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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지 Sep 23. 2023

요리는 싫지만 칼질과 수다는 하고싶어.

'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눈을 떴다. 창 밖이 밝다. 순간 놀라서 핸드폰을 본다. 6시 50분이다. 이런, 지각이다.

후다닥 일어나 모자를 푹 눌러쓰고 서둘러 집을 나온다. 6시부터 시작인데 늦어도 단단히 늦었다. "늦어서 죄송해요!"를 외치며 급히 교회 주방에 들어서니 이미 거진 완성 단계에 접어든 여러 요리 속에서 나를 돌아보시는 얼굴들이 반갑게 인사해주신다. "늦잠잤구나!" 너털 웃음 웃으시면서 다른 건 거의 다 되었으니 저어기 전 부치는 것만 도와드리라신다. 숟가락을 두개 챙겨들고 전을 부치는 곳으로 다가간다. 사모님께서 빠른 손놀림으로 동글동글 예쁜 전을 쉼없이 부치고 계신다.

우리 교회는 주일 점심을 준비하는 식사당번 조가 있다. 총 7조인지라 한달 반 정도의 주기로 식사당번이 돌아온다. 코로나를 지나며 대개의 교회들이 점심을 안 먹게 되었거나 업체 등에 맡기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들었는데 우리는 용케도 식사를 유지중이다. 힘들다 말은 하셔도 늘 뚝딱뚝딱 맛난 요리를 탄생시키시는 금손 권사님들이 많이 계신 덕분이랄까. 나는 그저 옆에 껴있기만 해도 칭찬받는 '막내 하수'다. 왼손에 칼을 쥐어들고는 "저 뭐할까요?"를 외치고 주방을 돌아다닌 나의 모습은 오래도록 조장 권사님의 단골 에피소드가 되어 여러 분들께 웃음을 많이 선사했었다지. 


조장 권사님이 논산 텃밭에서 따서 다듬으신 고구마순이 오늘은 다른 야채들과 만나 전이 되었다.


역시 오늘도 쉽지 않다. 사모님이 부치실 때는 되게 쉬워 보였는데, 내가 부치니 모양도 커지고 두께도 두툼해지고 자꾸 탄다. 결국 10분만에 조장 권사님께 자리를 내어드리고 전을 세팅하는 위치로 이동된다. "수고했다. 그래, 보기보다 쉽지 않제?"라면서 웃어 주시는 조장 권사님의 위로아닌 위로에 "네! 이거 어려워요. 히잉."하면서 앙탈도 부려본다. 결혼 11년차 주부가 전도 제대로 못 부치는 지금의 내 모습이 조금 부끄럽단 생각도 좀 들지만, 그 부끄러움이 존재감을 나타내기엔 나는 이미 너무 다 보여진 패나 다름없다. 


전 부치는 담당에선 미끄러졌지만 세팅은 미끄러지지 않을테다!


음식을 하는 내내 주방과 식당은 시끌시끌하다. 곳곳의 공간에서 두런두런 나누는 수다가 좋다. 요리 고수이신 권사님 옆에서 요리에 따라 다른 야채써는 법도 다시 배워보고, 어떻게 하면 아삭하게 콩나물을 데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호박잎을 맛있게 찔 수 있는지에 대해 알려주시는 권사님의 비장한 모습에 빠져들기도 한다. (물론 들을 땐 재미있으나 실전에 옮긴 적은 없다.) 요리얘기 뿐만 아니다. 자기는 막내딸이라 아버지가 매일 굴목걸이를 만들어주셔서 쭉쭉 빨고 다녔다고, 사랑 많이 받았다고 너스레떠시는 조장 권사님의 어린 시절 얘기도, 30년 가까이 어린이집을 했어도 여전히 아이들이 예쁘다시며 아이들 얘기에 여념이 없으신 권사님의 얘기도 다 좋다. 물론 나의 수다도 꽤 분량을 차지하는 건 당연하다. 수다는 각 사람에게 비슷한 지분이 돌아가야 진정 모두가 재미있는 법.

수다 속에서도 내 손을 제외한 모두의 손은 정말 재빠르다. 그 사이 전을 제외한 7가지 크고 작은 음식들은 모두 완성되어 큰 그릇에 담겨 세팅이 완료된다. 먼저 마무리하신 권사님이 "커피 마실 사람?"을 외치시고, 곧이어 내 앞에 따끈한 믹스커피가 도착한다. 


