 됩니다.”
뭔가 다 괜찮다고 하는 것 같아 질문을 했다.
“저희가 다다음주에 홍콩을 예약했는데……”
“너무 빠르네요. 조금 더 있다가 가시죠.”
“9월에 캐나다는……”
“너무 머네요. 가까운 곳으로 가시죠.” 단호한 분이었다.
홍콩 비행기 티켓 취소 수수료는 5만원, 예약일 변경 수수료는 4만원이었다. 여행은 예약하고 돈을 내 두면 무조건 갈 수 있는 건 줄 알았다. 하지만 작은 생명체의 등장으로 여행 무산을 경험하게 되었다. 변경 수수료가 만원이 싸다고 해도 다음 일정을 확정할 자신이 없었다. 내 몸이 언제 어떤 상태일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한달이 흘렀다. 매일 무언가가 죽도록 먹고 싶은 것 말고는 입덧이없었다. 졸려서 일찍 자기는 한다. 임신 중기를 넘긴 친구가 20주 이후로 컨디션이 확 좋아진다고 한다. 손가락이 근질거린다. 아까운 취소 수수료를 물었던 순간은 벌써 잊은 모양이다. 얼른 예약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시간이 흐르고 여행이 흐지부지되고 이대로 아기를 낳고 육아헬이라는 곳으로 들어갈수는 없었다. 달력을 펴고 임신 20주의 날짜를 확인했다. 저렴한 티켓을 뒤졌다. 남편에게 문자로 날짜를 통보했다. 예약을 마쳤다. 뿌듯하다.
떠날 날짜가 다가오니 들뜨기 시작한다. 하루 전날에는 이상하다 싶을 만큼 설렜다. 여행을 앞두고 이렇게까지설렜던 적이 있나 싶다. 예전에는 공항 3층에서 캐리어를 앞에 두고 앉아 있을 때가 가장 설레는 순간이었다. 남편이랑 내내 함께할 생각때문인지, 드디어 홍콩을 간다는 것 때문인지, 결국 임신기 호르몬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무엇때문이든 3박 4일의 짧은 여행을 앞두고 그 어떤 여행보다 들떠 있었다.
떠나는 날 아침 눈이 번쩍 떠졌다. 언제 다시 인천공항을 갈 수 있을지 모른다. 공항 라운지를 꼭 이용해야겠다 생각했다. 한시간 정도 더 여유시간을 계산해서 집을 나섰다. 아침 일찍나오니 남편은 부산 여행 때처럼 약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캐리어를 끌고 앞서 걸었다. 남편이 평소에 피곤하다던 모습 어디갔냐며 따라온다. 공항에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체크인 줄이 줄어들지를 않는다. 겨우 수속을 마쳤다. 계획대로 라운지 이용까지 완료했다. 이제 비행기를 타고 내리면 홍콩이다.
홍콩 공항에 도착했다. 이층버스를 타고 침사추이로 이동하기로 했다. 버스 정류장으로 이어진 통로의 한쪽 면과 천장이 모두 유리로 되어 있다. 눈이 부시다. 날씨 좋은 여행이라니 감사하다. 버스를 탔다. 발이 부어서 신발이 꽉 맞는다. 임신 후에도 붓는 건 잘 모르고 지냈다. 비행기를 타니 부었나보다. 침사추이에서 내려 첫 숙소를 찾아 짐을 풀었다. 배고픔 신호가 온다. 여행책자에서 찾아둔 국수집으로 가기로 한다. 숙소에서 가까운 것 같은데 잘 찾아지지 않는다. 전철역 출구 번호를보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중간 중간 공사중이고 출구 번호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배가 고프다. 나는 지도를 보며 이리저리 찾고 남편은 해맑게 거리를 구경하고 있다. “오빠! 지금 우리가 어디 가려는 지는 알아?” 배가 고프지 않았다면 짜증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배고픔에 무척 예민한 호르몬의 지배를 받는 임신부다. 남편은 갑자기 긴장한 표정이다. 지도를 주고 여기로 찾아가라고 했다. 조금 더 헤매기는 했지만 남편은 국수집을 찾았다. 웃으며 “여기에요.”한다. 국수를시켰다. “짜증내서 미안해요.” “언제요? 짜증냈어요? 아닌데.” “너무 배고파서 그랬어요. 난 열심히 찾고 있는데 오빠는 구경하느라 정신 팔려있고.” “맛있게 먹어요.” 나는 짜증을 잘 낸다. 사과도 빨리 하려고 한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그런건 짜증도 아니라며 안아준다. 나를 더 착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배고픔이 가시니 살겠다. 이제 주변 풍경도 눈에 들어온다. 침사추이 골목은 그저 중국이었다. 홍콩에 왔다는 느낌이 잘 들지 않는다. 넛츠포드테라스 쪽으로 걸었다. 여행책자에 이국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적혀 있었다. 낮시간이어서일까 사람이 별로 없다. 조금 멋있어 보이는 식당 건물이하나 있기는 했지만 여기도 중국이다.
