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는 원래 하얗다

아들이 건넨 하얀 맛 딸기

by 김현정

“하우스 안에 있는 건 마음껏 드셔도 됩니다. 농약 안 치거든요.” 딸기 농장 주인은 투명한 플라스틱 통을 사람 수대로 내밀며 말을 얹었다. “나가실 때 여기 한 통씩 또 채워가시면 됩니다.” 시쳇말로 대박이 아닐 수가 없었다. 누구나 양껏, 배가 부르도록 딸기를 먹고도 또 한 통을 채워갈 수 있다니! 딸기를 좋아하는 나는 속으로 ‘심 봤다!’를 열 번도 넘게 외쳤다. 사실 비닐하우스 안에서 갓 딴 딸기는 신선하지만 후텁지근한 공기 탓인지 어딘가 상쾌하지 않다. 반대로 냉장고에 넣어둔 딸기는 상쾌하고 개운하지만 신선함은 덜하다.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먹는가에 따라 딸기 맛이 달라지는 셈이다. 그러니 농장에서 직접 딸기를 수확해 곧장 먹고 또 한 통을 가득 채워 집에서 시원하게도 맛볼 수 있다니, 이만큼 ‘남는 장사’도 드물다.


세종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호사 중 하나가 딸기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딸기 생산지 논산이 지척일 뿐 아니라 연서면, 금남면 같은 세종 구도심 일대에서도 알이 크고 맛있는 딸기가 생산된다. ‘어차피 비닐하우스 안에서 키우는데 딸기 키우기에 적당한 곳이 정말 따로 있는 걸까?’ 하는 의구심을 느꼈던 때가 있다. 농사라는 게 정해진 법칙대로 결정되는 것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충청도에서 딸기 농사가 인기를 얻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적당히 온화한 겨울 날씨, 금강 유역의 기름진 토양,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딱 알맞은 강수량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세종 인근에서 딸기가 많이 생산되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세종 신도심에서는 20~30분만 가면 딸기 체험 농장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추운 겨울과 봄 사이, 달콤하고도 신나는 체험을 하기에 딸기 농장만 한 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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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딸기가 너무 맛있어요!” 아들은 얼마든지 먹어도 된다는 말에 신이 나서 하우스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서툰 손가락이 분주하게 줄기 사이를 오갔다. 딸기가 촘촘하게 매달린 줄기에서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새빨간 딸기를 골라 입에 쏙쏙 집어넣었다. 배가 부르다 못해 속이 부대낄 정도로 딸기를 뱃속 가득 욱여넣은 아들은 플라스틱 통을 새빨간 딸기로 꽉꽉 채워 넣었다. 아이의 새하얀 볼 군데군데 붉은 딸기 물이 배었다.


새빨갛게 잘 익은 딸기. ‘딸기는 붉다’라는 명제는 너무도 당연한, 반박 불가한 진리처럼 여겨진다. 르누아르의 ‘딸기가 있는 정물(Les Fraises)’이나 마네의 ‘딸기(Strawberries)’에서도 딸기는 탐스러운 붉은 빛이다. 그러나 내가 먹어본 가장 달콤한 딸기는 하얬다. 만년설 딸기라든가 신데렐라 딸기 같은 값비싼 이름표가 붙어 있는 하얀 딸기를 말하는 게 아니다. 나를 설레게 하는 하얀 딸기는 붉은 과육과 초록색 꼭지 사이에 슬그머니 끼어 있는, 옅은 연둣빛이 도는 바로 그 허여멀건 부분이다.


딸기가 있는 정물_르누아르.jpg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딸기가 있는 정물


마네_딸기.jpg 에두아르 마네, 딸기


2014년 늦가을, 할머니를 따라 마트에 갔던 아들이 뜻밖의 전리품을 안고 돌아왔다. 아들이 빼꼼히 내민 건 딸기였다. “벌써 딸기가 나왔어요?” 나는 깜짝 놀라 엄마한테 물었다. “올해 첫 딸기란다. 너 줘야 한다면서 꼭 사달라고 하더라.” 할머니를 따라다니며 신이 나서 마트를 구경하던 아들이 딱 한 상자 남은 딸기 앞에서 멈춰 섰다고 했다. “할머니, 딸기 좀 사주세요. 엄마 딸기 좋아해요. 엄마가 동생 낳느라 고생했으니까 맛있는 거 사줘야 해요.” 좀처럼 떼를 쓰지 않는 아이였지만 1년 만에 보는 딸기를 사고 말겠다는 결의는 단호했다.

