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잼 도시 대전에는 당신을 설레게 할 숨겨진 보물이 있다.
'대전의 보물'이라는 단어를 듣고 성심당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심당이야 오직 대전이라는 단 하나의 도시에서만 매장을 운영하는데도 전국구 초대형 프랜차이즈 업체인 파리바게트와 뚜레쥬르와의 경쟁에서 밀리기는커녕 프랜차이즈 빵집의 적당히 먹을만한 상상력 없는 빵에 질린 전국 각지의 사람들을 대전으로 끌어모으는 마력을 뿜어내고 있다. 성심당이 제빵업계의 명실상부한 대기업인 파리바게트와 뚜레쥬르의 영업이익을 넘어섰다는 뉴스가 터져 나온 마당이니 성심당은 그야말로 반박 불가인 대전의 공식적인 보물이다.
그렇다면, 혹자는 알지언정 많은 사람이 놓치고 있는 노잼 도시 대전의 숨겨진 보물은 무엇일까?
정답은 바로 대전 이응노 미술관이다.
미술에 관심 좀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응노 화백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대전에 있다. 동양과 서양의 미를 결합해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했지만 1967년에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고암(顧庵, 顧菴) 이응노(李應魯) 화백의 삶과 예술을 조명하기 위해 설립된 이응노 미술관은 원래 서울 평창동에서 문을 열었지만 2007년 5월에 대전에서 다시 개관했다.
이응노 화백이 파리에서 작품 활동을 했던 30년의 세월을 그가 살았던 지역을 중심으로 아스니에르-구르넬-세브르 시대(Asniéres-Grenelle-Sévre, 1959~1967), 퐁트네 오 호즈-파스퇴르 시대(Fontenauy aux Roses-Pasteur, 1969~1981), 악소-프레 생 지르베 시대(Haxo-Pré saint Gervair, 1981~1989) 등 총 3개의 시대로 분류해 작품을 보여주는 전시회 <이응노, 파리에 가다>에는 기대 이상으로 많은 작품이 전시돼 있었다. 한국화단의 거목으로 인정받는 이응노 화백의 작품은 거장의 혼을 뿜어내며 관람객을 압도했다.
이응노 미술관은 넓디넓은 한밭수목원이라는 푸르른 병풍 앞에 펼쳐진 광활한 문화 공간 안에 자리한 대전예술의전당, 대전시립미술관, 엑스포광장, 대전시연정국악원, 평송청소년문화센터 등 여러 건축물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화려한 외관을 자랑하는 예술의 전당과 시립미술관에 비해 다소 덩치가 작은 탓에 그 존재를 알고 찾아온 사람들 외에 공원을 찾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끌어당기지는 못한다. 하지만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 로랑 보두앵(Laurent Beaudouin)이 이응노 화백의 작품 <수(壽)>에 내재된 '조형적 구조'에서 영감을 받아서 설계한 이응노 미술관 건물은 이미 그 자체로도 하나의 완벽한 예술품이다.
노잼 도시 대전의 넓은 문화 공간 안에 숨겨진 이응노미술관 안에는 또 다른 보물이 하나 더 감춰져 있었다. 커다란 나무 인형을 반으로 갈라서 열면 그 속에 숨어 있던 또 하나의 인형이 나타나고, 그 인형을 또 반으로 가르면 그것보다 좀 더 작은 인형이 나타나는 러시아의 목제 인형 마트료시카를 연상케 하는 또 다른 보물은 다름 아닌 이동욱 작가의 그림이었다.
대전 이응노미술관에서 현재 진행 중인 기획전 <Together-세상과 함께 산다는 것>에는 모두 네 작가의 작품이 전시돼 있었다. 네 작가의 작품은 모두 각기 다른 매력을 뽐내며 차례차례 나를 손짓하며 불러 세웠지만 가장 매력적인 작가는 단연코 이동욱이었다.
'풍선 작가'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 모든 작품에 풍선을 그려 넣는 이동욱 작가는 2007년에 공황장애로 시공간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고통을 겪던 중 깜깜한 어둠을 뚫고 빨간 풍선이 하늘 위로 두둥실 떠 오르는 환각을 보고 나서 풍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다양한 색깔의 풍선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 그의 그림은 달콤하고 황홀했다.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동시에 무서워하는 파란색을 이용해 가장 좋아하지만 두려워하는 공간인 바다를 그려내고 돌고래라는 매개체를 이용해 마음속의 모순을 풀어낸 그림 <블루, 그리고 다시 블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로 떠오르겠다'라는 작가의 굳은 의지를 보여줬다. 그런 빨간 풍선을 응원이라도 하듯 뒤집힌 세상 속에서 바다 밑에 깔린 하늘을 박차고 올라 수면을 향해 돌진하는 돌고래는 희망의 메시지를 던진다.
