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정착해서? 겉만 뻔지르르해서!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인지, 아니면 기사나 자료를 본 것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여튼 최근 아주 재미있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핀테크와 블록체인, 카풀 등 신성장 동력으로 분류되는 ICT 기술들이 국내에서 제대로 정착되지 않고 잡음을 일으키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중앙집중형이 잘 갖춰진 국내 시장 상황 때문이라는 말.
핀테크의 경우는 신용카드와 통신 네트워크의 안정적인 정착으로 굳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고, 블록체인도 굳이 효율적인 중앙집중형 플랫폼을 대체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겁니다. 카풀도 마찬가지. 따지고 보면 택시비는 국내가 외국과 비교해 좀 싸죠. 대중교통도 잘 구비되어 있어 시스템 시너지도 강하고요.
결론은, 이들 ICT 혁명들이 국내에 확실히 정착되지 못하는 것은 기존 체제가 잘 구비되어 있으며, 새로운 문물이 그 틈을 공략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는 것. 음, 맞는 말이기도 한데 전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영향은 미쳤지만 더 핵심은 필요이상으로 강력하기 때문이다. 좋은 것과 강력한 것은 다릅니다. 사실 이런게 더 어렵죠.
불편함이 진보를 만든다...그런데 우리는?
영화 킹스맨에는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고 합니다. 저는 '불편함이 진보를 만든다'고 믿습니다. 이는 아주 오래된 논쟁인 기술이 먼저냐, 시대가 먼저냐의 문제와 연결됩니다. 기술의 발전이 먼저 일어나 시대를 이끄는 것일까. 아니면 시대가 기술의 발전을 끌어오는 것일까. 케바케라고 생각하는데 굳이 빈도를 더 주자면 전자라고 생각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불편함을 느낀 혁신가, 혹은 무언가가 기술로 시대의 발전을 끌어낸다'입니다.
핀테크 보겠습니다. 토스의 비바리퍼블리카, 데일리금융그룹 등 잘 나가는 기업이 있고 간편결제 쩔죠.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졸라 우리의 삶에 내재화됐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아니, 내재화되겠지만 속도가 좀 더디죠. 그런데 중국이나 동남아시아를 보면 핀테크 발전 속도가 장난이 아닙니다.
많이 알려졌듯이, 두 사례의 차이는 불편함에서 시작됐습니다. 신용카드. 우리나라는 아주 그냥 막 신용카드 쭉쭉 뿌리죠. 성인되면 신용카드 먼저 만드는 나라아닙니까. 그러니 굳이 핀테크로 이어갈 동력이 약해요. 신용카드면 다 되니까! 반면 중국이나 동남아시아는 신용카드 보급율도 낮고 위조지폐 문제도 심각해요. 몇 년전 태국 출장에서 아무렇지않게 현지 백화점서 신용카드 내밀었다가 현금만 받는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백화점인데...!!!!
규제 이야기도 하는데. 뭐 당연히 영향이 있을겁니다. 특히 중국같은 사회주의국가들은 정부가 까라면 까야 하니까...근데 말입니다. 이러한 흐름도 결국 자기들의 불편한 상황이 있었으니 추진되고 단행되는것으로 봅니다. 아무리 사회주의국가라고 자국시장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추진할 이유가 없잖아요? 졸라 불편하니까 정부가 나서서 인민의 풍요를 위해 규제 다 제껴주는 거죠. 규제 이야기는...전 솔직히 사이드 이슈라고 생각합니다. 동남아 국가들이 유선 네트워크에서 단숨에 무선으로 나가는 것도, 섬이 많아서 졸라 불편하니까 기술의 발전을 확 건너뛰어야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당연한 행보죠.
블록체인 보겠습니다. 탈 중앙화, 세밀한 기록, 거기에 이은 토큰 이코노미...다 좋죠 훌륭하죠. 다만 이런건 중앙 집중형 플랫폼이 잘 구축된 대한민국 같은 나라에서는 당장 흥미를 끌지 못합니다. 기득권들이 보기에 별 문제가 없는데 도대체 왜?
역사 이야기를 조금 하자면...중국과 서유럽을 보자고요. 서유럽에는 통일제국이 없었습니다.(비슷한 뭐시기는 있었지만) 다만 중국은 진시황 이후로 대부분 통일제국의 방향성을 따라가요. 분열되어도 누군가 천하통일을 하려고 했죠. 즉 서유럽은 걍 찢어져 사는게 익숙했고 중국은 뭉치는 것이 익숙했다는 겁니다.
