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iko Ikemura: Light on the Horizon
노잼 도시 대전을 유잼 도시로 만들어줄 또 하나의 숨겨진 보물이 있다. 그 보물은 다름 아닌 1919년 3월 16일에 대전 최초의 독립만세 운동이 시작된 곳인 인동에 자리 잡은 미술관 헤레디움(Heredium)이다.
헤레디움.
입에도 착 감기고 신비롭고 매력적인 미술관의 이미지도 잘 담아낸 헤레디움이라는 단어는 '유산으로 물려받은 토지'라는 뜻의 라틴어다. 헤레디움이 '유산'이라는 의미가 담긴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고 근대문화유산의 흔적 속에서 미래유산을 만들어나가겠다는 포부를 밝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주변의 밋밋한 콘크리트 건물들과는 사뭇 다르게 생긴 이 건물은 1922년에 일본 건축가 오쿠라구미(大倉組)가 설계한 것으로,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서양 고전 건축기법과 일본 건축기법이 뒤섞인 절충주의 건축양식을 띤다. 헤레디움 건물은 영화 <변호인>, 드라마 <라이프온마스> 등 다양한 작품의 촬영지로 잘 알려진 옛 충남도청(1932, 등록문화재 제18호) 건물과 함께 대전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근대건축물 중 하나로 꼽힌다.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수탈기관이었던 동양척식회사 대전지점(1922, 등록문화재 제98호)은 역사와 문화가 담긴 낡은 건축물을 복원하고 재건해 미래 가치를 부여하는 재생 건축 프로젝트를 통해 문화와 예술로 사람들의 상처 입은 마음을 끌어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났다.
레이코 이케무라: 수평선 위의 빛
한반도에 사는 조선인을 착취할 목적으로 대영제국의 동인도회사를 본떠서 만든 동양척식회사. '국외의 영토나 미개지를 개척하여 자국민의 이주와 정착을 촉진한다'라는 뜻을 가진 '척식(拓殖)'이라는 단어를 대놓고 회사 이름에 집어넣은 마당이니 동양척식회사는 한반도 곳곳에 설립한 지점을 통해 거리낄 것 없이 한반도를 수탈했다. 1926년 12월 28일에 독립운동가 나석주 의사가 동양척식회사 경성 지사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에 미뤄보면 당시 우리 선조들의 삶을 처절하게 짓밟았던 동양척식회사가 미움과 증오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복원과 재건 과정을 거쳐 미래를 향한 비전을 제시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났다고는 하지만 한때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탄과 고통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던 옛 동양척식회사 건물과 일본계 작가의 전시회라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고개를 갸우뚱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기존의 시설물을 철거하고 옛 형태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동양척식회사 내부 계단을 보존해 방문객들에게 역사의 흔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유리 통로를 지나 전시관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이런 의구심은 사라졌다.
일본에서 태어나 스페인에서 공부한 후 스위스 국적을 취득하고 현재는 독일에서 거주하는 삶의 궤적에서 눈치챌 수 있듯 레이코 이케무라는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의 통합을 추구하는 작가다. 뿐만 아니라, 애니미즘을 신봉하며 인간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닌 인간과 자연이 하나 되는 세상을 꿈꾼다.
슬픈 역사를 감추기보다 방문객들이 우리가 딛고 서야 할 역사의 무게를 제대로 느낄 수 있도록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구조물이었던 내부 계단을 그대로 보존하고 공개하는 헤레디움의 정신과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지배하기보다 모두가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는 그녀의 예술 철학은 지나간 시간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유리 통로 위에서 절묘한 조화를 이뤘다.
역사의 무게를 느끼며 전시관에 들어서면 레이코 이케무라가 전하는 위로의 메시지가 들려온다. <토끼 관음상(Usagi Kannon)>은 동일본 대지진 발생 이후 귀가 없는 토끼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망가져 가는 지구 생태계에 대한 염려와 애도의 마음을 담아 만든 3.4미터 높이의 청동 작품이다. <토끼 관음상>은 동서양의 화합, 자연과 인간이 하나 되는 삶, 치유와 포용이라는 작가의 철학이 모두 담긴 작품이기도 하다.