아이가 내미는 딸기를 받아들고는 다소 과장된 감동을 표현했다. 플라스틱 통 안에 들어 있을 때는 제법 양이 많아 보였지만 접시에 담아놓고 보니 좀 달랐다. 한 통이라고 해 봐야 고작 열대여섯 알일 뿐이었다. 식탁에 딸기 접시를 내려놓으니 상큼하고 향긋한 딸기향이 훅하고 코를 파고들었다. 딸기에 꽂힌 아이의 눈이 뜨겁게 반짝였다. 아이의 말대로, 나는 딸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딸기를 ‘적당히’ 좋아하는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아들은 딸기를 ‘열렬히’ 사랑한다.


내가 딸기를 한 입 베어 물자 아들은 의기양양해졌다. ‘거봐요. 딸기 사 오길 정말 잘했죠?’라고 속삭이는 얼굴이었다. 접시는 조금씩 비어 갔다. 딸기가 줄어들수록 아이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아들의 심경 변화를 눈치채고는 딸기를 맛있게 먹는 시늉만 했다. ‘와앙~!’하며 한 입 크게 베어 무는 대신 딸기 하나를 손에 들고 한 귀퉁이씩 조심스레 베어먹었다. 그러다 급기야는 손을 내려놓았다.


“엄마도 드세요. 엄마 주려고 사 온 거예요.” 어른들은 한 입씩 맛만 보고 손을 가만히 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아들의 얼굴이 복잡했다. 엄마한테 딸기를 주고 싶은 마음과 딸기를 실컷 먹고 싶은 마음, 딸기가 자꾸 줄어들어서 속상한 마음이 어지럽게 뒤엉킨 모양이었다. 나는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힌 아이의 마음을 풀어주고 싶었다. ‘엄마한테 딸기를 줘야 해’라는 사명감과 ‘일 년 만에 맛보는 딸기를 실컷 먹고 싶어’라는 욕망을 모두 채워주고 싶었다.


당장 더 많은 딸기를 내놓을 방법은 없었다.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건 아이가 내려놓은 ‘하얀 딸기’였다. ‘옳지! 바로 이거야!’ 상자를 열었을 때 농밀한 딸기향이 순식간에 퍼지긴 했지만 아쉽게도 과육과 꼭지를 잇는 허연 부분이 상당했다. 아들의 작은 입은 딸기 꼭지에 딱 붙은 하얀 과육을 제대로 발라내지 못했다.


빨간 과육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 덩그러니 남은 허옇고 단단한 딸기를 나는 맛있게 먹었다. 사실, 나는 엄마가 되기도 전부터 다짐했었다. 자식들 입에는 가시 하나 없는 보드라운 생선 살만 발라 넣어주면서 정작 자신은 대가리와 꼬리만 먹는 그런 엄마가 되지는 않겠다고. 그러나 딸기가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기쁘면서도 슬프고, 행복하면서도 동시에 미안한 표정을 짓는 아들을 보며 나는 그런 다짐을 가볍게 지워버렸다.


“엄마, 난 빨간 부분이 더 맛있어요. 엄마도 빨간 딸기가 더 맛있지 않아요?” 의아한 얼굴로 묻는 아들에게 나는 답했다. “엄마는 이 하얀 부분이 더 맛있어. 원래 하얀 딸기가 제일 맛있는 거야. 너도 크면 그 맛을 알게 될 거야.” 아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들은 몰랐겠지만, 원래 딸기도, 인생도 빨간 맛보다는 하얀 맛이다. 무엇이 됐든 기꺼이 덜어내고, 남겨두고, 내어주는 마음. 아이가 자라며 조금씩 알아가게 될 엄마의 마음. 나는 다시 한번 하얀 딸기를 베어 물었다. 단맛은 거의 없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어떤 과즙보다 깊은 맛이 그 안에 스며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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