지리적 요인 등 다양한 요인이 영향을 미쳤겠으나 저는 유교관념이 그 차이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에서 천자는 하늘이 내린 사람. 즉 초인이에요. 모든 제후들은 절대 복종을 해야죠. 그 아래로 뭉쳐야 하거든요. 이러한 중앙집중형 제국은 분열을 해도 이를 장기간 방치하지 않습니다. 다만 서유럽은 그딴거 없어요? 카이사르? 황제? 내가 왕이고 영주여. 서유럽에서 봉건제가 오랫동안 이어지고 민주주의가 시작된 곳이 서유럽 중앙에 박힌 프랑스라는 점은 결국 태생부터 분산화의 가치에 익숙한 이들이 더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하는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은 중앙집중형. 서유럽은 블록체인 정도로 갈음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은 중앙의 권력이 지방에 미치지 않아도 이를 확실하게 제어할 수 있는 거대한 의식적 담론, 즉 유교문화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다양성에 집중할 이유가 없는겁니다. 그러다 다양성의 강점을 가진 서구에 개털렸지만. 여담이지만 조선도 비슷합니다. 구한말 조선의 병력? 거의 없었어요. 그 정도로 어느정도 지방을 장악했다는건 역시 유교문화의 위력입니다.
현재의 블록체인 이야기로 돌아오면. 대한민국은 굳이 탈 중앙화를 시도할 매력이 없슴다. 뭐 좋다고는 하는데 솔직히 잘 모르는데다 불안하기도 하고, 이럴때는 익숙한 것으로 가는 방향이 답으로 보이거든요. 블록체인 생태계 전반이 생각보다 올라오지 않는 이유라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카풀. 우리는 택시업계의 질낮은 서비스 이야기를 하면서 카카오 카풀에 반대하는 분들을 비판하는데, 정말 냉정하게 보자고요. 일단 택시비요. 경제 수준에 맞춰서 다른 나라와 생각하면 엄청 쌉니다. 게다가 중앙집중형 대중교통 시스템. 대박입니다. 택시타고 다니면서 지하철과 버스 연동하면 어디든 다녀요. 잘 구비되어 있습니다. 택시 서비스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는 분명히 있지만 그 불편함은 절대 전혀 새로운 파격이 자연스럽게 대안으로 등장할 정도는, 확신합니다만 절대 아닙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답 나옵니다. 대한민국의 교통 인프라는 최고며, 택시도 수준 이상은 맞습니다.
다 좋은데..뻔지르르해
정리하자면 핀테크, 블록체인, 카풀 등 대부분의 혁신 ICT 기술이 국내에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기존 시스템이 잘 구비되어 있으니까. 불편함을 느껴도 크게 느끼지 못하니까로 갈음할 수 있습니다. 뭐 당연히 기존 시스템에 불만이 나오고 새로운 기술의 강점이 뚜렷해도, 그 크기가 작으면 사람은 잘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전 이 이슈보다 더 큰 이슈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존 체제가 잘 구비되어 있어 우리의 ICT 혁신 도입이 어려운 것은 맞지만, 역설적으로 기존 체제가 잘 구비되어 있어 '보여서', 즉 '뻔지르르'해서 '뻥튀기'되어 있는 것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핀테크를 보면 신용카드 편해요. 굳이 불편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현재 신용카드 도입율...이거 정상인가요? 2014년 발급수가 살짝 줄었으나 2015년부터 다시 올라 아주 정점을 향해 갑니다. 연 1억장 발급이 평균입니다. 성인 중 신용카드 없으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아요. 이건 국내 전체 소비경제에 악영향을 미칩니다. 즉 신용카드 대한민국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는 셈이고, 우리는 그림자에 대해 잘 모르거나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를 불편함으로 인식하지 않아서 문제입니다. 즉 신용카드 대한민국이 너무 편하고 좋은 나머지 그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어도 체감을 못합니다. 겉만 뻔지르르한 상태라 진짜 부작용, 불편함이 보여도 핀테크가 이를 해결한다고 외쳐도 잘 먹히지 않습니다. 신용카드 긁으면 내역 문자로 받잖아요. 그거 다 일일히 챙깁니까? 그런데 핀크로, 토스로 관리하면 어떨까요. 더 효율적이고 간편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즉 매우 아이러니하지만...신용카드라는 기존 체제가 너무 강력하지만 속은 곪아가고 있고. 그 대안을 파고들 여지가 없어지는 대목이 국내 핀테크의 진짜 어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용카드 시스템이 잘 정착되어서가 아니라, 신용카드 시스템이 너무 강력해서 그림자가 깊어지는데도 그 대안이 힘을 쓰지 못한다고 봅니다. 잘 정착된 것과 강력해서 그림자가 생기는건 다르고, 후자의 경우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말도 꺼내지 못하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고 봅니다. 여기서 말하는 핀테크는 신용카드처럼 죽죽 긁는 간편결제가 아니라, 일종의 통합 핀테크 플랫폼을 의미합니다.
