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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모순

삶이라는 모순에 대하여

by 김현정

몇 쪽 읽고 한쪽으로 쓱 밀어두었다. 분명히 별로였는데 또 손이 갔다. 그렇게 몇 쪽을 더 읽고 또 밀어두었다가 다시 나도 모르게 책을 펼쳐 들기를 몇 차례, 어차피 다 읽고 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단숨에 책을 읽어 내려갔다.


문장은 다소 거칠었고, 미묘하게 주술이 어긋난 문장도 더러 있었다. 글을 전개하는 방식이나 묘사. 서사를 전달하는 스타일. 그 무엇 하나 내 취향인 건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이야기에 끌렸다.


<모순>을 읽으며 다시금 깨달았다. 결국 중요한 건 개별 문장의 완성도나 미학적인 가치가 아니라, 이야기 자체의 흡입력작가가 던지는 메시지라는 사실을. <모순>에는 서사 곳곳을 파고드는 작가의 통찰력이 있었다. 그리고 작가는 그 통찰력을 통해, 제목처럼, 인생이란 결국 ‘모순’이라는 사실을 다양한 인물을 통해 증명해 보였다.


상대성.jpg <상대성>, 모리츠 코르넬리스 에셔


이야기의 중심에는 안진진이 있다. 사랑하는 남자 김장우와 설레지는 않지만 명확한 미래를 제시하는 남자 나영규 사이에서 갈등하는 안진진. 그녀는 ‘사랑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과 결혼해야 하는가’를 놓고 치열하게 고민한다. 그리고 이야기의 끝자락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결단을 내린다.


그러나 진진 못지않게 모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두 인물이 있다. 바로 그녀의 엄마와 이모, 일란성 쌍둥이 자매다. 두 사람은 똑같은 얼굴로 태어났지만, 삶의 방식이 바뀌자 생김새가 달라졌고 서로 복사한 듯 똑같았던 얼굴이 달라질수록 삶의 궤도도 정반대가 됐다.


진진의 엄마는 살인미수로 구속된 아들, 툭하면 가출하는 딸, 가정폭력을 일삼다가 결국 집을 떠난 남편까지, 가족의 문제를 온몸으로 감당하며 살아간다. 반면, 쌍둥이 동생인 이모는 기념일마다 근사한 레스토랑을 예약하는 남편, 공부도 잘하고 교양이 넘치는 자식, 여유 넘치는 삶까지 그야말로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완벽한’ 삶을 누린다.


진진의 엄마는 억척스럽게 가족을 책임지는 삶을 즐기며, 새로운 문제가 터질 때마다 마치 게임 속 파이터처럼 알 수 없는 생기에 사로잡힌다. 그런 언니를 보며 진진의 이모는 안타까워하거나 동정하기는커녕 “사는 것처럼 사는 삶”이라고 되려 부러워한다.


진진의 엄마는 동생이 한겨울에 사 들고 온 다디단 수박을 맛있게 먹으면서도 동생이 아프다는 말에는 쓴소리만 늘어놓는다. “그게 다 응석인 거야. 평생 늘어진 팔자에 할 일이 그것 말고 뭐 있어야지.” 심술궂게 들리는 이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는지, 진진의 이모는 도무지 결핍이라고는 없는 자신의 삶을 버거워한다. 지나치게 평탄하고 지리멸렬한 삶이라고 여기며.


세상의 잣대로만 따지면 진진의 엄마야말로 지리멸렬하게 사는 것처럼 보인다. 힘들게 장사해서 번 돈을 몰래 훔쳐 가는 남편, 툭하면 가출하는 딸, 도가 지나친 허세로 사람을 죽일 뻔한 아들을 붙들고 사는 삶은 그리 녹록하지 않을 게 뻔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상대의 삶을 부러워하는 쪽은 동생이다.


누가 누구를 부러워해야 하는가?

누구의 삶이 더 그럴듯한가?

누구의 행복이 더 큰가?


이런 문제에 대한 답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어떤 불행은 어떤 행복보다 사람을 살게 하는 더 큰 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 불행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비로소 삶의 이유와 감각을 찾는 탓이다.


너무 행복해서 오히려 슬퍼지는 마음.

크림 파스타가 먹고 싶어서 정성껏 요리를 끝냈는데 창문 밖에서 나는 얼큰한 김치찌개 냄새에 마음이 울컥하는 날.

달콤한 시럽을 너무 많이 넣어 오히려 쓴맛이 나는 바닐라 라떼.

환경 보호 팸플릿을 만들려고 나무를 베는 기이한 현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시작된 전쟁이 더 많은 생명을 앗아가는 아이러니.


삶에는 이렇듯 늘 모순의 흔적이 있다. 인간의 삶은 한 단어로 정의될 만큼 단순하지 않지만, ‘모순’이 인생을 관통하는 중요한 단어인 것만은 틀림없다.


베스트셀러.jpg 2025년 상반기 베스트셀러 목록 (출처: 교보문고)


양귀자 작가의 <모순>이 교보문고가 발표한 2025년 상반기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무려 3위를 차지했다. 출간된 지 거의 30년이 다 되어가는 이 책이,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이재명 대통령의 <결국 국민이 합니다>의 뒤를 이어 3위를 차지하다니 놀랍고도 놀라운 일이다. 30년에 가까운 세월을 거슬러 올라와 역주행의 기적을 만들어낸 셈이다.


MZ세대‘텍스트 힙 열풍(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을 멋지게 바라보는 현상)’<모순>의 역주행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뉴스를 보고 나니, 어쩌면 '모순'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중요한 삶의 조각인 것 같기도 하다. 신파에 가까울 수도 있는 이 이야기에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건, ‘삶은 모순’이라는 진실을 설득력 있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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