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입을 삶에 대하여

옷장을 정리하다 떠오른 생각들

by 슐리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옷을 전부 토해낼 것 같은 옷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주 생각한다. 왜 이렇게 입을 옷이 없지? 작년엔 도대체 뭘 입고 다녔지? 안 입는 옷들이 한가득인데도 또 옷가게를 기웃거린다. 읽지 않은 책을 두고 새 책을 들이는 마음처럼. 인생도 그렇게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가진 것도 제대로 못 누리면서 새로운 것을 제대로 누릴 수 있을까.


필요하지 않은 물건, 중요하지 않은 생각, 소화되지 않는 감정 같은 것들이 일상을 눌러올 때가 있다. 그로부터 벗어나려면 잠시 멈춰 서서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환경은 정신을 고스란히 반영하기 때문이다. 물건을 비우면 생각이 정리되고, 생각이 정리되면 마음도 가벼워진다. 주변을 들여다보는 일은 결국 나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사소한 정리는 큰 여유를 만든다.


때마침 지인이 운영하는 비움 챌린지에 몸 담은 지도 벌써 세 달째다. 정리 전문가인 곤도 마리에는 옷 정리가 가장 쉽다고 했지만, 옷장 문을 열어보면 꼭 그런 것 같진 않다. 입어야 할 이유, 버리지 말아야 할 이유가 창의적으로 튀어나온다. 그 속을 들여다 보면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언젠가는 입을 거란 희망이 아닌 지금 버리면 후회할 것 같다는 불안.


문득 파레토 법칙이 떠오른다. 전체 결과의 80%는 20%의 원인에서 비롯된다는 관점이다. 책 한 권의 대부분은 몇 줄의 핵심을 강조하기 위한 포장이고, 무료로 게임을 즐기는 수많은 유저 뒤엔 수익의 대부분을 책임지는 소수의 헤비 유저가 있다. 옷장도 다르지 않다. 손이 자주 가는 옷은 정해져 있고, 그 20%가 내 일상의 80%를 책임진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손이 잘 가는 옷엔 이유가 있다. 내 몸에 맞고, 편하고, 나와 어울린다. 단순한 그 기준은 삶의 우선순위와도 닮아 있다. ‘있으면 좋을 것들’로 채우다 보면 정작 ‘있는 것들’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그러니 채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비움을 하며 설레는 것만 남기는 연습을 하고 있다. 잘 맞고 오래 입고 싶은 삶에 다가가기 위해.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의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것들에 집중해도 괜찮지 않을까. 결국 나를 편하게 해주는 것들이 내 삶을 오래 지탱해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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