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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진홍 Nov 28. 2019

필리핀 트라이시클, 그랩에서 느낀 '퍼즐의 빈 조각'

매번 해외취재를 위해 인천공항에 들어서면 당연히 설렘의 감정보다 비장함의 감정이 요동칩니다. 여행객들은 현지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체험할까'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하겠지만, 일로 해외로 나가면 항상 '무언가를 건져와야 한다'는 강박감부터 시작됩니다. 덕분에 해외취재가 많아지면 건강을 크게 해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오랜만에 말 그대로 휴가를 위해 필리핀으로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트라이시클이라는 녀석을 처음 만나 봤습니다. 여행으로 해외에 나온 것은 10년이 넘은데다 해외취재는 정해진 동선 외에는 운신의 폭이 적기 때문에 남들 다 타봤다는 트라이시클을 이번에 처음 타 봤습니다. 거친 오토바이 엔진에 덜컹거리는 차체. 휙휙 선으로 그어져 옆으로 사라지는 거리의 풍경들. 그 체험의 연장선에서 느낀 감정을 풀어보겠습니다. 이는 공교롭게도, 제가 기자로써 취재하고 있는 모빌리티 플랫폼 전략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랩, 트라이시클, 지프니, 택시
저는 이번 필리핀 여행을 하며 기념품점이나 호핑체험장소로 이동할 때 보내주는 픽업트럭을 제외하고 총 4개의 이동수단을 경험했습니다. 제일 먼저 그랩입니다. 우버를 동남아시아 시장에서 밀어낸 그랩은 말 그대로 현지 모빌리티 플랫폼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나라에 따라 이동수단의 종류가 다르며, 저는 주로 그랩택시를 사용했습니다. 필리핀은 치안문제로 인해 외국인들이 머무는 호텔이나 리조트의 입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지만 그랩택시는 호텔이나 리조트 정문으로 바로 들어와 편리했습니다. 가격은 다소 높았지만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그랩택시가 아니라 일반 차량인 그랩카로 이동도 해봤는데, 현지 치안상황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오히려 더 안전하다는 느낌까지 받았습니다.


그랩택시로 안전하고 편리하게, 또 상대적으로 장거리를 이동했다면 트라이시클은 단거리를 이동할 때 주로 사용했습니다. 저는 리조트에서 그랩택시를 타고 대형 쇼핑몰로 나온 후 정거장에 대기하고 있던 트라이시클을 잡아 타고 다시 리조트로 들어왔는데, 그랩과는 또 다른 묘미가 있습니다. 일단 차체가 가볍고 심하게 흔들려서 떨어지면 그대로 뒤틀린 황천길로 가겠구나 싶었고, 또 그 나름의 짜릿한 묘미가 있습니다. 나아가 시간에 쫒기다 보면 그랩택시를 호출해도 늦을 때가 있는데, 트라이시클은 상대적으로 많은 곳을 운행하고 있어(지정된 장소 중심) 쉽게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가격이 저렴해서 기본요금이 8페소(약 185원)에 불과합니다. 같은 거리 기준 그랩택시는 10배인 80페소(약 1850원)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치안문제로 인해 차이시클은 호텔이나 리조트에 들어올 수 없지만 일종의 등록증(?) 같은 것이 있으면 가능합니다. 


지프니는 중장거리 이동을 할 때 주로 이용했습니다. 현지인들이 가득가득 차있는 상태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고, 소위 '도둑'들도 많아 긴장도 했으나 큰 무리는 없었습니다. 버스처럼 정류장 시스템을 따르면서도 딱히 정류장 위치가 100% 고정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가격은 저렴하고, 주요 관광지나 거점을 중심으로 운행하고 있었습니다. 정류장 역할을 하는 곳에는 한 남자가 나타나 승객들이 제대로 지프니에 탑승할 수 있도록 돕고 운전사로부터 소정의 돈을 받고 있더군요.


택시는 두 종류가 존재하는데, 그랩과 비슷한 수준으로 보면 됩니다. 여기에 제가 체험하지 못한 필리핀 이동수단에는 버스와 지상철, 그리고 UV 익스프레스가 있다고 합니다.