글로 남기기 위함이었지만 '그거 왜 찍어?'라고 묻는 권사님들 질문에는 부끄러워서 "남편한테 자랑하려구요."라는 웃긴 핑계를 댔다.


문득, 전과 믹스커피라는 이 낯선 조합과 치킨과 맥주라는 최고의 조합이 함께 떠오른다. '위대한 개츠비' 속에서 톰과 데이지가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던 차디차게 식은 프라이드치킨 한 접시와 흑맥주 두 병 말이다.  

데이지와 톰은 차디차게 식은 프라이드 치킨 한 접시와 흑맥주 두 병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그는 식탁 건너편으로 그녀에게 뭐라고 열심히 말하고 있었다. 진지한 태도로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감싸고 있었다. 이따금 데이지는 그를 올려다보며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행복해 보이지 않았고, 두 사람 다 치킨이나 흑맥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렇다고 불행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 광경에는 분명 자연스럽고 친밀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만일 누가 그 모습을 본다면 그들이 함께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 F.스콧 피츠제럴드 (민음사)


아직은 낮의 해가 뜨겁던 8월 중순, 고전 속 요리를 함께 만들어 보는 <엄지 살롱> 속 엄지 작가들은 샤로수길 그 어딘가에 숨어 있는 보석같은 장소에서 만났다. 이번 요리 재료 담당은 나. 워낙 덤벙거리는지라 출발하기 전까지 몇 번을 확인하고 또 했는지. 그런데 어쩌나. 심지어 이 날도 심각한 지각이었다. 재료가 든 여행가방은 나의 무거운 마음과 더불어 축축 늘어지고, 더운 날씨는 이미 내 등을 땀으로 적셔버렸다. 


그는 뒤표지를 펼쳐 내가 볼 수 있도록 책을 빙 돌렸다. 아무것도 인쇄되어 있지 않은 면지에는 '계획표 - 1906년 9월 12일'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기상 ............................................... 오전 6:00
아령 들기와 벽 타기 ........................ 오전 6:15~6:30
전기학 및 기타 공부 ........................ 오전 7:15~8:15
일 .................................................. 오전 8:30~4:30
야구와 스포츠 ................................. 오후 4:30~5:00
웅변 연습, 자세 습득 훈련 ................ 오후 5:00~6:00
발명에 필요한 공부 ......................... 오후 7:00~9:00
위대한 개츠비, F.스콧 피츠제럴드 (민음사)


덤벙거리고 늦고 헤매고. 나의 불완전함이 유난히 와닿는 이런 날은 가방의 무게와 더위의 습함이 더더욱 나를 누르는 것 같다. 개츠비의 아버지가 닉에게 보여주었던, 개츠비의 가지런한 일과표가 절로 떠오른다. 개츠비는 이 계획대로 매일 잘 살아냈을까. 그랬으니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겠지? 나도 10대때는 매일 이렇게 하루의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대로 살아낸 내게 뿌듯함을 느끼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하루하루 그저 살아내는 게 신기한 날들의 연속이다. 

나에 대한 불만으로 머리가 차오를 때쯤, 모임 장소에 도착했다. 여느 때처럼 환히 반겨주는 고마운 이들, 그리고 사랑스런 중학생 손님까지. 이렇게 좋은 공간에서 좋은 이들과 만나며 웃는데 속은 아직도 영 그렇다. 애써 기분을 삼키면서 자리에 앉아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다 요리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가방에서 닭을 꺼내고, 로즈마리를 꺼내고, 버터를 꺼내고. 다행히 두고 온 건 없다. 그리고 내 앞에는 도마와 칼이 준비된다. 생로즈마리를 잘게 다지기 위함이다. 묘하게, 기분이 좋아진다.


칼이 예쁘다 생각했었는데 오늘 사진을 보니 이케아 꺼구나. 나도 이 김에 장만해야겠다.


