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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마 Nov 29. 2023

그 많은 한부모는 다 어디에 있을까

연대하고 싶었었었었다

스무살에서 스물한살로 넘어가던 겨울, 나는 끙끙 앓았다. 지독한 짝사랑에 빠진 거다. 신뢰하는 두 학번 선배에게 고민을 나눴다. 그는 말했다.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면 하고 후회하는 게 낫지." 그날로부터 오랫동안 나는 그 한 마디를 금과옥조로 여기며 살았다.



시민단체 정치하는엄마들을 경험하며 얻은 가장 큰 통찰은 '연대의 효능감'이다. 혼자 말하면 불평불만 내지는 자조에 불과했던 언어들을, 같은 문제의식을 가진 연대체를 통해 내뱉으면 사회적 목소리가 됐다. 나는 우리 연대를 통해 돌봄, 경력단절, 장시간노동 등 내가 몸소 겪은 문제들을 다루었지만 여전히 이 연대체만으로는 해갈할 수 없는 소재가 있었다. 바로 한부모 문제.


단체의 주축이 되는 구성원들은 대부분 배우자와 자녀가 있는, 이른바 정상가족 프레임 안의 사람들이었다. 내가 처한 상황은 그들의 상황에 다소간의 극적 요소와 고충이 더해지는, 일종의 +@ 공식을 넘어설 수 없었다. '배우자가 있어도 이런데 배우자가 없는 가정은 오죽하겠냐' 라는 공식 말이다. 이 틀 안에서 내가 겪어온 문제를 모두 다루기는 역부족이었다.


나와 같은 고충을 지닌 타깃과 연대해야 내 문제를 사회적 문제로 격상시킬 수 있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 타깃은 크게 다음 세 가지를 충족해야 했다. 


첫째, 한부모가족지원법의 사각지대에 있을 것 (즉, 기준 중위소득 60% 이상 이른바 '비법정 한부모'일 것)

둘째, 돈 벌 능력은 충분하지만 돈 벌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부모일 것 (즉, 경제적 빈곤보다 시간 빈곤에 더 큰 문제를 느끼는 사람일 것)

셋째, 이에 대한 사회적·제도적 해결의지가 있거나, 최소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을 것



장하나 의원이 한 칼럼을 매개로 우리를 결집했던 것처럼, 나도 내 목소리를 공론화하는 글을 써보기로 했다. 역시나 정치하는엄마들을 통해 한 언론사와 연이 닿아 정기 칼럼 필진에 합류할 수 있었다. 


사실 글을 쓰기로 결정하기까지도 많은 고민이 따랐다. '내 삶을, 그것도 온통 실패와 좌절로 가득한 보잘 것 없는 서사를 인터넷에 박제하는 게 맞을까? 고작 한부모라는 정체성으로 나를 세상에 처음 드러내는 게 맞을까? 할아버지, 할머니가 보면 어쩌지? 아주 먼 학창시절 친구들이 알아 보면 쪽팔리겠지? 고꾸라진 내 인생을 비웃진 않을까? 이상한 루머가 퍼지진 않을까? 그래서... 끝내는 이 결정을 후회하는 날이 오진 않을까?' 비겁하게도 이 모든 물음표의 답을 열한살 아이에게 미루기로 했다.


"상의할 게 있어. 엄마가 글을 쓸 기회가 생겼는데 우리가 살아온 이야기를 써야 하거든. 특히나 너를 혼자 키우면서 어렵고 힘들었던 이야기가 많을 거야. 그런 문제점을 우리만 알고 있는 것 보단, 누구에게라도 알리다 보면 세상이 조금 더 나아질 수도 있잖아."


"당연히 써야지. 엄마는 글 쓰는 사람이라며."


"그치만 문제도 있거든. 만약에 네 친구나 그 가족들, 아니면 선생님이 글의 주인공이 우리라는 걸 알아본다면 어떨 것 같아? 그러니까 네가 엄마와 둘이만 살아왔던 게 알려질 수도 있어. 우리가 가난했던 거랑 네가 때로는 좋지 않은 환경을 지나왔다는 것도 말야. 누군가는 그 사실로 널 놀리거나 무시할 수도 있어. 그건 우리 잘못이 아니고 더욱이 네 선택도 아니었지만, 세상에는 자기와 다른 것은 다 틀린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잖아."


