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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마 Nov 24. 2023

정치 '하는' 엄마들

당사자가 전문가다


최후의 생존 수단으로서 '주권자'라는 자아를 처음 일깨운 어느 봄날, 도발적인 칼럼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만납시다]
124년 전 뉴질랜드 여성들이 세계 최초로 선거권을 갖게 된 것은 뉴질랜드 남성들이 천부인권에 따라 그들의 정치권력을 여성들과 평등하게 나누어서가 아닙니다. 여성들이 싸웠기 때문입니다. 여성 스스로가 분노하고 싸우지 않으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는 앞으로 이 글을 통해 우리 엄마들과 정치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정치라는 말이 부담스러우실 수도 있지만 정치는 대단하거나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여 이야기하고, 서로 공감하고, 함께 분노하고, 우리의 목소리를 세상에 내놓으면 그것이 정치이고 정치세력화입니다. 그것이 정치 이전의 정치이고, 그것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며, 그것이 가장 멋진 민주주의입니다.
정치에 여성(엄마)들이 나서야만 독박육아를 끝장내고 평등하고 행복한 가족공동체를 법으로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우울한 여성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여러분의 아이들과 제 딸 두리에게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사회를 전해줄 수 있습니다. 저와 마음이 통하신다면, 이제 우리 만납시다.


이거, 지금 나한테 하는 말이잖아?

칼럼 말미에 한 페이스북 페이지 주소가 달려 있었다. "이곳에 엄마들의 분노와 제안을 남겨주세요.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행동하며 ‘엄마의 정치’를 만들어갑시다." 라는 글귀와 함께. 나는 홀린 듯 그곳을 향했다.


칼럼 이후 두 번째 오프라인 모임을 연단다. 명칭부터 취향 저격이다. '엄마정치 두번째 집담회: 정치세력화 어떻게 할 것인가'. 세상에 '정치세력화'라니, 이렇게 멋진 단어가 있구나. 이제 외롭게 혼자 싸울 필요 없는 건가. 설렘을 넘어서는, 왠지 운명적인 느낌에 사로잡힌다. 뜻이 통하는 동지들을 기대하며 그날을 기다렸다.


빙 둘러진 책상들과 빔 프로젝터, 화이트보드, 그리고 작은 연단이 놓인 모습은 여느 대형 회의실과 다를 것 없었다. 그러나 뒷편 절반 쯤을 몽땅 차지한 매트 위엔 돌도 안된 아기부터 내 키 만한 아이들까지 장난감과 뒤섞여 놀고 있었다. 엄마와 동반한 자녀들이었다. 회의실과 키즈카페의 공존이랄까? 이 낯선 조합이 참 반갑다.


어림 잡아 서른 명 정도 참석자들이 돌아가면서 저마다의 사연을 꺼낸다. 큰일이다. 아직 첫번째 발언일 뿐인데 벌써 눈물이 왈칵 차오른다. 이어지는 모든 사연이 다 내 얘기인 것만 같다. 처음엔 그저 눈물을 흠치다 끝내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너무 울어서 피부가 다 아프고 정신이 혼미했다. 어린 아이처럼 울음을 그치지 못한 채 차례를 맞았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자 절대적인 시간빈곤자입니다.
혼자서도 아이를 키울 수 있는 환경을 찾아 다니던 대기업을 떠나 여러 번 이직했습니다. 우리 사회 어딘가엔 그게 가능한 삶의 양식이 존재한다 믿었고, 어쩌면 내가 선례가 되어 스스로 증명하고 싶었던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요, 혼자서 아이를 키울 수 있는 환경은 적어도 이곳 대한민국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합니다.
지금의 한부모가족 정책은 제가 최저임금 이상의 소득이 있고 국산 소형차 한대를 가졌다는 이유로 저를 아예 제도 밖으로 밀어냅니다. 얼마나 더 빈곤해져야 그들 눈엔 우리 가정의 취약함이 보일까요? 올해 초등학교에 진학했는데 황당하게도 저소득 법정 한부모가 아니라서 돌봄교실 입소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맞벌이가정으로 위장한 서류를 제출하고서야 돌봄에 들어갔어요. 맞벌이는 소득을 보지 않으면서 오히려 한부모에 소득이라는 잣대를 들이미는 거, 정말 아이러니 아닙니까?
돌봄에 보내고도 제 노동시간보다 아이의 등교시간이 턱없이 짧기에 끝끝내 제 엄마 손을 빌리게 됐습니다. 정말이지 나중에 손주 키우면서 살고 싶지 않거든요. 그러려면 저도 할머니 손에 아이 키우면 안 되는 거잖아요. 제가 나중에 손주 돌봄을 거부할 명분이 없지 않겠어요? 이 '맘고리즘'을 끊어내고 싶어서 어떻게든 저희 둘이 살아보겠다고 버텨 왔거든요. 그런데 초등 1학년은 그야말로 돌봄 절벽입니다.
정치를 잘 몰랐습니다. 관심 가질 틈도 없이 살았습니다. 지난해 촛불정국을 계기로 각성이란 걸 했네요. 저한테 최후의 수단으로 주권자라는 카드가 남아 있다는 걸 깨달은 겁니다. 여기 계신 분들과 함께 이 권리를 현명하게 행사해나가길 기대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너무 우는 바람에 생각해둔 말을 다 꺼내진 못했다. 실은 그 말을 다 할 필요도 없었다.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이심전심'이었던 까닭에.