달콤하지만 뒷맛은 왠지 씁쓸한 불량 식품 맛이 날 것 같은 <홈, 스윗홈>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직면한 이룰 수 없는 '스윗홈'을 향한 꿈을 화폭에 담고 있다. 이 그림에는 성수동을 덮친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낙후됐던 구도심이 다시 활성화돼 중산층 이상의 계층이 유입된 탓에 기존에 그곳에서 살아왔던 원주민이 쫓겨나는 현상)에 떠밀려 하남으로 떠났지만 그곳에서 다시 치솟는 집값과 금리 때문에 어려움에 부닥친 자신의 상황과 개개인을 넘어서 전인류를 불안케 하는 위협 요인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AI가 그려낸 스윗홈의 뒤쪽에는 마치 연극 무대가 열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커튼이 쳐져 있고 내 집 장만이라는 헛된 꿈을 고스란히 그려내는 한 편의 연극이 펼쳐지는 무대를 구성하는 마룻바닥은 곳곳이 부서져 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앞마당 아래를 유심히 살펴보면 언제 내쫓길지 몰라 숨죽이며 두 눈만 반짝이고 있는 생쥐 한 마리가 보인다.
작가가 꿈꾸는 스윗홈 위에는 다양한 색깔로 칠해진 거대한 풍선 더미가 둥실 떠 있다. 디즈니 영화 <업>의 포스터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지만 집 한 채쯤은 우주까지 끌고 올라가고도 남을 만큼 거대한 <홈, 스윗홈>의 풍선 더미에는 영화 <업>의 풍선과는 전혀 다른 의미가 담겨 있었다. 손으로 쿡 누르면 두껍게 칠해진 물감의 말캉말캉한 질감이 그대로 느껴질 것 같은 어두운 하늘을 가득 채운 화려한 풍선은 내 집 장만을 꿈꾸는 사람들이 겪는 갖은 어려움을 한데 모은들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위협, 전 인류의 생존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지도 모를 핵폭탄의 위협을 상징했다. 풍선껌처럼 예쁜 색깔들이 알록달록 붙어 있는 풍선들을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면 핵폭탄이 터질 때 나타나는 버섯구름의 모양이 보인다.
위로의 풍선
그의 화려한 풍선들이 전시된 그 공간 한 귀퉁이에는 유심히 보지 않고 생각 없이 쓱 지나가면 흩어져버리고 말 그림 두 점이 걸려 있었다. 다른 그림들보다 크기도 작고 그림에 담긴 풍선의 개수도 턱없이 모자란 데다 이 두 그림은 제목마저도 기이했다. <도틀굴>과 <도엣궤>. 한글로 쓰여 있을 뿐 병기된 다른 언어가 없으니 한국어인 게 틀림없었지만 의미는커녕 내가 제대로 글자를 읽고 있는 건지 확신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당황스러운 단어였다.
찬란한 슬픔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 만큼 색감은 화사한데 왠지 모를 슬픔이 느껴졌던 이 두 작품은 제주 4.3 사건과 관련된 것이었다. 두 그림의 중간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뭇잎과 꽃이 뒤덮이지 않은 텅 빈 공간에서 밖으로 빠져나온 풍선들이 하늘 위로 솟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동욱 작가는 4.3 사건 당시 입구는 좁지만 내부 공간은 제법 넓은 땅굴에 모여 숨어 살다가 결국 토벌 작전에 희생당했던 제주도민의 넋을 기리기 위해 직접 제주도를 찾아 도틀굴과 도엣궤를 방문한 후 이 그림을 그렸다.
문자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던 이응노 화백과 풍선에 메시지를 담은 이동욱 작가의 작품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함께 관람객을 부르는 그곳, 이응노 미술관이 노잼 도시 대전의 숨겨진 보물에서, 누구나 다 아는, 성심당 종이가방을 들고 누구나 한 번쯤 들렀다 가는 이름난 보물이 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이 글에 담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