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이름, 같은 마음
“현충일은 영어로 뭘까요?”
영어 공부 좀 해본 사람이라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이건 너무 쉽지!’
그리고 대개는 자신 있게 외칠 것이다.
“메모리얼 데이(Memorial Day)!”
그런데, 서둘러 정답을 말하기 전에 이렇게 묻는 사람도 있을 듯하다.
“어느 나라 현충일이요?”
우리나라의 현충일(顯忠日)은 매년 6월 6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의 충성과 희생을 기리는 날이다. 오전 10시가 되면 전국에 사이렌이 울리고 사람들은 모든 일을 멈추고 1분간 묵념을 한다.
고작 1분이지만,
호국영령(우리나라를 보호하고 지킨 이들의 영혼을 높여 이르는 말)과
순국선열(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열사),
그리고
전몰장병(적과 싸우다 죽은 장병)들께 온 마음으로 감사를 전한다.
세계 많은 나라들은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림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기린다. 단 하루지만, 진심을 담아 이들의 숭고한 뜻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날을 메모리얼 데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의 현충일을 ‘Memorial Day’로 번역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영어 표기가 대체로 미국 방식을 따르기 때문이다.
미국의 메모리얼 데이는 5월 마지막 월요일이다. 이날, 미국 시민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전사자를 추모한다. 메모리얼 데이의 기원은 데코레이션 데이(Decoration Day), 즉 무덤을 꽃으로 단장하는 날이었다.
남북전쟁(1861~1865)에서 수많은 군인이 목숨을 잃자, 사람들은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묘지를 꽃으로 단장하기 시작했다. 이런 관습은 머지않아 공식화되었고, 추모의 대상도 모든 전쟁의 희생자로 확대됐다.
미국 국경을 넘어 캐나다로 가보자. 캐나다에서는 현충일을 리멤브런스 데이(Remembrance Day)라고 부른다. ‘추도하는 날’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캐나다의 리멤브런스 데이는 언제일까?
바로 11월 11일이다.
한국인들이 빼빼로를 주고받으며 달콤한 설렘을 나누는 날, 캐나다인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전몰장병들의 넋을 기린다.
캐나다가 요란한 전쟁의 역사와는 거리가 먼 나라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캐나다 역시 두 번의 세계대전에 모두 참전한 나라다. 리멤브런스 데이가 11월 11일로 정해진 건 전 세계를 전쟁과 공포의 도가니에 밀어 넣었던 제1차 세계대전이 1918년 11월 11일에 끝났기 때문이다.
종전협정이 체결된 11월 11일 11시에는 2분간 묵념하며 전몰장병의 넋을 기린다. 리멤브런스 데이에 캐나다인들이 추모하는 대상에는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가 희생된 장병도 포함돼 있다. 태평양 건너에 있는 먼 나라 사람들이 한국을 위해 싸운 자국 군인을 추모하는 날 신이 나서 빼빼로를 주고받는다고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밀려든다.
물론 아니다. 11월 11일은 영국,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여러 영연방 국가가 전쟁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날이다.
그렇다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과 함께 연합국의 일원으로 동맹국에 맞서 싸웠던 미국은 11월 11일을 어떻게 기념할까? 미국은 11월 11일을 재향군인의 날(Veterans Day)로 지정해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모든 군인의 헌신을 기린다.
리멤브런스 데이를 기념하는 나라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꽃이 있으니, 영어에서 ‘포피(poppy)’라고 불리는 양귀비꽃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양귀비는 전쟁터 한복판에서 피어난 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격전지였던 벨기에 플랑드르 전선. 그곳에서 많은 병사가 숨을 거두었고 쏟아지는 포화로 땅은 황폐해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땅 위로 붉은 양귀비가 피어났다. 죽음과 절망으로 물든 전장에서 꽃이 피어난 것이다.
전우를 잃고 슬퍼하던 캐나다 군의관 존 매크레이(John McCrae)는 피로 얼룩진 들판에서 꿋꿋하게 피어난 양귀비꽃을 보고 <플랑드르 들판에서(In Flanders Fields)>라는 시를 썼다. 영국 잡지에 실린 그의 시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그 후로 매해 11월이면 많은 사람이 옷깃에 조그마한 양귀비꽃 모형을 달고 다닌다. 이와 같은 양귀비꽃의 상징성 덕에 리멤브런스 데이는 ‘포피 데이’라고도 불린다.
캐나다 대학에서 글쓰기 수업을 들었을 때, 젊은 교수가 학생들에게 이 시를 읽어주며 존 매크레이의 삶을 소개해준 적이 있다. 전쟁과는 거리가 먼 풍요로운 시절에 태어난 어린 학생들의 귀에 100년 전에 쓰인 시가 제대로 입력될 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다들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호주와 뉴질랜드 역시 영연방 국가답게 11월 11일에 리멤브런스 데이를 기린다. 다만, 이 두 나라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날이 있다. 앤잭 데이가 바로 그날이다. 앤잭(Australian and New Zealand Army Corps), 즉 호주와 뉴질랜드 연합군이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했던 1915년 4월 25일을 기리는 것이다.
역사상 최악의 전투라고 불리는 갈리폴리 전투에서 호주와 뉴질랜드는 무려 1만 1천 명이 넘는 병사를 잃었다. 오스만 제국의 무차별적인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병사들을 기리기 위해 호주와 뉴질랜드는 매년 4월 25일 대대적인 추모 행사를 벌인다.
현충일, 메모리얼 데이, 리멤브런스 데이, 포피 데이, 앤잭 데이.
나라와 언어, 날짜와 방식은 다르지만, 단 하루, 단 한 순간만큼이라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평화를 다짐하는 마음은 하나다.
양귀비꽃 한 송이.
진심 어린 감사를 전하는 1~2분의 짧은 묵념.
낡은 사진 속 제복을 입은 누군가의 미소.
오늘 우리가 누리는 평화가 절대 당연하지 않다는 무거운 진실을 다시 한 번 가슴 깊이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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