"난 지금도 숨기지 않아. 놀리는 친구도 없어. 그런 걸로 놀리면 그게 나쁜 애지."


'건강하게 자라주었구나. 나보다 낫네.'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면서도 행여나 속 깊은 아이가 자신이 아닌 나를 먼저 생각해 내뱉은 대답일까봐 재차 물었다.  


"맞아. 당연히 그렇지. 그래도 엄마가 살짝 걱정했던 이유는 1학년 땐가? 네가 그림일기에 아빠 엄마랑 같이 여행갔다고 쓴 적 있었잖아. 지금도 그렇게 보이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으니까 물어본 거야. 당연히 우리 둘이 상의해서 결정할 일이기도 하고. 또 사실은 엄마도 용기가 부족하기도 하고... 우리 괜찮겠지?"


나는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면 하고 후회하는 게 낫지."라 조언 받은 십수년 전 일화를 전하며, 답.정.너 같은 대화를 마쳤다.


그길로 잠을 쪼개가며 어렵사리 1년 간 24편의 연재 계획서를 작성했다. 그동안 켜켜히 쌓아온 상처들을 다 헤집어 가며 주제를 뽑고 이를 목록화하는 과정은 아프고 또 아팠다. 연재를 끝마칠 때까지도 아픔은 가시지 않았다. 원고를 마감한 날이면 어김 없이 퉁퉁 부은 눈을 하고 출근했다.




첫번째 글이 올라가자마자, 나는 칼럼 링크와 함께 한 한부모단체에 메일을 보냈고 회신을 받았다. 곧바로 약속을 잡고 직접 사무실을 찾아가 의도를 설명했다. 돌아오는 답은 뜻밖이었다. "저도 같은 상황을 거쳐봐서 그 마음 잘 알아요. 그런데 이곳을 통해 비슷한 분들을 찾기는 쉽지 않을 수 있어요. 생계 문제를 겪는 수급자 분들이 대부분이거든요. 다른 단체들도 다르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찾으시는 분을 발견하면 꼭 연결해드릴 게요." 


그 말씀은 틀리지 않았다. 단체를 정기 후원하며 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해봤지만 만나게 되는 분들의 대다수는 첫째 혹은 둘째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사회적·제도적 해결의지'라는 세번째 조건은 사치인 것만 같았다. 불안정한 계약직이나마 그럴 듯한 직장에서 일하고, 좋은 스펙을 가졌고, 돌봄노동을 분담해줄 부모가 멀지 않은 곳에 있고, 양육비를 받고, 아이가 친부 혹은 친모와 정기적으로 관계 맺고 있는 가정은 오직, 오직 우리 뿐이었다. 내가 경험한 부조리와 사회를 향한 분노는 모두 배부른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마음이 잘 맞고 아이들 연령도 비슷해 특히 가까워진 친구가 있었지만, 뭘 같이 바꿔보자는 말은 끝내 꺼낼 수 없었다. 친구는 나보다 더 오래 일하며 더 적게 벌었고, 친구의 아이는 내 아이보다 훨씬 더 어릴 때부터 훨씬 더 긴긴 시간을 홀로 보내왔던 까닭에. 그저 "우리 그 동네에 숙소 당첨돼서 가는데 4인실이거든. 와서 같이 놀래?"라든가, "우리 아들 장난감 사면서 1+1이길래 선물로 가져왔어."라든가, "인라인 스케이트 두개 얻었는데 하나 줄테니 같이 타러 가자."라든가, "내가 애들 데리고 놀다 올테니 너 잠깐 쉴래?"라든가... 부담을 느끼지 않는 선에서 내가 당연하게 지닌 것을 조금씩 나누는 일만이 친구네 가정과 서툴게나마 연대하는 방법이었다.




