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예술인 기본소득(BIA)

위기 대응을 넘어 제도로

by 손동혁

아일랜드 정부가 예술인 기본소득(Basic Income for the Arts, 이하 BIA)을 시범사업에서 정규사업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했다. 팬데믹 대응 과정에서 도입된 정책 실험이 체계적인 평가를 거쳐 제도화 단계로 이행한 것이다.


BIA는 2022년에 시작된 시범사업으로 예술·창작 종사자에게 주당 325유로를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정책의 목적은 예술인의 소득 불안정성을 완화하고, 이러한 지원이 창작 활동과 예술 생태계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검증하는 데 있었다.


아일랜드 정부는 자격 요건을 충족한 신청자 가운데 무작위 추첨을 통해 2,000명을 선정해 기본소득을 지급하고, 동일한 요건을 갖췄으나 선정되지 않은 1,000명은 비교집단으로 설정해 정책 효과를 분석했다. 이 제도는 사회복지 급여와 별도로 운영됐으며, 소득 수준이 아니라 예술 활동의 지속성과 전문성을 주요 기준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기존의 복지정책과 구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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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일랜드 정부 누리집의 예술인 기본소득 홍보 이미지


아일랜드 정부가 발표한 중간 비용-편익 분석에 따르면 BIA에 투입된 공공 재원 1유로당 약 1.39유로의 사회·경제적 편익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됐다. 해당 분석에는 예술인의 심리적 웰빙 변화, 창작 시간 증가에 따른 예술 관련 소득 변화, 문화 향유가 갖는 사회적 가치, 일부 세수 증가 효과 등이 포함돼 있다. 정부는 이러한 결과를 토대로 예술인 기본소득이 일정한 사회적 효과를 동반할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정량적 평가에서도 유의미한 변화가 관찰됐다. 수혜자 집단은 비교집단에 비해 예술 활동에 투입하는 시간이 증가했으며, 부업이나 비예술 노동에 소요되는 시간은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다. 설문 조사 결과에서는 불안과 우울감이 완화되고, 전반적인 창작 여건이 개선됐다는 응답이 확인됐다.


아일랜드 정부는 이러한 중간 평가 결과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2026년 이후에도 BIA 제도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2025년 하반기에 발표된 정부 방침에 따르면 BIA는 시범사업 종료 이후에도 지급액과 기본 구조를 유지하며, 재정 여건에 따라 대상 인원 확대 가능성도 함께 검토되고 있다. 이는 예술인 기본소득이 팬데믹이라는 특수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한시적 조치에서 중장기적 문화정책 수단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이 제도를 보편적 기본소득으로 해석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BIA는 예술·창작 종사자라는 특정 직군을 대상으로 한 선별적 제도이며, 자격 요건 심사와 무작위 추첨 절차를 거쳐 운영된다. 또한 비용-편익 분석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심리적 웰빙 개선이나 문화 향유의 사회 가치는 비시장 가치를 화폐로 환산한 추정치로 산출 방식과 기초 가정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공공 재원 1유로당 1.39유로’라는 수치는 정책 효과를 단정적으로 입증하는 지표라기보다, 제도의 성과를 설명하기 위한 참고 지표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아일랜드의 사례는 예술 정책의 접근 방식에서 분명한 전환을 보여준다. 기존 정책이 결과물이나 단기 성과를 기준으로 지원 대상을 선별해왔다면, 이 제도는 창작 활동이 지속될 수 있는 ‘조건’ 자체를 정책의 핵심 목표로 설정했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이는 예술 활동을 사후 평가의 대상으로 한정하기보다는 불안정한 노동 조건 속에서도 창작이 중단되지 않도록 구조적 환경을 조성하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반면 한국의 예술지원 정책은 ‘공모–심사–선정–정산’으로 이어지는 프로젝트 중심의 성과 관리 체계가 고착화되어 있다. 단년도 예산 구조 속에서 결과물 중심의 정량적 지표가 평가의 핵심 척도로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체계는 행정적 관리의 효율성과 절차적 투명성을 확보하는 데에는 일정 부분 기여해 왔으나, 창작 과정이 장기적이고 비정형적인 예술 노동의 특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다.


아일랜드의 예술인 기본소득은 이러한 한계에 대한 하나의 대안적 접근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제도는 성과를 직접적으로 평가하거나 결과물 생산을 조건으로 삼기보다는 예술가가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시간과 삶의 조건을 안정적으로 보장하는 데 정책의 초점을 맞췄다. 이는 예술의 가치를 행정적 기준과 단기 성과를 통해 판단해 온 기존 지원 방식과는 분명히 궤를 달리하는 접근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아일랜드의 모델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제도적 환경의 차이가 크다. 중앙집중적 재정 구조, 단년도 예산 체계, 성과 관리 중심의 행정 문화는 상시 지급형 제도 도입에 현실적인 제약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 사례는 한국 문화정책 논의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핵심은 예술 정책을 단기 사업과 성과 중심으로 운영할 것인가, 아니면 예술 활동이 지속될 수 있는 사회적·제도적 조건을 중장기적으로 설계할 것인가라는 관점의 전환 문제다. 더 나아가 예술을 행정적 관리와 평가의 대상인 결과물로 볼 것인지, 혹은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하나의 노동 형태로 인정할 것인지에 따라 정책의 설계 방식과 평가 기준 자체가 달라질 수 있음을 이 사례는 분명하게 보여준다.


아일랜드의 예술인 기본소득은 하나의 정책적 선택지를 실험하고 이를 제도화한 구체적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이 사례는 예술인 기본소득이 단일한 표준 모델이 아니라, 국가별 재정 구조와 행정 환경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설계될 수 있는 정책 수단임을 보여준다. 동시에 제도의 설계 방식에 따라 정책의 효과와 한계 역시 서로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점을시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술인 기본소득 도입은 우리 사회의 제도적 조건에 맞는 방식을 탐색해 가는 과정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재정 구조, 기존 예술지원 제도, 평가와 관리 체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단계적 접근이 요구되며, 특정 장르나 경력 단계, 혹은 지역을 중심으로 한 시범 운영을 통해 정책 효과를 검증하는 방식이 현실적인 선택지가 될 수 있다.


나아가 예술인 기본소득의 제도화 과정은 예술 정책의 목표를 어디에 둘 것인가를 다시 묻는 과정이기도 하다. 성과 중심 지원 체계를 보완하는 안전망으로 설계할 것인지, 혹은 예술 활동의 지속성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구조적 장치로 자리매김할 것인지에 따라 정책의 설계 원리와 운영 방식은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아일랜드는 이러한 선택의 문제를 추상적 논의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 정책으로 구현했다는 점에서, 각국이 자국의 제도적 조건에 맞는 해법을 모색하는 데 중요한 참조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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