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에 대한 분석
나는 상대의 화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미안하단 말을 쓴다. 관계가 악화될까 봐 두렵다. (이 기저에는 상대에게 미움받기 싫어하는 나의 욕구가 있다. 이건 다음에 다룰까 한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은 미안하단 말에도 경중이 다르고, 진심이 담기지 않은 사과는 장기적으로 관계를 악화시킨다는 걸 말하기 위함이다.
갈등도 사소한 다툼에서 사생결단을 내야 할 갈등이 있다. 갈등에 무게가 있다고 표현해보자. 사소한 다툼은 가볍고 사생결단의 상황은 무겁다. 갈등에도 무게가 있듯이 갈등을 다루는 사과에도 무게가 있다. 관계를 시소에 비유해보자. 갈등이 없다면 평행을 이룬다. 갈등이 있는 관계는 한곳으로 기울어진 시소와 같다. 시소가 다시 평행하려면 한쪽의 무게만큼 무거운 물체를 놓아야 한다. 즉, 그 무게를 감당하기 위한 미안함도 갈등의 크기만큼 무거워야 한다.
가벼운 미안함을 반복한다고 시소가 평행을 이루긴 어렵다. 작은 갈등이라도 이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면 어떻게 될까? 작은 갈등도 겹겹이 쌓이면 시소는 폭삭 주저 앉는다. 그때는 더 진심 어린 사과가 필요하다.
관계는 작은 불씨도 조심하잔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갈등이란 불씨를 초기에 잠재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진심 어린 사과가 필요하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진심으로 미안하단 말은 4가지 공감 단계 중 3~4번째의 공감 실천했을 경우에 나온다.
1 단계 : 상대의 생각이 다르단 걸 알아차린다. 그저 듣고 관찰하는 단계
2 단계 : 상대의 감정을 알아차린다. 상대가 감정을 느꼈을 수도 있겠다. 가능성을 인정하는 단계
3 단계 : 상대의 감정 너머에 있는 욕구를 알아차린다. 상대가 그렇게 행동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아는 단계
4 단계 : 말이나 행동이 필요 없다. 진심으로 와닿고 이해가 돼 그저 눈물이 나온다.
나의 경우 대부분 2단계에서 미안하단 말이 나온다.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가령 직장에서 같은 업무를 처리하다 갈등이 생겼다고 하자. 구체적인 상황을 설정해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업무가 가중되었고, 이전 업무에 대한 시간 엄수를 하지 못하였다. 동료는 시간을 엄수하지 못한 상황에 대해 화가 났다.
갈등 상황을 해결하려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공감의 소통이 필요하다. 1단계에서 4단계까지 어떻게 공감이 진행될 수 있을까?
1단계에서 상대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어떤 감정이었는지 우선 듣고 관찰한다.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한다. 이럴 경우 나온 공감은 "아 그랬구나" 정도이다.
2단계에서 상대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알아차린다. 한 번 상대의 입장이 돼본다. 상대가 느낀 감정을 한 번 경험해보는 거다. '아 이런 상황에서 저런 감정을 느낄만하다. 나라도 서운할 수 있다.'하고 가능성을 인정한다. 잠시 맹자의 사상을 살펴보자. 맹자가 말한 측은지심은 본래 선한 인간의 4가지 본성 중 하나다.
측은지심(惻隱之心) :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애처롭게 여기는 마음을 뜻한다.
- 맹자
2단계에서 측은지심이 발휘될 수 있다. 상대의 감정이 그러하다면 애처롭게 느껴진다. 하지만 아직 상대를 진심으로 이해한 건 아니다. 내가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측은지심'이 발휘돼서다. 상대와의 심리적인 거리가 있다. 멀리서 바라보고 미안하다고 하는 느낌이랄까.
3단계는 '이심전심'의 마음으로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는 단계다. 상대의 마음에 보다 가까이 다가간다.
3단계를 실천하는 상황에는 2가지 경우가 있다. 우선, 상대가 느꼈던 감정이나 생각을 직접 경험해본 사항이다. 비슷한 상황이나 경험을 자주 접해 왔던 것일 수 있다. 그런 입장을 직접 경험해봤기에 저절로 상대의 마음이 될 수 있다.
두 번째론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상상으로서 그 입장을 경험해보는 것이다. 평소 상대 입장에서 생각하는 게 습관이 된 사람이라면 이게 찰나의 순간에 이루어진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내가 상대라고 가정하고, 상상 속에서 갈등 상황을 여러 번 되풀이해봐야 한다.
3 단계에선 상대의 감정에 담긴 욕구를 이해한다. "아, 상대가 왜 화를 냈는지 알겠어. 더 존중받고 싶었구나" 진심으로 이해하기에 이 단계에서 이루어진 사과는 보다 진심 어린 사과다.
4단계는 '이심전심'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상대의 마음, 나의 마음. 따로 분리할 게 없다. 상대의 마음이 곧 내 마음이다. 너무나 절절히 상대의 생각이나 감정들이 느껴진다. 고스란히 다가온다. 절로 눈물이 나온다.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들어 진심어린 사과를 하게 된다.
3단계, 4단계 공감에 이른 뒤 사과를 해야 서로 응어리진 게 없다.
2단계 공감에서의 사과는 마음속에 응어리를 남긴다.
우선, 상대 입장에서 그렇다. 진심으로 공감받지 않았는데 사과를 받았다. 이건 사과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상대의 잘못이 눈에 밟히고, 아직 용서할 수 없다.
둘째로 나의 입장에서도 그렇다. 상대의 마음이 돼보지 않았기에 상대를 이해할 수 없다. 그저 측은지심을 느꼈기에 사과한 것이다. 진심으로 미안한 게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사과한 걸 후회할 수 있다.
내가 자주 그랬다. 미안하단 말을 쉽게 하고, 시간이 지나거나 돌아서면 왜 그랬을까 하고 후회했다.
이런 사과는 불을 끄기 위해 우선 부채질하는 것과 같다. 갈등은 쌓이고 결국엔 터진다.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갈등은 관계의 끝을 불러온다.
공감이 없는 미안함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미안하단 말을 하기에 앞서 물어보자. 얼마나 상대를 공감하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