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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 나무 Mar 25. 2016

홍콩에서 처음 만난 사이

태교여행_아기와 아빠의 태동인사


 홍콩에서의 두번째 날이다. 침사추이 작은 숙소에서 완차이 항구가 보이는 좋은 숙소로 옮겼다. 숙소에서 페리 항구까지 그리고 다음 숙소까지 두 곳 다 택시를 타기에는 애매한 거리다. 나는 평소에도 택시타는 돈을 아까워하는 사람이다. 내 고집대로 페리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것 말고는 걷기로 했다. 나는 쉽게 지치는 몸 상태고 남편은 더위를 많이 탄다. 나는 양산 하나만 들게 하고 남편은 배낭을 메고 캐리어 두개를 끈다. 이미 등 전체가 땀에 젖었다. 그러면서도 눈만 마주치면 웃어주는 사람이다. 내가 이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졌던 여름 산책의 기억을 불러주는 순간이다. 남편이 무거운 짐을 들고 땀 흘리며 웃고 있다. 길이 좁다. 앞서 걸었다 뒤에 걸었다 하는 이 남자가 든든하다. 항구에 도착한다. 페리가 막 떠나려고 하고 있다. 침사추이에서 걸어만 다녀서 아직 옥스퍼드 카드를 사지 않았다. 페리 티켓을 어떻게 사야 하는지 헤매는 사이 페리는 떠났다. 다음 페리를 기다려야 하는 것 쯤 아무렇지 않다. 나는 그저 잔뜩 땀흘린 남편만 웃으며 보고 있다. 평소 같으면 내가 먼저 표 사는 방법을 확인해두고 도착해서도 재빠르게 티켓을 사고 배를 탔을 것이다. 남편이 이리저리 뛰며 표를 사오고 이쪽이에요 하면 따라가는 기분도 참 좋구나 싶다. 페리를 기다리며 남편 티셔츠를 살짝 들고 등 속에 부채질을 해주었다. 힘들다고 하지 말라고 한다. 사랑스럽다. 목을 껴안고 뽀뽀를 한 뒤 다시 부채질을 한다. 당연해질 수 있는 이런 순간들을 오래도록 소중히 여기고 싶다.


완차이 항구에서 내려 숙소까지 가는 길도 정말 더웠다. 열심히 걸어 방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좋다. 어젯밤 심포니 오브 라이트를 보며 바라봤던 건너편에 와 있다.


한숨 돌리고 소호로 향했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드디어 타보다니 기대가 됐다. 그런데 실제로 가보니 실망스럽다. 짜증이 났다. 더운 날씨 때문이었는지 또 배고픔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상상한 홍콩은 없고 어디를 가든 중국을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소호거리는 밤에 갔어야 했던걸까 낮맥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좀 나았을까 혼자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겼다. 순간순간 태교 여행은 아기를 위해 참는 연습을 하는 여행인 것인가라는 문장이 여전히 머릿속을 스친다. 이렇게 더운 날 맥주를 꿀꺽꿀꺽 마실 수 있다면 얼마나 시원하고 기분이 좋을까. 아무튼 이 모든 것은 배만 덜 고팠어도 나았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임신 전에는 이렇게까지 배고픔에 지배받는 사람은 아니었다. 맛집 찾기를 포기하고 아무 식당에나 들어갔다. 짠 피자였다. 그래도 먹고 나니 다시 남편이 보인다. 그래도 이번 배고픔에는 남편한테 괜한 짜증을 내지 않으려 조심했다. 덕분에 먹고나서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 다행이다. 허기는 채웠지만 발바닥 통증은 피자로 달래지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가야겠다. 오늘의 낮잠은 호텔 수영장에서 해야겠다. 아쉬움이 덜하다.


 방으로 돌아와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임신인지 똥배인지 구분하기 어려운만큼의 배가 나와있다. 수영장에서 괜히 배를 만지며 걸어다녔다. 높은 빌딩들 사이에 있는 야외수영장에 누워있으니 조금 홍콩같다. 나는 홍콩에 대해 번쩍거리고 세련된 도시의 이미지를 갖고 있나보다. 외국아기가 놀다가 내게 다가온다. 너무 귀엽다. 아기 엄마가 다가와 눈인사를 한다. 아기가 너무 귀엽다고 나도 임신중이라고하니 활짝 웃으며 축하한다고 한다. Congratulations! 영어로 축하인사를 들으니 기분이 색다른것인가 잠시 생각했다. 엄마와 아기가 노는 것을 지켜보며 다른 이유임을 알았다. 맑게 뛰노는 아기와 별다른 제재 없이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웃어주는 엄마를 보았다. 저 작은 아기를 키우면서 그리고 당장 이 수영장에서 방으로 돌아간 후에 저 엄마가 어떤 수고로움을 할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여유있고 평화롭게 아기를 향해 웃어주고 있는 그녀가 나에게도 환한 얼굴로 축하를 전한 그 장면에 기분이 색달랐던 것 같다. 주변 사람들에게 육아헬에 함께 하게 된 것을 환영한다는 인사도 종종 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아이와 함께하는 모습과 축하를 전하는 표정은 이렇게 소중한 순간을 누리게 된 것을 축하한다는 인사로 들렸다. 이 장면과 축하를 기억하고 싶다. 이 느낌으로 나도 아기와의 일상을채워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바로 낮잠에 빠졌다.