모인 사람들의 면면은 정말 다양했다. 기자, 웹디자이너, 연구자, 시민단체 활동가, 국회의원, 법조인, 가장 킬링포인트는 아이돌 팬클럽 운영자다. 이중 여러 사람은 엄밀히 말해 앞에 '전직'이 붙는다. 이름부터 무시무시한 '경력단절'을 피할 수 없었던 거다. 과거의 내가 그랬듯.


공식적인 상호 간 호칭을 정하기로 했다. O변호사님, O기자님과 같이 직업으로 상대를 칭하다가 불필요한 위계가 생겨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누군가 '언니'를 제안했다. 위계를 배제한 채 상대를 높여 부르는 '언니'. 만장일치 분위기로 호칭이 결정됐다. 수년이 흘렀지만 '언니' 보다 더 취지에 부합하는 어휘를 아직도 본 적이 없다. 그날 이후 남성도, 자녀가 없는 사람도, 어르신도, 어린이도 이 곳에 합류했는데, 우리는 여전히 나이, 성별, 직업, 자녀유무 등에 관계없이 서로가 서로를 언니라 부른다.

 

그저 우연히 한 칼럼을 보고 모인 이 사람들이 '정치하는엄마들'이라는 시민단체로 거듭나는 과정은 마치 영화 같다. 그날 '정치하는엄마들'이란 명칭을 확정한 이래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저마다의 할 일을 찾아 나섰다. 이들의 재능기부만으로 금세 슬로건, 정관, 홈페이지, 로고, SNS 등이 뚝딱 탄생했고회원수도 순식간에 늘어났다. 현생에 어벤져스가 존재한다면 바로 이 사람들 아닐까?



"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입니다."


얼떨 결에 내게도 '시민단체 활동가'라는 새로운 타이틀이 주어졌다. 시민단체와 NGO에 정기적으로 후원금을 보낸 적은 있지만, 내가 그 일원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단체를 통해 첫 언론 인터뷰 제안이 들어오자 나는 "제가요?" 하고 되물었다. 아직 모든 게 낯선 초짜 활동가가 감히 단체를 대신해 어딘가에 나설 자격이 있나 하는 의구심, 그리고 자신 없음을 함축한 말이었다. 나는 덧붙였다. "그런 건 대표든 사무국장이든 본부장이든 뭔가 직함 달은 사람들만 하는 건 줄 알았어요. 보통 시민단체들이 그렇지 않나요?"


하지만 우리 단체의 방향은 아주 명료했다. 그건 바로 '당사자 정치'. 쉽게 말하자면 '가장 혹독하게 겪어본 사람이 가장 전문가다'라는 기조다. 내가 바로 혹독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사람 아니던가. 혹독한 경험이 기준이라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곰곰이 살펴보니 굉장히 능숙하게 단체 일에 앞장선 활동가들도 실은 나와 다를 것 없는 초짜였다. 우리를 소집한, 즉 최초 칼럼을 쓴 장하나 전 국회의원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처음 자신의 정치적 목소리를 내보는 평범한 엄마들인 거다. 부조리와 불합리를 직접 경험한 분야에서부터 나도 조금씩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활동가라는 새 타이틀을 달고 인터뷰이로 참여한 언론, 출판물, 연구 등이 늘어 갔다. 경험이 쌓이면서 내 목소리도 점차 정교하고 단단해졌다. 그만큼 얼굴도 두꺼워졌다. 국회와 광역자치단체에서 여는 큰 토론회나 간담회에 패널로 나가 일종의 정책 책임자들 면전에 돌직구를 던지기도 했다. 훗날 공무원이라는 신분의 한계로 단체 일원으로서의 적극적 활동에는 제동이 걸렸지만, 여전히 나는 시민으로서, 주권자로서, 또 당사자로서 사회에 목소리 내는 일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정치하는엄마들'의 핵심은 '엄마들'도 '정치'도 아닌 '하는'에 있다


누군가 이 단체의 정체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정확한 통찰이다. 이곳은 부단히 움직여 직접 실행하는 조직이다. 그 실행의 결과로 세상이 눈에 띄게 바뀌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내 삶이라도 좀 나아졌느냐 하면 안타깝게도 별로 그렇지 않다. 답답함과 조급함, 그리고 실망감이 없었다면 거짓이다.


그럼에도 '하는' 행위를 멈추고 싶지 않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무엇도 바뀌지 않기에. 그간 축적한 기록들이 언젠가는 다시 소환되고, 더 단단한 연대를 추동하고, 더 큰 힘을 얻고, 더 나은 방향으로 사회를 견인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잔혹한 사회에 그렇게 속고도, 나는 여전히 희망회로를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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