블록체인도 비슷합니다. 대한민국 중앙집중형 플랫폼 강하죠. 그런데 문제가 많아요. 누군가 전자정부 이야기를 합니다. 이거 죽이지 않냐고.
네, 죽일정도로 강하죠. 좋은 것이 아니라 강하죠. 좋은 것이 아니라 강하기 때문에 그림자도 있고, 우리는 그 그림자를 덜어낼 분산형 플랫폼을 활성화시키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지난 10월 방한했던 케르스티 칼률라이드(Kersti Kalijulaid) 에스토니아 대통령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에스토니아의 저력은 정부가 ICT 기술의 활용에 적극적이라는 것에 있습니다. 대부분의 정부 서비스가 온라인으로 이용 가능하고, 모든 시민과 주민들에게 디지털 아이디가 발행됩니다. 에스토니아는 최초로 전자영주권을 발행한 곳으로도 명성이 자자하죠. ICT 중앙집중형이 잘 구비되어 있습니다.
재미있는건 블록체인에 대한 접근법입니다. 칼률라이드 대통령은 국회 사랑재에서 열린 글로벌 블록체인 정책 컨퍼런스 GBPC 2018(Global Blockchain Policy Conference)에서 암호화폐를 두고 "비트코인과 같은 암호화폐가 꼭 사용될 필요는 없다"는 회의적인 발언을 하면서도 분산형 플랫폼의 가치도 강조했습니다. 현실과 이상의 간격을 잘 잡았다고 생각하고요, 중앙집중형 플랫폼을 가졌음에도 분산권력의 가능성에 집중해 최선의 가치를 찾는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에스토니아처럼 하지 못할까?가 모든 질문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ICT 코리아를 외치던 김대중 정부 이후로 전자정부와 같은 강력한 중앙 플랫폼 전략을 끌어오고 있어요. 그런데 사실 이거 문제가 많습니다. 기득권 입장에서는 아주 간편하지만 생태계 하단의 플레이어들에게는 일종의 구속이거든요. 그런데 너무 강력하고 익숙하다보니 중앙집중형 플랫폼에서 나올 생각을 못하는 거에요. 분산형이 최선의 가치는 아니지만, 우리는 생각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겁니다. 에스토니아는, 지금 그걸 하고 있는 거고요.
카풀이요. 전체 교통을 중심으로 보겠습니다. 대중교통 시스템 강합니다. 강해서 우리는 그 강함을 따라갈 수 밖에 없어요. 신도시 선정의 주요 고려사항이 버스와 지하철 노선일 정도로, 땅값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는 대중교통의 강력한 중앙 플랫폼을 무작정 따라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카풀을 위시한 모빌리티가 발전한다면? 굳이 신도시를 수도권 중심으로 구축할 이유가 있나요? 위에서 정해준 선대로 도시를 계획할 필요가 있나요? 대중교통 노선, 택시 접근에 따라 신도시를 구축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생깁니다.
네. 저는 핀테크나 블록체인, 카풀 등이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잡음이 일어나는 이유는 기존 시스템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 잘 구축된 것이 아니라 강하게 구축되었다는 거에요. 잘 구축되면 모든 것이 문제가 없는것이지만 단순히 강하다는 것은 그 과정에서 다양한 가능성을 모두 묵살한다는 거죠. 그러다 보니 일부 불편함도 불꽃이 되지 못하고 꺾이고 공격을 받습니다. 좋은 것이 아니라 필요이상으로 강해서, 뻔지르르해서 속의 상처를 치료할 수 없는 상황. 저는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라고 봅니다.
ICT 기술도 뻔지르르하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핀테크나 블록체인, 카풀이 무지막지한 능력을 보여준다면 상황은 또 달라질겁니다. 모두에게 확신을 심어줄 정도로 믿음직한 존재감을 보여준다면 미래는 달라지죠. 그러나 이들도 그렇지는 못합니다. 이들 역시 아직은 뻔지르르함의 경계에 있습니다.
다만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핀테크나 블록체인, 카풀 자체는 혁신이 아니더라도 이들을 통해 구축되는 생태계는 또 다릅니다. 그러니까 기술이 아니라 그 기술로 펼쳐질 전혀 새로운 미래는 또 다른 이야기라는 거죠. 그러니까 결론은, ICT 업계가 이런 점을 강조해야 합니다. '우리 기술이 미래야'가 아니라 '우리 기술로 새롭게 바뀔 세상이 바로 미래야'로 말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