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와 트루먼, 그리고 기억의 정치
2025년 5월 29일과 9월 29일, 국민의힘 정치인들이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 장군 동상 앞을 찾았다. 표면적인 이유는 자유 수호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참배였다. 그러나 그 장면은 추모라기 보다 냉전기의 기억을 다시 정치의 영역으로 소환하려는 행위로 읽힌다.
맥아더 동상은 1957년에 건립되었다. 이곳은 원래 만국공원이라 불렸으나, 동상이 세워진 뒤 자유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동상은 오랫동안 반공 이데올로기의 상징물로 기능하며 철거와 보존을 둘러싼 갈등이 반복되어 왔다. 그리고 이제는 급기야 ‘해리 S. 트루먼 대통령 동상 건립 추진 결의대회’ 현수막이 걸리며 자유공원이 다시금 이념의 전장으로 불려 나오고 있다.
최근 인천지구황해도민회가 내건 현수막에는 "오늘날 대한민국 존재의 가장 큰 공로자는 해리 S. 트루먼 대통령", "해리 S. 트루먼 대통령 만세, 동상을 건립합시다!", “맥아더 장군 동상과 해리 S. 트루먼 대통령 동상이 있는 곳, 세계적인 명품도시 인천”이라고 적혀 있다. 특히 행사 안내 현수막에는 "참석자에게 설탕 3kg, 의자에 앉으면 교환권 지급"이라는 문구가 포함됐다. 이는 시민의 자발적 참여를 가장한 이념적 동원이며, 기억의 정치가 어떻게 대중적 이벤트로 포장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트루먼과 맥아더를 ‘한미동맹의 쌍두마차’로 묶으려는 발상은 명백한 역사적 오독이다. 두 인물은 한국전쟁의 전개 방향을 둘러싸고 정면으로 충돌한 당사자였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트루먼 대통령은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유엔군 파병을 결정했다. 그리고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전세를 역전시키며 영웅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이후 그는 만주 폭격과 중국 본토 공격, 대만군 투입 등 전면전을 주장했고, 이로 인해 트루먼 대통령과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트루먼은 공산권 전체와의 전면 충돌이 아닌, 한반도의 현상 유지를 목표로 하는 제한전(限定戰) 원칙을 고수하며 맥아더의 요구를 거부했기 떼문이다.
결국 두 사람의 갈등은 폭발했다. 맥아더가 대통령의 결정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자, 트루먼은 1951년 4월 그를 전격 해임했다. 그렇게 이 사건은 군에 대한 민간의 통제(civilian control)라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재확인한 역사적 순간으로 남았다. 트루먼은 확전을 막았지만, 정치적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반면 맥아더는 영웅으로 추앙받았지만, 그의 주장은 민주주의의 원리를 거스른 것이었다. 이처럼 두 인물의 대립은 자유 진영의 협력자로 묶을 수 없는 복잡하고 모순적인 역사적 균열을 보여준다.
그러나 오늘의 자유공원에서는 이러한 복잡성이 의도적으로 삭제되고 있다. 맥아더는 여전히 ‘자유의 영웅’으로, 트루먼은 ‘대한민국의 은인’으로 재포장된다. 국민의힘 인사들의 참배와 트루먼 동상 건립 추진은 시기와 맥락은 다르지만, 본질적으로는 과거의 상징을 통해 현재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냉전 서사의 재소환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트루먼과 맥아더의 갈등을 이해한다면, 자유공원은 한미동맹의 성지가 아니라 전쟁과 권력, 그리고 민주주의의 긴장을 되새기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추진되는 동상 건립과 정치적 참배는 그 긴장을 지우고, 자유라는 이름으로 냉전적 질서를 복원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시민의 기억이 교차하는 공공의 장소가 다시 이념의 무대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