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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정 May 07. 2024

오귀스트 로댕-다나이드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다나이드>, 로댕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단편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대천사 미카엘에게 숙제를 내주는 하느님의 입을 빌려 묻는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냐고. 갓 쌍둥이를 낳은 여인의 영혼을 빼앗아 오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어긴 죄로 벌거벗겨진 채 들판에 버려진 대천사 미카엘은 질문에 대한 답만 찾으면 하늘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구둣방 주인 세묜과 함께 인간 틈바구니에서 살아간다.      


다소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소설이라 내용 자체와 결말에 대한 호불호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톨스토이는 인간 세계에 불시착한 대천사의 시선으로 인간의 삶을 묘사하며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는다. 주변 사람들을 눈여겨보며 6년의 세월을 견딘 미카엘이 찾아낸 정답은 ‘사랑’이었다. 미카엘은 하늘로 돌아가기 전에 모든 사람은 자신에 대한 걱정이 아닌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진리를 설파한다.     


인간은 사랑으로 산다는 톨스토이의 말은 옳다. 물론 여기에서 톨스토이가 말하는 사랑은 온 우주를 준대도 단둘만을 위한 작은 성과 바꾸지 않겠다는 의지와 열망을 들끓게 하는 에로스적인 사랑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길에 버려진 부랑자에게 손을 내밀고 부모를 잃고 홀로 남은 젖먹이의 엄마가 돼주는 식의 좀 더 넓고, 포용적이며, 인류애적인 사랑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이 톨스토이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일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톨스토이는 옳다.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 자식을 향한 맹목적인 사랑이, 부모를 향한 한없는 존경심이, 이웃을 향한 따뜻한 관심이, 먼 나라에서 발생한 자연재해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저금통을 허무는 친절한 손길이 이 세상을 좀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든다. 하지만 사랑은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아니다.      


영원히 반복되는 형벌

<다나이드(Danaid)>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장식미술 박물관(Musée des Arts Décoratifs) 입구를 조각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로댕이 7.75미터에 달하는 청동 조각 <지옥의 문(Porte de l'Enfer)>을 위해 구상했던 작품이다. 처절한 고통에 몸부림치는 여체의 형태를 띤 대리석 조각의 주인공 다나이드는 남편을 살해했다는 이유로 밑 빠진 항아리에 영원히 물을 길어다 붓는 형벌을 받게 된 그리스 신화 속 인물이다.     


사위의 손에 목숨을 잃게 된다는 신탁을 받고 사위들을 모조리 살해하기로 결심한 아버지의 명을 따라 남편을 찌른 49명의 다나이드(아르고스 왕국 다나오스 왕의 딸들)는 지하세계 하데스보다도 더 어둡고 음침한 처벌의 공간인 타르타로스로 떨어져 영원히 끝나지 않는 벌을 받는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아버지의 처절한 투쟁기인지 비록 아버지를 살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더라도 사람을 죽이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훈계인지 알 수 없는 이 이야기 속에 승자는 없다. 


<다나이드>, 존 워터하우스


생존을 위해 살인을 교사한 다나오스는 살아남은 사위의 손에 목숨을 잃고, 직접 남편을 죽인 49명의 다나이드는 영원한 형벌이라는 족쇄에 묶인 채 아무리 애를 써도 끝끝내 채워지지 않을 항아리를 물로 채우는 데 영겁의 세월을 쏟아붓게 된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명을 어기고 남편을 살려준 단 한 명의 딸, 히페름네스트라는 어떤 결말을 맞이했을까? 히페름네스트라는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죄로 감옥에 갇히지만 아프로디테의 변론 덕에 무죄 판결을 받는다. 하지만 남편이 아버지와 49명의 동생을 모조리 도륙하는 생지옥을 견뎌야 했던 히페름네스트라의 일생이 행복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정말 인간은 무엇으로 살까?

물을 길어 나르는 일은 그 자체로도 고되다. 허리를 깊이 숙여 몇 킬로는 족히 될법한 무거운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운 다음 어깨에 짊어지고 한참을 이동해 커다란 독에 그 물을 쏟아붓는 행위 자체가 고통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로댕이 조각한 <다나이드>의 아름다운 여체가 팽팽하게 올라선 근육과 물결처럼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통해 고뇌와 고통을 온몸으로 표출하고 19세기 영국 화가 존 워터하우스가 그린 <다나이드> 속 여인들이 하나같이 체념한 듯한 얼굴을 하는 것은 비단 고된 노동 때문만은 아니다.      