 잠깐 눈을 붙이고 나서 남편과 수영을 했다. 방으로 돌아와 씻고 완차이 거리로 다시 걸었다. 홍콩에 사는 남편의 선배와 밥을 먹고 이번에는 방으로 혼자 돌아왔다. 남편은선배와 맥주 한 잔을 하라고 보냈다. 신혼여행 이후 남편과 하는 첫 해외여행이다. 그리고 뱃속 아가와 하는 여행에서 이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될 줄 몰랐다. 아니 이미 출발 전부터 계획한 시간이다. 남편에게 형 만나면 둘이 시간 보내고 오라고 나는 방에서 쉬겠다고 여러 번 말해두었다. 그런데 정말로 방에 혼자 들어가니 마치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게 된 기분이었다. 설레고 웃음이 나왔다. 조명을 낮추고 소파를 끌어 창가에 앉았다. 완차이에서 바라보는 침사추이는 그 반대의 풍경보다 고요했다. 적당한 야경이라 더 마음에 들었다. 음악을 틀었다. 성시경의 캐럴이나온다. 플레이 리스트에 언제 왜 올려두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공간과 분위기에 너무 어울린다. 무언가를 마구 쓰고 싶기도 아무것도 쓰지 않고 싶기도 한 순간이다. SNS에 혼자 시간에 대한 선물을 남겼다. 초점이 흐려질 때까지창 밖을 바라보았다. 답글이 달렸다. 스무해 넘게 아이들을키운 언니다. “둘이면서, 뱃 속 아기가 서운해하겠네.”라고 한다. 아차. 이렇게나 초보엄마다. 배를 만져본다. 벌써 이 안에서 19주 째 생명이 존재하고 있다. 이 공간에 혼자 있다고 생각할 때와 또다른 기분이다. 몸을 소파에 더 깊이 기댄다. 숨도 더 깊이 쉬어본다. 포근하다.


 남편이 돌아왔다. 긴 하루였다. 틈틈이 쉬어가며 알차게놀았다. 씻고 침대에 누웠다. 뽀송한 하얀 이불이다. 가볍지만 두께감이 있는 이불 속에 누우면 아늑하다. 내가 좋아하는 여행 순간의 하나다. 이불에 파묻혀 누워있는 것. 남편과 한참을 안았다. 잠깐 헤어져있다 만나니 더 반가운 느낌이다. 남편과 창밖 야경을 번갈아 본다. 이렇게 꼭 껴안을 수 있는 사람과 이 곳에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다. 침대에 바로 누웠다. 아기가 움직인다. 나만 느낄 수 있는 태동이다. 남편은 계속 궁금하다고 발을 동동구르는 중이었다. 약오르지 하는 표정으로 남편 손을 배로 가져가본다. 그 순간 툭. 남편이 벌떡 일어난다. 눈이 튀어나올 것 같다. 입도 찢어질 것 같다. 음소거 된 듯 아무소리도 내지 않은 채 입과 눈만 커졌다. “느꼈어요?” 고개를 끄덕이다 자기 손을 들어 쳐다본다. 다시 배에 손을 대 보지만 오늘 꿈꿈이 아빠에게 허락된 기회는 한번뿐이다. 이 아기는 어떻게 이렇게 완벽한 순간에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는 걸까 가슴이 찌릿하다. 엄마의 행복한 마음과 엄마 아빠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모두 아기에게 전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꿈꿈이와 꿈꿈이 아빠는 이렇게 홍콩에서 처음 만났다. 그 후로도 무척 사이 좋게 지내고 있다. 왜 안 움직이지 싶을 때 아빠가 손을 올리고 꿈꿈아 하고 부르면 바로 반응을 보인다. 꿈꿈이도 아빠와 처음 만난 순간이 마음에 들었나보다.


 우리는 대화를 하지도 마주보고 있지도 않다. 그저 나란히 누워 남편이 내 배위에 손을 올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 꿈꿈이가 툭하고 움직이면 우리는 마주보고 웃는다. 우리가 아닌 어떤 존재의 움직임을 동시에 느끼는 것이다. 나와 남편 두 사람을 연결해주는 존재의 실체를 마주하는 순간이다. 홍콩에서 시작된 그 순간이 지금까지도 참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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