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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정 Jul 21. 2024

로망은 현실이 된다

같은 그림, 두 번째 에세이(칼 라르손, 바느질하는 여자)

바느질하는 여자(Sewing Girl), 칼 라르손, 1911

마당 있는 집

마당 있는 이층집은 나의 오랜 로망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 주택에 살긴 했지만 그때의 기억은 희미한 조각으로 드문드문 남아있을 뿐이다. 2년간 캐나다에서 살게 됐을 때 남편과 나는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주택을 택했다. 한국의 아파트에 살면서 딱히 불편한 건 없었다. 그래도 “집에서는 뛰면 안 돼” 같은 훈계를 늘어놓을 필요가 없고 문만 열면 마당이 나오는 주택에서 아이를 키워보고 싶었다.      


캐나다에서 우리의 첫 번째 보금자리가 돼준 오타와의 타운하우스는 꽤 괜찮았다. 뒷마당이 넓지는 않았다. 그래도 넷이서 야외용 테이블을 꺼내놓고 바비큐를 해 먹거나 눈이 무릎까지 쌓일 정도로 폭설이 내린 날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하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서너 평쯤 되는 뒷마당은 거의 콘크리트 블록으로 덮여 있어서 관리에 시간이 많이 들지도 않았다. 앞마당은 달랐다. 모퉁이에 있는 집이라 앞마당은 제법 넓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쯤은 앞마당의 잔디를 깎고 굴러다니는 낙엽도 주워 담아야 했다. 마당 있는 집에서 사는 일이 그저 낭만적이지만은 않다는 현실을 슬슬 자각할 무렵, 길고 긴 오타와의 겨울이 시작됐다.      

그곳의 겨울은 혹독했다. 하루걸러 하루씩 눈이 쏟아졌다. 탐스럽고 예쁜 눈이 하늘하늘 내리는 날도 있었지만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굵은 눈발이 마구 날리는 날도 많았다. 하늘에서 떨어지던 빗방울이 갑작스레 차가워진 공기를 만나 얼음비가 되는 날도 있었다. 후드득 쏟아져 내린 얼음비는 탕후루의 설탕막 같은 얇은 유리막으로 온 세상을 뒤덮었다. 집 앞에 쌓인 눈을 허리가 아프도록 치우면서 집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이 생각보다 훨씬 힘들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마당 넓은 집

캐나다 생활 1년 만에 새로 구한 집은 토론토 북쪽에 있는 단독주택이었다. 두 번째 집을 구할 무렵엔 마당에서 커피를 마시고 꽃을 가꾸는 삶이 겉보기에만 우아하고 한가로워 보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집을 가꾸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쏟아붓고 싶지 않았던 남편과 나는 적당한 집을 구하고 싶었다. 아이들이 뛰어놀 정도는 되지만 너무 많은 노동을 요구하지는 않는 그런 집을 원했다.      


하지만, 코로나 시대의 세입자는 을도 아닌 병이나 정쯤 되는 존재였다. 교외 주택의 인기가 치솟은 탓에 원하는 집을 찾는 건 불가능했다. 세입자들이 대학 입학 원서를 넣듯 이집 저집 서류를 넣으면 잔뜩 지원서를 받아든 집주인이 가장 마음에 드는 세입자를 골랐다. 몇 번의 낙방 끝에 간신히 계약한 곳은 마당이 아주 넓은 집이었다.      


영화 <트루먼 쇼>에 나올 것처럼 깔끔하게 정돈된 동네 한쪽에 자리 잡은 집은 근사했다. 좀 낡긴 했지만 널따란 마루도, 탁 트인 창도, 시원한 테라스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치고는 꽤 괜찮은 집이라고 기뻐하며 뒷문을 여는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한여름의 태양이 뿜어내는 뜨거운 열기를 있는 그대로 흡수해 온갖 이름 모를 잡초가 잔뜩 웃자란 모습이 마치 미니 정글 같았다. 집주인이 이미 두어 달쯤 비워둔 집이라는 얘기를 미리 듣지 않았더라면 기겁을 하고 뒷문을 닫아버렸을지도 모른다.      


잔디 깎는 남자잡초 뽑는 여자



천신만고 끝에 찾은 새집이 정글 같은 꼴이라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비보를 전해 들은 남편 친구가 딱 봐도 성능 좋게 생긴 잔디깎이를 싣고 집 앞에 나타났다. 캐나다에 터전을 잡고 산 지 수십 년이 된 그는 뭐 별일도 아니라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뒷마당의 풀을 쓱쓱 베어냈다. 잔디깎이가 윙윙 소리를 내며 정강이보다 높이 자란 풀을 걷어냈다. 잘려 나간 풀을 모두 종이봉투에 집어넣고 마당을 둘러봤다. 원래부터 잘 관리되지 않은 마당이었던 듯 잔디보다 잡초가 더 많았다.      


잡초가 잔디보다 많다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물론 잔디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더라면 좀 더 근사해 보였을 수는 있다. 하지만 잡초가 빼곡하게 자리 잡은 마당은 오히려 다채로웠다. 기다란 옥수숫대를 닮은 풀과 호박처럼 보이는 열매가 달린 풀, 곳곳에 숨어 있는 민들레와 이름 모를 보랏빛 꽃. 어디선가 날아온 씨앗이 뿌리를 내린 듯 규칙이라고는 없이 저마다 엉뚱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나로 뭉뚱그려 잡초라고 부르기에는 미안할 정도로 예쁜 식물도 많았다.      


마당의 예쁜 식물들이 마음껏 자라도록 내버려 두고는 비밀의 화원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북미의 주택가에는 나름의 규칙이 있다. 주택에 사는 사람은 행인이 미끄러져 다치지 않도록 집 앞의 눈을 제때 치워야 하고 동네 분위기에 맞춰 마당을 열심히 관리해야 한다. 비밀의 화원을 만들고 싶다는 철없는 꿈은 내려놓고 우리는 마당 가꾸기에 열을 올렸다. 풀이 좀 높이 자랐다 싶은 날이면 남편은 어김없이 잔디를 깎았고, 나는 틈이 날 때마다 마당으로 나가 잡초를 뽑았다.      


잔디 깎는 남자와 잡초 뽑는 여자가 가꾼 마당은 꽤 그럴듯했다. 물론 옆집 마당에는 비할 바가 안 됐다. 폴란드 출신의 노부부가 가꾼 옆집 마당은 잡지에 나와도 손색이 없을 것처럼 완벽했다. 자로 잰 듯 반듯하게 깎인 잔디와 정해진 자리에 예쁘게 피어 있는 꽃, 적재적소에 놓인 아름다운 조각상. 담을 맞댄 옆집의 완벽한 마당에 비하면 우리 집 마당은 아마추어, 그것도 초보자의 솜씨가 느껴지는 어설픈 마당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두 손으로 직접 일궈낸 그 마당에서 로망을 현실로 만들었다. 아이들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틈날 때마다 마당으로 달려 나가 온몸이 흠뻑 젖도록 뛰어놀았다. 보잘것없는 솜씨지만 땀과 노력으로 일군 마당에서 우리 가족은 평범하지만 값진 행복을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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