해변 쪽으로 다시 발길을 옮긴다. 발이 아프다. 더워서 그런지 몸이 쳐지는 기분이다. 아직 많이 걷지 않았다. 나는 괜찮은 것 같은데 뱃속의 아기도 괜찮을까 걱정이 된다. 일단은 바닷가를 향해 좀 더 걷기로 한다. 바로 바다가 보이는데 길을 건널 곳이 마땅치 않다. 지하도를 통해 길을 건넜다. 지도를 보니 유명하다는 스타의 거리 스타벅스는 숙소와 반대편이다. 가보고 싶은데 몸이 더 무거워지고 발은 점점 아프다. 남편에게 방에 들어가야겠다고 말했다.
스타의 거리를 걸어 숙소까지 갔다. 그리 멀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멀었다. 겨우 방에 들어가 침대에 쓰러졌다. 잠을 자야겠다. 씻고 저 하얀 이불 속에 들어가고 싶다. 누웠다. 몸이 땅 속으로 꺼지는 느낌이다. 정신없이 잤다. 알람이 울린다. 심포니 오브 라이트를 보러 갈 시간이다. 몸을 일으킨다. 놀아야 한다. 발을 땅에 딛고 일어섰다. 한라산 등반 다음 날의 감각과 같다. 좀더 넉넉한 크기의 신발을 꺼낸다. 이것도 꽉 낀다. 임신 중인 나에게 비행 후유증이란 이런 것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다. 혹시나 하고 가져온 통굽 샌들이 발이 가장 덜 조인다. 굽이 있어 헛디디지 않을까 걱정이 되지만 지금 이 신발 말고는 맞는 것이 없다. 퉁퉁 부은 발을 보니 울적하다. 빨간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관심을 발에서 빨간 원피스로 돌려본다. 반쯤은 성공이다. 기분이 훨씬 낫다. 큰 귀걸이까지 하고 남편 손을 잡고 나왔다. 시간이 얼마 없다. 빨리 걸었다. 스타의 거리에 이미 사람들이 가득찼다. 심포니 오브 라이트는 생각보다별로였다. 이제 하일라이트가 나오나보다 했는데 끝이 났다. 그래도 기분은 좋다. 뱃속의 아기와 내가 함께 남편에게 안겨서 작은 축제를 구경하는 기분이었다. 인파 사이에서 조금 더 머물다가 북경오리를 먹으러 갔다. 배를 가득채우고 밤 길을 한참 더 돌아다녔다.
하루 전체를 보면 알차게 놀고 많이 걸었다. 하지만 낮에 힘들어 방으로 돌아와 낮잠을 잤다는 것과 여행 1일차에발이 너무 아프다는 것이 별로다. 내가 홍콩을 간다고 하니 사람들이 태교여행 가는거냐며 잘 다녀오라고했다. 태교여행이라는 단어가 어색했다. 그냥 내가 가고 싶어가는 여행인데라고 생각했다. 첫 날을 보내며 다시 태교여행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아기를 위해 무언가를 참는 연습을 해보는 것이 태교여행이구나. 내 마음은 하루종일 걷고 있다. 그런데 직접 눈으로 볼 수도 없는 작은 생명이 자꾸만 나를 앉히고 눕힌다. 쓰러진 것도 아파 몸져 누운 것도 아니다. 내 몸 상태를 살펴가며 이만큼까지만 에너지를 쓰고 지치거나 아프지 않게 조심하는 여행을 해야 할 것 같다. 원래 나의 여행에서는하고 싶은 것만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몸 상태는 신경쓴 적이 없었다.그런 나에게 이렇게 조심하고 자제하는 여행해야 한다는 것은 새로웠다. 내가 마주한 태교여행은 뱃 속 아기를 위한 교육이 아니라 엄마가 되기 위한 교육의 시간이다. 아기가 태어나고 내가 진짜 엄마가 되는 날이 오면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조심하고 참아야 하는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걱정까지 생각이 흘러가니 답답하다. 울적하기도 하다. 꾸루륵. 뱃 속의 아기가 신호를 보낸다. 불만과 서글픔이 갑자기 미안함과기쁨으로 옮겨간다. 갑작스러운 기분 변화도 복잡한 감정도 신기하다. 잘 설명 되지 않는다.
아무튼 꾸루륵 한방으로 내 생각은 방향을 바꾼다. 남은 이틀의 여행을 상상해본다. 아침에 눈 뜨는대로 일어나 논다. 점심을 먹은 뒤에는 방에 들어와 낮잠을 잔다. 그리고 해가 조금 약해지면 다시 놀러 나가 밤까지 논다. 낮잠 시간을 만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많이 놀 수 있을 것 같아보인다. 태교 여행은 엄마가 되기 위해 참는 연습을 해보는 시간이라고 생각할 때보다 기분이 좀 낫다. 태교여행은 엄마가 되기 위해 새로운 방식으로 하루를 꾸리는 연습을 하는 시간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