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넘어뜨리면 다리가 된다
미간이 찌푸려질 정도로 형편 없는 책이라 할지라도 한 권의 책을 펴낸 모든 사람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호흡이 긴 글을 쓰는 일은 내게 언제나 넘지 못할, 높고 두꺼운 벽이기 때문이다. 달리는 필력이 드러나는 게 두려워 스레드나 인스타에 짧은 글만 써대기 일쑤였다. 글쓰기가 좋다면서, 글을 잘 쓰고 싶다면서. 스스로가 비겁하단 생각을 자주 했다.
때로는 10문장을 던지면 100문장을 몇 초만에 만들어내는 GPT의 손을 빌려보기도 했다. 독이 든 성배임을 알면서도. 하지만 GPT는 원하는 수준의 글을 내어주는 법이 없었다. 내 문체만 문드러질 뿐이었다. 글이라는 것은 결국 나로부터 나와 나에서 끝나야 한다. GPT가 쓰는 글은 누구나 쓸 수 있지만, 내가 쓴 글은 오직 나만이 쓸 수 있으므로.
스스로 무언가를 깨부수거나 지속할 힘이 부족할 때면 환경 설정에 힘을 쏟는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우리는 누구나 타인의 인정을 바라기 때문이다. 긴 글을 쓰고 싶다면, 긴 글을 쓰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야 한다. 나는 에세이가 쓰고 싶었다. 내 생각과 감정, 일상과 관점을 담은 서툴러도 솔직한 그런 글. 환경 설정에는 모임만큼 만만한 게 없다 생각해 에세이를 쓰는 모임들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인 데스커라운지에서 ‘글손실방지위원회’라는 글쓰기 모임의 모집글을 보았다. 이름이 다소 투박하긴 해도 직관적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일주일에 한 번 에세이를 쓰고, 서로의 글을 나누고, 합평을 하는 모임이었다.
글쓰기 합평은 여러 사람이 모여 서로의 글을 읽고 비평을 나누는 일이다. 비...비평이라니. 꽤나 겁이 나는 일이지만 사실 필력을 기르는 데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근육에 상처를 내고 회복을 하면서 근력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내 글에도 상처를 낼 용기가 필요했다. 기획 맛집인 곳에서 만드는 글쓰기 모임은 어떨까 궁금하기도 했고. 호기심이 두려움을 이겨내 도전장을 던졌다. 모임의 취지에 걸맞게 너무 잘 쓰는 사람들은 걸러졌고, 성장이 필요한 나는 회원으로 선정이 되었다.
그렇게 3주 간 3편의 에세이가 탄생했다. 느슨한 강제성과 다정한 채찍질 덕분이다. 합평의 매력은 마음이 상하지 않는 선에서 객관적으로 내 글을 보게 된다는 점이다. 그런 시간들이 쌓일수록 글은 더 좋아질 수밖에 없다. 이번 모임을 통해 서로의 글을 읽고 피드백을 해주는 글친구의 존재가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벽을 넘어뜨리면 다리가 된다. 작년에 들었던 카피라이팅 수업에서 유병욱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다. 긴 글쓰기라는 벽을 마주하면 매번 돌아서기 바빴던 나. 이제는 두들겨도 보고 밀어보기도 한다. 바로 지금처럼. 설사 쓰러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도망치는 것보단 훨씬 낫지 않나, 뭐 그런 생각이 든다. 행여나 정말로 쓰러진다면 그 다리는 전혀 생각지 못한 곳으로 나를 데려가주지 않겠나, 뭐 그런 기대를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