공개된 글로써 나를 드러내면서부터 간혹 첫째와 둘째 조건을 충족하는 친구들도 만날 수 있었다. '나도 비슷한 상황이라 공감한다'는 메일을 받는 족족 연락을 취해 만나보고 얘기를 나눠봤다. 한부모로서의 여러 고충에는 공감대가 뚜렷하지만, 이것이 사회적 차원의 문제라고 인식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돈을 더 많이 벌거나, 부모의 조력을 적극 받거나, 전 배우자에게 더 의존하거나, 빨리 재혼을 하거나, 그도 아니면 그저 세월의 흐름을 통해 단축·완화·해결할 수 있는 개인적 차원의 문제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을 드러내고 시간과 에너지를 쪼개 사회적 목소리를 내자는 데에는 더욱이 소극적이었다.


'내가 별종인가? 나만 유난을 떨고 있나?' 끊임 없이 스스로를 의심하던 찰나, 메일 한 통을 받았다. 그 역시 적게나마 소득과 재산이 있다는 이유로 한부모가족증명서 한장 손에 쥐어본 적 없는, 법의 사각지대에 위치하는 분이었다. 한부모가 되고 제도적 모순과 불충분을 경험한 뒤, 대학원에 진학해 관련 정책을 분석하는 논문을 쓰는 중이란다. 


드디어 찾았다! 나와 문제의식이 정확히 상통하는 사람

대통령 선거에서 가족공약을 만들고, 국회 보좌진으로 국정감사를 치르는 동안 그와 꾸준히 소통하며 많은 조력을 받았다. 지금은 비록 우리 둘 뿐이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이렇게 연대하다 보면 뭐라도 바꿀 수 있겠다는 희망이 조금씩 피어올랐다.


'곧 논문이 나올 거다. 마무리되면 만나자'고 먼저 소식을 전해온 그는 얼마 뒤 '상황이 어려워졌다'는 말을 끝으로 돌연 자취를 감췄다. 논문 검색 사이트를 뒤져봐도 흔적을 찾지 못했다. 이후 정부의 한 연구기관에서 관련한 제도연구를 하게 될 것 같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하려 연락을 취해봤지만 닿지 않았다. 이 기쁨을 온전히 나눌 수 있는 유일한 벗과의 인연은 이렇게 일시중단 상태를 맞았다.




국회에서 일하게 된 뒤, 별 희안한 단체를 여럿 마주하며 생각했다. 이런 희소한 집단도 연대해서 한 목소리를 내는데, 도대체 나와 동질한 위치에 놓인 그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에 있는 거지? 왜 문제를 문제라 여기지 않는 거지? 왜 숨는 거지? 왜 아무도 말하지 않는 거지? 왜 각자도생하려고만 하지?


그러나 무수한 물음표에 대한 답은 사실 내가 지나온 경로에 있음을 안다. 무슨 제도가 있는지 살필 틈조차 없어서. 그 안에 숨은 사회적 문제를 파악할 여력조차 없어서. 이미 부딪혀봤지만 실패해서. 세상에 더는 기대할 게 없어서. 그냥 다 자포자기해서. 세월이 흘러 아이가 자라면 옅어질 어려움이라 믿어서. 그리고 나와 아이가 받게 될 사회적 시선이 두려워서.


바꿔야겠다는 집념 하에 직업까지 바꿔가며 유난히도 분주하게 살던 나 역시, 지금은 각자도생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사회적 책임감까지 잔뜩 짊어지고 살다 보니, 정작 나만이 책임질 수 있는 내 자신과 가정을 한동안 전혀 돌보지 못했던 까닭이다. 그렇다. 지금의 나는 솔직히 후회한다. 정치고 뭐고 연대고 뭐고, 그냥 우리 둘 잘 먹고 잘 살 궁리하며 살아왔다면 사정이 지금보다는 나아지지 않았을까. '가지 않은 길'을 종종 떠올린다.


그래도 만에 하나, 언제가 되더라도, 내가 남긴 기록들에 공감하는 누군가가 나타난다면, 꼭 이 미련하고도 단순무식한 말을 전하고 싶다.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면 하고 후회하는 게 낫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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