이들에게서 피할 길 없는 처절한 절망의 기운이 배어 나오는 이유는 사랑이 아닌 희망의 부재 때문이다. 영원토록 구멍 난 독에 물을 붓는 행위에서는 그 어떤 희망도 찾을 수 없다. 손이 짓무르고 발이 아프도록 같은 길을 수없이 오가며 물을 갖다 부어도 단 하나의 독도 채울 수 없다. 하나의 독이 채워져서 그 독이 다른 누군가를 위한 마실 물이 되리라는 희망도, 언젠가 정해진 개수의 독을 채우면 형기를 모두 채워 타르타로스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없다. 무언가에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는 생산적이고 보람 있는 일이 아니라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저 힘들기만 한 일을 어떤 기대나 희망도 없이 끝을 알 수 없는 영겁의 세월 동안 견뎌내는 것 자체가 형벌이기 때문이다.      


제우스의 분노를 사 영원히 멈추지 않는 수레바퀴에 매달린 익시온.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며 하루치 고통을 견디는 나날을 무한히 견뎌야 하는 프로메테우스. 그리고, 영원히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워야 하는 다나이드. 그들은 모두 누군가를 사랑했다. 익시온은 헤라를 흠모했고,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위해 불을 훔쳤고, 다나이드는 아버지를 사랑했다. 인간이 사랑만으로 산다면(물론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지만), 사랑에 대한 대가로 영원히 반복되는 벌을 받게 되었더라도 이들의 삶은 모두 그럭저럭 살만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 어떤 표정도 없이 그저 주어진 고통을 묵묵히 견뎌내는 그들의 암울한 나날에는 희망의 씨앗이 날아들 틈이 없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철학 에세이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에서 언덕 위로 끝없이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은 시시포스에게 허락된 최선의 반항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삶을 자각하고 자유 의지로 끝까지 이어나감으로써 행복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자유 의지를 갖고 끝까지 삶을 이어나간들 매일 물을 긷고, 바위를 밀어 올리고, 독수리의 공격을 견뎌내야 할 뿐 아니라 어떤 일이 있어도 수레바퀴에 매달린 신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의미를 찾고 조금이나마 더 나은 방법을 찾아내겠다고 다짐하고 노력하면 어떤 질문도 없이 세상이 내게 요구하는 규칙에 그저 순응하고 고통을 견디기만 할 때는 보이지 않았던 희망의 끈이 어렴풋이 눈에 띄기도 한다.      


피비린내 나는 혈육의 전투를 딛고 아들 아바스가 아르고스 왕국의 왕이 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히페름네스트라의 삶이 그저 행복으로 가득한 나날은 아니었을 거다. 하지만 자신이 살려준 남편 린케우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며 히페름네스트라는 앞으로 다가올 날들에 대한 가느다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아차 하면 끊어지고 말 그 끈을 조심스럽고 끈질기게 붙들고 있었던 덕에 그녀의 삶이 타르타로스에 갇혀 영원의 형벌을 견뎌내는 자매들의 삶보다는 조금이나마 행복했을 것 같다.      


로댕의 제자이자 연인이었던 카메유 클로델이 <다나이드>의 모델이 되었다는 것은 정설이고, 대리석을 유리처럼 매끄럽게 조각한 기교에 미뤄볼 때 <다나이드>를 그녀가 직접 조각했다는 것은 일각의 주장이다. 정설과 주장 사이에는 메워지지 않는 간극이 있지만 어떤 식으로든 당시 솜씨가 뛰어난 제자였던 클로델의 손길이 <다나이드>에 담기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남편을 살해한 죄목으로 타르타로스에 갇힌 다나이드처럼 로댕과 결별한 후 세간의 손가락질과 궁핍한 삶, 와해된 가족이라는 절망의 파도를 넘지 못한 채 정신병원에 갇혀 남은 생을 보낸 클로델. 어쩌면 히페름네스트라가 그랬던 것처럼 클로델에게도 절망의 틈바구니 밖으로 삐죽 빠져나온 희망의 끈을 발견하고 그 끈을 붙들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면 좀 더 일찍 천재성을 인정받고 현대 미술계가 보내는 것과 같은 갈채 소리를 들으며 편히 잠들 수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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