맛있는, 멋있는 요리로 가는 과정으로서의 칼질을 좋아하는 게 아니다. 그냥 칼질이 좋다. 도마에 일정하게 닿는 탁탁 소리와 일정하게 썰리는 그 간격을 보는 게 기분이 좋다. 칼질 자체에 집중하지만 이 칼질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요리'라는 목적지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다. 칼질을 하면서 노래도 부를 수 있고 수다도 떨 수 있다. 일종의 수행같은 느낌이랄까. 전을 잘 부치치 못해도 전 부치는 행위를 좋아하는 것도 같은 이치.

이 수행의 중간중간 행해지는 수다도 정말 좋다. 사실 우리 엄지 작가들은 나처럼 산만한 분들이 없으셔서인지 요리하는 동안도 책에 관련한 이야기라던지 요즘의 진지한 세상사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하시는 분위기라 내가 살짝 자중은 하고 있는데, '주변 사람 에피소드' 부자로 이름불리는 거 보면 이미 내 성향이 드러난 것 같기도 하다. 세상 쓸데없는 사적인 이야기로 수다를 떠는 게 좋다. 나의 근황, 주변 사람, 연예인, 요즘 뜨는 노래, 잊히지 않을 흑역사 등등 말이다. 대화의 흐름에는 집중하고 있지만 이 대화의 귀결에는 집중하지 않아도 되는, 딱 그만큼의 수다.


올리브유와 로즈마리를 섞은 버터를 닭에 쳐발쳐발하는 것도 칼질만큼은 아녀도 재미있더라.
버터에 버무린 닭은 오븐에 2/3 정도 넣고, 나머지는 프라이팬에 직접 구웠다.

그래서 나는 이 날, 프라이팬 앞에 서서 하니와 함께 나눈 수다가 특히 좋았다. 물론 다른 이야기도 너무나 재미있지만, 단둘이 같은 일을 하면서 개인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시간의 어마어마한 매력은 내가 그 옛날, 단둘이 실험실에서 매일 서로의 추억을 나누던 남편에게 마음을 품은 그 순간 알아채버린 후다. 닭익는 소리와 함께 우리의 이야기도 기분좋게 무르익어가던 그 시간의 고소한 향이 공감각적 기억이 되어 지금의 나를 또 미소짓게 한다.

톰과 데이지가 만약 식어버린 치킨과 흑맥주 두 병을 사이에 두고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대신 주방에서 단둘이 버터치킨을 요리하고 있었다면? 

1. 절대 그 다음날 떠날 수 없다. 왜냐? 중요한 얘기는 하지 않았을 테니까.
2. 참회 내지 포기를 택한 것이 분명하다. 요리 속 수행의 과정을 해낼 정신이 있다는 뜻이니까.
3. 개츠비가 스스로 데이지를 포기했을 것이다. 둘이 함께 요리하는 모습을 닉이 봤대도, 개츠비가 직접 봤대도, 이 모습에서 '부부'라는 인연의 공동체를 끊어낼 방도는 생각나지 않을 것이다.  

고로, 둘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이 장면에는 치킨을 요리하는 장면이 없는 것이 당연지사!


프라이팬에 구운 버터치킨(좌)과 오븐에 구운 버터치킨(우). 둘 다 맛있다는 건 안비밀.
쓸이 가져오고, 장이 깎은 복숭아와 나리샘이 가져온 맥주가 버터치킨과 함께하니 여기가 지상낙원



이유식 만드는 것도, 아침밥을 차리는 것도, 국을 맛있게 끓이는 것도 내게는 고역이었다. 나를 포함한 누군가가 맛있게 먹길 바라는 요리를 완성하는 자체는 내게 큰 기쁨이 아닌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도마와 칼을 꺼내는 게 좋고, 교회에서 식사준비를 하는 게 좋고, 동서과 하루 내 전을 부치는 게 좋았던 건, 목적이 있고, 완벽해야만 성공한 듯한 인생의 레이스 속에서 완벽하지 못한 내가 그 짧은 찰나 안에서 내 인생 속 목적을 잠시 잊고, 내가 지금 맞이하고 있는 '순간'에 집중할 수 있는 짜릿함과 생동감을 주어서였다는 걸, 나는 개츠비와 버터치킨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개츠비보다 계획을 잘 못 지켜도,

데이지보다 예쁘지 않아도,

톰보다 돈이 많지 않아도

내 삶이 순간의 행복으로 굴러가는 그 비결.


요리는 싫지만 칼질과 수다는 하고 싶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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