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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마 Nov 23. 2023

새로운 생존의 경로, '정치'

씨앗이 어둠 속에서 싹을 틔우 듯, 나락 끝에서 새로운 삶이 피어났다

막연하고 거칠게나마 이루고 싶은 세상이 있었다. 그 세상이 아니라면 더 이상 살 수 없을 만큼 참혹했던 까닭에, 살아야 했기에 바꿔보려 발버둥쳤다. 리스크를 감수해가며 새로운 삶의 양식에 부단히도 뛰어들었지만, 잔인하게도 리스크는 한 푼 에누리 없이 고스란히 리스크로만 돌아왔다.


절망 끝에 죽으려던 참이었다. 내 아이를 포함하여 남는 이들을 위해 무질서했던 생을 부지런히 정돈하다보니 얼마간은 버틸만한 여력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하고싶은 걸 하고 떠나자 싶어 직장에 사표를 냈다. 대표님은 두달만 버텨달라고, 그 후에 3개월 더 쉬고 판단해보라 하셨다. 그렇게 주어진 다섯달의 유예 기간은 공교롭게도 대한민국 격동기와 맞물렸다.


2016년 가을에서 2017년 봄, 나라의 혼란함은 모든 감정을 거세한 채 살아가던 나의 마음을 자꾸만 자극했다. 다시 보니 절망 속에 살아가던 사람은 나 뿐이 아녔다. 모두가 저마다의 언어와 행동으로 이를 표출했다. 그 충동에 이끌려 나도 마이크를 들고 한풀이를 하기에 이르렀다. 나의 첫 정치적 목소리였다. 


정말로 온 나라가 리셋될 것만 같았다. 


나라가 바뀌면 어떻게 될까? 혹시 내가 삶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올까? 이런 흐름이라면, 어쩌면 정말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실낱 같은 희망이 괜히 아른거렸다.



혼돈 속에 직장에서 약속한 두 달이 지났다. 여전히 아이를 키우는 데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들지만, 그래도 반쯤은 자유의 몸이 됐다. 나는 더욱 나라 상황을 주시했다. 대한민국은 조기 대선이라는 생경한 국면에 접어들었다. 제도에 기대봐도, 직장을 비롯한 삶의 양식을 송두리째 바꿔봐도 나 개인의 차원에서는 번번이 실패해왔다. 그러나 정말 큰 권한을 위임 받은 사람이라면 정말로 사회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바꿀 수 있겠다는 생각이 짙어졌다.

그 동안 전혀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생존의 경로, 그것은 '정치'였다. 


그렇게 아직 남은 카드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 동안 전혀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생존의 경로, 그것은 '정치'였다. 그동안 열심히 벌어 세금 냈으니 주권자로서의 권한을 들고 마지막 발악을 해보기로 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정치란, 내가 아는 한 본질적으로 주권자를 대리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주권자가 위임한 권한을 주권자가 원하는 방향대로 행사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주권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뭘까. 최적의 대리인을 고르고, 약속을 받아내고, 당선을 시키고, 약속 빨리 실현해 내라고 때로는 등짝을 토닥이고 때로는 등짝에 스매싱을 날리며 잘 굴려먹는 거다.


내 이상과 가장 유사한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 나 같은 장삼이사 말에도 귀기울이는 사람, 더 나은 더 빠른 더 큰 실행력을 가진 사람, 약속을 지켜온 사람, 기왕이면 가장 혁혁한 변화를 가져올 사람, 몇가지 기준 아래 대리인을 골랐고, 약속을 받아냈고, 등짝을 토닥이거나 등짝에 스매싱 날리는 일에는 모두 성공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를 당선시키는 일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비록 실낱일 뿐이라도 세상이 조금은 바뀌겠다는 희망이 들자, 언제 죽음을 기다렸냐는 듯 나는 다시 온 에너지를 끌어다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결과와 상관없이 그 과정만으로도 다시 의욕이란 걸 장착하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약속된 휴직 3개월도 지나가버렸다. 복직을 했다. 다섯달 전 "저 죽으러 가요." 내지는 "저 도망갈 거예요."라며 사표를 내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가.


표면적으론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에게 속성으로 한글을 가르치고, 유치원보다 짧아진 학교 시간에 맞춰 새로운 돌봄환경을 세팅하느라 휴직 석달을 보낸 걸로 했다. 직장에 돌아간 뒤 일과 삶은 전보다 나아질 것이 없었다. 오히려 직장에서의 책임은 한층 무거워졌고, 초등 입학과 동시에 맞닥뜨린 돌봄절벽 탓에 더 척박한 시간빈곤자가 됐다. 그렇지만 나는 퍽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생기를 되찾은 사람. 씨앗이 어둠 속에서 싹을 틔우 듯, 새로운 삶은 절망의 나락 끝에서 피어나는가보다.




같은 해 집에서 가까운 지방자치단체 대변인실로 적을 옮겼다.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업에는 변함이 없었다. 주구장창 글을 써대는 것을 비롯해 주어진 일은 대동소이했지만, 일을 대하는 자세는 꽤 달라졌다. 남의 일을 대신 해주는 게 아니라 내 일을 하는 거라고 믿었으니까. 대기업, 프리랜서, 외국계공공기관, 중소기업 및 몇번의 경력단절을 거쳐 닿게 된 어느 행정기관, 자녀양육 환경이 아니라 직업적 소명만 보고 선택한 나의 첫 자발적 이직이었다. 아이를 갖고 8년 반만의 일이다.


또 해가 바뀌고 봄이 왔다. 꼭 한해 전, 혼란하고도 뜨거웠던 봄을 떠올리며 전 대통령에게 짧은 편지를 썼다.

언니, 언니한테 처음 편지 쓴 게 벌써 1년 하고도 4개월이 더 지났네. 요즘은 잘 있니?
언니가 일깨워준 분노 덕에 나는 아득한 이곳까지 와 있다.
정말 고마워. 체념하고 회피했던 나를 움직여줘서.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던 딱 그 때, 발악이라도 해볼 동력을 줘서. 그렇게 나를 다시 행동하는 인간으로 만들어줘서.
가진 것이 없어서 나눌 것도 없다고만 생각했는데, 닥쳐보니 손톱의 때만큼일지라도 보탤 것이 있더라. 그래서 행복해.
여전히 너무도 막막하지만, 사명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바꿔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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