사라져 버린 토끼의 귀를 달고 눈물을 흘리는 인간의 얼굴을 한 토끼 관음상. 서양의 종교를 대표하는 성모 마리아처럼 가슴 앞에 양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토끼 관음상은 자비로 중생을 구제하는 관음보살을 상징하는 풍성한 치마를 입고 있다. 자신의 망토 아래로 세례자 요한을 피난시키듯 감싸는 성모 마리아처럼 <토끼 관음상>은 풍성한 치마를 열어젖혀 치유가 필요한 존재를 얼마든지 감싸 안는다. 포용과 화합의 정신을 보여주듯 놀랍게도 누구든 신발을 벗고 직접 들어가 볼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진 <토끼 관음상>의 치마 속에 발을 들여놓으니 무수히 많은 구멍을 통해 마치 별이 쏟아지듯 빛이 쏟아져 내렸다. 포근한 치마폭으로 흘러 들어온 따뜻한 빛은 그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떨고 있는 모든 존재를 '괜찮다, 괜찮아'하며 부드럽게 토닥여준다.
<수평선 위의 빛>이라는 전시 제목에 걸맞게 빛이 주는 효과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조명을 어둡게 낮춰 놓은 2층 전시실에서 유독 눈에 띄는 작품이 하나 있었다. 수평선에 빛이 내려앉는 순간을 황마 위에 담아낸 그녀의 여러 서정적인 작품을 배경으로 한 여인이 바닥에 모로 누워 있다.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라는 뜻의 라틴어 '메멘토 모리.' 고대 로마에서는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개선장군이 시가를 행진할 때 노예들이 그 뒤를 따르며 '메멘토 모리'를 외쳤다고 한다. 오늘은 승리했지만 인간은 누구나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갖고 태어났으니 항상 겸손하게 살아야 함을 일깨워주기 위한 풍습이었다.
여자는 얼핏 보면 아무 일 없이 고요히 잠에 빠진 사람처럼 보인다. 작가는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잊고 사는 모든 사람을 각성시키기보다 그 앞에 멈춰 서서 생각하고 들여다볼 정도의 관심을 보이는 사람에게만 만고불변의 진리를 일깨워줄 작정인 건지도 모른다. 한 발 다가가 가만히 누운 여자의 눈을 들여다보면 산 사람의 그것이 아닌 듯 텅 비어 있다. 움푹 파인 눈을 하고 미동도 없이 가만히 바닥에 누운 여자는 관람객들에게 '봐라, 내가 이렇게 죽었듯이 너도 언젠가 죽는다'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보낸다.
1. 제니 홀저(Jenny Holzer)
헤레디움 주차장에서 전시관으로 가는 길목에 미국의 개념주의 예술가 제니 홀저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텍스트를 통한 의미 전달 방식을 좋아하는 홀저는 대리석 벤치에 유심히 눈여겨봐야만 찾아낼 수 있는 긴 텍스트를 새겨 넣었다.
I walk in
I see you
I watch you
I scan you
I wait for you
I tickle you
I tease you
I search you
I breathe you
I talk
I smile
I touch your hair
You are the one
You are the one who did this to me
You are my own
I show you
I feel you
I ask you
I don’t ask
I don’t wait
I won’t ask you
I can tell you
I lie
I am crying hard
There was blood
No one told me
No one knew
My mother knows
I forget your name
2. 미술관 내의 작은 미술관
헤레디움 안에는 작은 미술관이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훌륭한 카페가 있다. 공간 구성도, 커피맛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카페 안에 걸린 레이코 이케무라의 두 작품이 카페를 더욱 빛나게 했다. 전시관 2층에 걸린 <Dude>와 이름이 같은 <Dude>라는 작품이 특히 눈에 띄었던 카페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니 커다란 통창 그 자체가 하나의 액자가 돼 평범한 바깥 풍경을 사각 프레임이 둘러싸인 그럴듯한 풍경으로 만들어냈다.
3. 화장실도 미술관
화장실마저도 평범하게 내버려 둘 수 없는 미술관 운영자들의 애정과 고뇌가 담긴 빨간 휴지. 화려함과 고급스러움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이보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화장실이야 지천에 널려 있지만 사람들의 미적 감각을 한껏 북돋우고 싶어 하는 미술관 운영자들의 남다른 고민이 담긴 듯한 빨간 휴지를 보니 쿡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