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싱글맘의 첫 정치 연설문
때로는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다. 치열하게 살아냈지만 손에 쥔 것도, 행복한 일도, 기댈 곳도, 지금과 달라질 거란 희망도 없는 30대 초반 싱글맘. 보잘 것 없는 이 삶은 내 탓이었다가 나의 부모 탓이었다가 아이 친부 탓이었다가 사회 탓이기를 도돌이표처럼 반복했다. 다른 건 차차 희미해졌는데 '사회 탓'만은 시간이 흐를 수록 더 견고해지고 정교해졌다.
언제부터였을까? 비교적 선명한 사회적 이상향이 마음 속에 자리 잡았다. 또래 지인들과 견주어 볼 때 나는 늘 사회의 역할에 큰 의미를 두는 쪽이었다. 기원은 희미하지만 아마도 과거 네덜란드에서 잠시 살았던 경험이 꽤 결정적이었을 테다. 그곳에서 돌아온지 1년 여만에 아이를 가졌다. 일찍이 임신-출산-양육과 이직-경력단절을 거치다보니 두 나라 삶의 질의 간극은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아주 단기간 압축적으로 여러 생존 문제에 직면하면서부터 나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을 온몸에 축적해나가고 있었다.
만연한 정상가족 프레임과 이를 견고히 뒷받침하는 법제도
노동시장에서의 (주로 여성에게 빈번한) 양육자 차별
태부족한 보육과 돌봄 인프라
All or Nothing인, 지독하게도 선별주의적인 한부모가족 제도
강요된 가부장 속 강요된 모성
OECD 선두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장시간 노동 관습
나는 흙수저다. 명문대를 나와 대기업에 다니며 잠시나마 태생적 배경을 극복했다 여겼지만 단단한 착각이었다. 이내 홀로 아이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오자 대학 간판을 활용할 기회는커녕 있는 직장을 유지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저 생존, 생존만이 내 앞에 놓인 과제가 됐다.
여러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사회에 S.O.S를 쳤다. 개인 또는 가정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공동체의 힘으로 해결하는 게 사회 아니던가. 그러라고 국가가 존재하고 세금을 내고 정치인을 뽑는 것 아니겠나. 그러나 손을 내미는 족족 사회는 나를 밀어냈고, 더 이상 기댈 곳 없다는 깊은 절망으로 번번이 나를 밀어 넣곤 했다.
삶을 내려놓기로 결심하고 몇달의 유예기간을 보내던 어느 쌀쌀한 계절이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나라가 소란하다.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선다. 광화문까지는 엄두가 안나지만, 내가 사는 성남시 안에서도 집회가 열린단다. 우리도 따라 나갔다. 잘 알지 못하는 소수정당과 시민단체들이 집회를 주도하는 듯 보였다. 관계자 아닌 평범한 시민이 과연 있을까 의아하기까지 했다. 괜히 낯설어 쭈뼛거리며 멀찍이 있다 돌아왔다.
촛불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다시 찾은 집회, 요즘 언론에 유독 자주 보이는 우리 시장님이 오늘은 광화문 아닌 우리동네 광장에 서 있다. 이재명 성남시장이다. 내 아무리 '정치.알.못'이라도 성남에서 학창시절 대부분을 보냈고 여기서 수년째 아이도 키우고 있으니 그를 모를 수 없다. 얼굴과 이름 뿐 아니라 성과와 정책을 댈 수 있는 유일한 정치인인 것도 같다.
그가 연설을 시작했다. 정치인의 연설을 현장에서 들어본 적은 처음이다. 웬 박정희, 전두환 시대부터 끌어와 별 관심도 공감대도 없는 얘기를 하는데, 묘하게 설득이 된다. 저 사람의 절절함이 내 가슴에 와 콕콕 박힌다. 여러 촛불 연설을 보고 들었지만 카타르시스랄까? 도파민 분비랄까? 몸이 케미컬하게 반응하는 이 느낌은 견딜 수 없이 생경하다.
나도 소리치고 싶다. 울분을 토해내고 싶다.
이 기회에 나라 탓이나 실컷 해보자. 누가 들어주든 말든 한풀이라도 하자.
그가 자리를 떠난 뒤, 뭐에 씐 듯 연단 뒷편으로 갔다. 나도 발언할 수 있냐고 물었다. 집회 관계자는 다음주에 다시 열린다며 신청서를 내밀었다. 빈칸을 채워 건넴과 동시에 D-7 카운트가 시작됐다.
직장이 여러 번 바뀌어 그렇지, 내 직업은 언제나 커뮤니케이터였다. 대개 기업(인)이나 정부기관(장) 등을 화자로 하는 메시지를 만든다. 짧게는 슬로건이나 광고 카피고, 길게는 신문의 칼럼과 기고문이다. 온갖 종류의 글을 써봤어도 '정치 연설문'은 생소하다. 정치라는 소재도 처음이거니와 실제 현장에서 음성으로 읊게 되는 연설문 형태도 처음이다. 게다가 이번 화자는 기업도 기관도 아닌 바로 '나' 아니던가.
충동적으로 질러놓고 보니 후회가 차오른다. '다음주에 사람이 더 많아지면 어쩌지.' 근심이 든다. 다시 꼼꼼하게 뉴스들을 살폈다. 이재명 시장을 비롯해 화제에 오른 여러 촛불연설 영상도 찾아봤다. 장단점을 분석해 나름의 원칙도 세웠다.
첫째, 감화는 솔직함으로부터
둘째, 도입부는 나만의 유니크한 소재로
셋째, 가장 쉬운 대중의 언어로
대충 형식을 갖춰가며 하고 싶던 말을 조금씩 적어내려갔다. 실은 연설에 적힌 대상이 대통령일 뿐, 세상천지 누구라도 들어줬으면 하는 절규에 가까웠다.
D-DAY가 왔다. 대통령이 대국민담화를 기습 발표했다. 그에 맞게 어제까지 써놓은 원고를 고쳐야 했다. 일이 넘쳐 퇴근도 제때 못할 각이었다. '아이는 어쩌고 집회는 어쩌지?' 나의 패닉 소식에 인근에서 일하는 대학 선후배들이 총출동했다. 누구는 나 대신 유치원에서 아이를 픽업해왔고, 누구는 피자를 잔뜩 사와 아이 끼니를 챙겼으며, 누구는 프로의 손길로 내 화장을 고쳐줬다.
마침내 내 차례다. 발언 도중에도 이들은 영상과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분주했다. 설상가상, 신나게 뛰어 다니던 아이가 하필 그때 사라져 찾으러 다니느라 혼났단다. 주어진 발언 시간의 두 배를 쓰고서야 내 한풀이가 끝났다. 잔뜩 긴장한 탓에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조차 없다. 그러나 이 인상만은 마음에 선명하게 남았다. '후련하다' 그리고 '혼자는 아니었네.'
저는 다시 내 꿈이 좌절될 때 일으켜주는 대한민국,
평등한 기회와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는 대한민국,
세금 내는 것이 기쁜 대한민국,
그리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염원합니다.
또한 내 아이에게 마음 놓고 물려줄 수 있는 대한민국을 염원합니다.
'정치'도 '연설문'도 모른 채 충동에 이끌려 써내려가기 시작한 나의 첫 정치 연설문은 이렇게 끝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치인의 연설문을 쓰는 것은 내 다음 직업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