여담이지만 한 마디. 리조트에서 불러준 택시기사와 짧은 대화를 나눈적 있습니다. '그랩때문에 힘들지 않나?' 택시기사가 말합니다. "나도 하는데?"


다양한 도구와 다양한 수단
필리핀의 교통 시스템을 두고 선진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신호등이나 보행문화, 어지럽게 뒤섞인 동남아시아 특유의 오토바이 행렬을 보면 깜짝 놀랄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지프니의 경우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버리고 간 장비를 조립해 운행한것이 시초라고 하는데, 공해문제가 너무 심해서 두테르테 대통령은 친환경 신형 지프니 양산 계획을 밝히기도 했답니다. 트라이시클은 뭐...'만약 내가 필리핀에서 이동하다가 죽는다면 이걸 타다 죽겠구나' 싶을 정도로 자유분방함(?)을 자랑했습니다.


다만 4개의 현지 이동수단을 체험해보면서 한 가지 재미있는 생각은 했습니다. 어쩌면, 필리핀에서 확인되는 이러한 이동수단들이 최첨단 ICT 플랫폼인 모빌리티 전략의 '원형'이자 '지향점'이 아닐까.


지프니를 타고 리조트로 돌아오던 때 우연히 미국인 부부 관광객과 함께 했습니다. 어설픈 영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아임 프롬 코리아 앤유? 이런거) 남편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는 이번 필리핀 여행에서 이동수단을 결정하고 이를 재조합하는 일이 제일 재미있는 일 중 하나라는 것. 그러니까 리조트에서 관광지로 갈 때는 안전하게 그랩을, 관광지에서 쇼핑몰로 갈 때는 별로 멀지 않으니까 차이시클을 타고 쇼핑몰에서 자기가 점 찍어둔 해변으로 갈 때는 지프니를 타고 이동하는 것. 이 계획을 짜는 것이 재미있다는 겁니다.

특성이 명확한 다양한 이동수단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현지의 특수한 상황과 관광지라는 교집합이 만나며 벌어진 일이겠으나, 이러한 사용자 경험은 최첨단 ICT 모빌리티 플랫폼의 지향점과 명확하게 맞아 떨어집니다. 간단합니다. 모빌리티가 원래 이런 방법론 내부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지만, 우리가 말하는 모빌리티의 끝에는 단순히 자율주행차와 플라잉택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모빌리티 시대를 대중에게 잘 이해시키고 마케팅 차원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이벤트이자, 모빌리티 전략의 지향점을 위해 나아가는 '여정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진짜 모빌리티 전략은, 즉 지향점은 '이동의 모든 것을 자유자재로 제공하는 것'에 있습니다. A라는 지역에서 B라는 지역으로 이동할 때 하나의 플랫폼 내부에서 다양한 수단을 최적화된 알고리즘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A에서 출발할 때는 택시로 이동한 후 내려서 자동차가 다니기 어려운 언덕길은 스쿠터로 이동하고, 다시 대로변으로 나와 자전거로 B에 도착한다'는 이동의 사용자 경험이 모빌리티 전략의 처음과 끝, 알파와 오메가인 셈입니다. 여기에 시간대에 따라, 날자에 따라 이동수단이 바뀌고 때로는 플라잉택시가 제공되는 것이 모든 모빌리티의 지향점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버가 카풀도 하고 택시와도 손을 잡으며 자율주행차나 플라잉택시를 준비하는 이유입니다. 수잔 앤더슨(Susan Anderson) 우버 호주·뉴질랜드 및 북아시아 총괄과의 인터뷰에서 그가 "우버는 이동하는 모든 것의 플랫폼을 지향한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이러한 모빌리티의 최종 지향점은 '특성이 명확한 다양한 이동수단'을 전제해야 합니다. 즉 모빌리티의 최종 지향점인 '이동하는 모든 것을 자유자재로 제공하는 것'이 가능하려면 특성에 맞는, 아주 많은 이동수단들이 계속 나와줘야 합니다. 단거리에는 트라이시클, 중장거리는 지프니, 안전하고 쾌적함은 그랩처럼 말입니다. 


다양성은 시장의 진리다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여객운수법) 개정안을 두고 말이 많습니다. 휴가지에 있어서 뒤늦게 알았지만, 쏘카 VCNC가 입장문을 발표하고 이재웅 쏘카 대표가 페이스북을 통해 포문을 열었더군요. 또 개정안 대표발의자인 박홍근 의원도 반박했고요.


많은 법적인 고려와 모빌리티 시장의 건전함을 위한 시도가 벌어져야 하는 가운데, 필리핀에서 다양한 이동수단을 경험한 제 생각을 말해볼까 합니다. 다 필요없고, 다양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지금 한국의 모빌리티 시장은 말 그대로 택시와의 상생이라는 프레임에만 갇혀 있습니다. 물론 중요합니다. 함께 가야죠. 그런데 무조건 함께 가기만 하면 어떻합니까. 함께 가기도 하고, 다른 섹터에서는 또 다른 실험을 하면서 다양성을 키워야죠. 저는 제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다들 알고있는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니까.


다양하게. 다양하게 갑시다. 가보지 못한 길을 가면서, 왜 이렇게 스스로 한계를 설정하지 못해 안달이 났는지. 붉은깃발을 든 사람과 자동차가 함께가는 것도 좋고, 자동차만 가는 것도 만들자고요. 지긍 당장 우리가 지프니와 트라이시클을 운영할 필요는 없지만...그 수준으로 다양한 이동수단을 만들어 봅시다. 다양한 이동수단을 만들면 그 자체로 모빌리티의 지향점과도 겹쳐지기에 용의합니다.


지금처럼 택시와 협력하는 하나의 모빌리티 플랫폼만 고집하면, 우리는 그냥 택시기사가 모는 비싼 승합택시가 모빌리티의 모든 것인줄 알고 살겁니다. 물론 카카오는 대구에서 새로운 실험도 하고, 너무자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VCNC가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그러냐..고 말할 수 있지만. 네, 저는 그저 다양성의 가치만 지키자는 것이고 VCNC가 대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최소한. 택시업계와 협력하지 않는 다양한 모델도 공존하게 하자는 겁니다. 이걸 바탕으로 VCNC가 또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를 기다리자고요. 그렇게 경쟁시키자고요.  최소한 VCNC에게도 기회를 주고, 또 무슨 끼를 부리나..택시업계와 만나지 않은 VCNC는 무슨 모습을 보여주나 한번 지켜보자고요. 한번 성공했잖습니까. 지금 카카오와 택시업계가 만나 고민하는 첫 모델이 11인승 승합차 모델이고. 그걸 누가 제일 먼저 시작했는지 까먹었나요?


일각에서는 VCNC의 불법적인 운행때문에 택시업계가 피해를 보고, 친절한 드라이버 제공과 수요공급 매칭이 무슨 혁신이냐 비웃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그런데. 택시업계가 VCNC 때문에 피해를 본다는 데이터는 없습니다. 반대의 데이터는 있고요. 나아가 혁신이라는건. 사견이지만 전 화학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세상을 호령하는 엄청난 혁신만 혁신이 아니라, 실상 이런 것은 없다고 보고요. 사실 혁신이라는 것은 잔잔한 호수에 떨어진 물방울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작은 물방울 하나지만, 잔잔히 연쇄적인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것. 


수요와 공급을 연결하는 모든 온디맨드 플랫폼은 그 자체로 혁신입니다. 그 파급력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말이죠. 따지고 보면 클라우드도 데이터를 빠르게 모아서 저장해주는 것 뿐인데 무슨 혁신이겠습니까. 왜. 기술이 복잡하고 어려워서? 데이터센터 만드는데 돈 많이 들어서 혁신입니까? 

가끔 사람들은 '왠지 나도 할 수 있는 것 같은 일'이면 아무리 화학적인 연쇄반응이 가능해도 혁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내가 구입할 수 없는 자본력과 조직이 뭔가를 하는 것만 혁신이라고 생각하는듯..그건 아닙니다. 이런걸로 딴지거는 사람들은 제가 볼 때 그냥 배가 아픈 겁니다. '아. 나도 할 수 있는데. 이걸 먼저해서 사업을 잘하고 있네? 아 배아파. 몰라몰라 저거 혁신 아냐. 저딴게 무슨 혁신이야?' 온디맨드 노동 경직성에 대한 논의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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