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인분의 삶

세종, 홍판서댁

by 김현정

일 인분은 말 그대로 ‘한 사람에게 허락되는 몫’이다. 식당마다 조금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략 그릇에 담긴 양이 비슷한 걸 보면 ‘일 인분’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어느 정도 이뤄진 게 틀림없다. 그러나, 엄마가 되면 일 인분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아이들이 남긴 음식까지 싹싹 긁어먹은 탓에 잠들 때까지 배가 꺼지지 않는 날도 있고, 내 그릇을 힐끔거리는 아이들에게 음식을 나눠 주고 어정쩡하게 식사를 끝내는 날도 있다.


엄마로 살다 보면 밥그릇보다 더 지키기 어려운 게 하나 있다. 바로 내 몫의 시간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공평하게 하루 24시간이 주어진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는 엄마에게는 일 인분 어치의 시간이 오롯이 허락되지 않는다. 엄마에게 온전한 하루가 주어지는 날은 없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엄마의 시간은 조각나고 흩어진다. “엄마, 오늘 아침은 뭐예요?”에서 시작해 “엄마, 나 엄마 옆에서 잘래.”까지 “엄마”하고 부르는 소리를 수백 번은 들어야 하루가 끝난다.


그날도 그랬다. 첫째를 농구 학원에 태워주고 나니 시간이 애매하게 남았다. 뒷자리에 앉은 둘째는 “엄마, 집에 가지 말고 놀자. 오빠 농구 끝날 때까지 우리 놀자.”라고 졸라댔다. 첫째의 농구 경기가 끝날 때까지 남은 시간은 딱 90분이었다.


90분.


집에 가기도 애매하고, 멀리 떠나기도 애매한 시간. 둘째는 재미를, 나는 여유를 느낄 만한 곳이 없는지 스마트폰을 켜고 검색에 돌입했다. 키즈 카페나 놀이터는 너무 뻔했다. 어디가 좋을지 고민하던 중 세종 시청에서 15분쯤 떨어진 부강면에 조선 시대에 지어진 고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둘째가 한참 역사에 관심을 보이던 무렵이라 ‘바로 여기다!’ 싶었다.


“우리 홍판서댁 가볼래?”라고 물었더니 아이는 곧장 되물었다. “거기가 뭐 하는 곳인데?” 그곳이 왜 홍판서댁인지, 국가민속 문화재로 지정된 이유가 무엇인지 나도 아는 게 없었다. 둘 다 공평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채 오래된 기와집을 보러 가는 게 꽤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신도시를 벗어나 작은 굴다리를 통과하니 시골 마을이 나왔다. 낡은 터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오래된 주택이 띄엄띄엄 들어선 시골 마을을 꼬불꼬불 돌아 울퉁불퉁한 흙길을 달렸다. 그 길 끝에 가지런히 기와가 올라간 돌담과 그 위로 수줍게 고개를 내민 기와집 한 채가 서 있었다.


홍판서댁 바깥 마당.jpg 세종 부강면 홍판서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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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판서댁 굴뚝.jpg
마당 우물과 낮은 굴뚝

커다란 솟을대문 앞에서 아이는 신이 났다. “엄마, 여기 진짜 기와집이 있어!” 문짝에는 ‘용(龍)’과 ‘호(虎)’라는 한자가 커다랗게 적혀 있다. 용과 호랑이가 집을 지켜주기를 바라는 집주인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 고택에 ‘홍판서댁’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 조선 말기에 병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지낸 홍순형이 한때 이 집에 살았기 때문이다. 역사책에도,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는 낯선 이름이지만 일본이 주는 남작 작위를 거절할 만큼 기백 있는 인물이었다는 안내문을 읽고 나니 왠지 호감이 갔다.


오래된 우물이 있는 중정은 아이를 순식간에 사로잡았다. 깊은 우물 속으로 두레박을 던져 넣은 아이는 제법 힘이 드는지 맑은 물이 찰랑거리는 두레박을 낑낑거리며 끌어 올렸다. 부엌에 있는 커다란 가마솥을 보고는 동화책에서 본 팥죽할멈 이야기를 꺼냈다. 오래된 집 마당에 나란히 앉아 주거니받거니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마음이 평온해졌다.


대청마루에 앉아 뻥 뚫린 하늘을 바라보니 가슴이 탁 트였다. 첫째를 농구 학원에 내려놓고 90분짜리 미션을 해치우듯 다급하게 찾아간 그곳에서 나는 깨달았다. 엄마의 하루에서 끝없이 쪼개져 나온 시간 조각들도, 제대로 다듬으면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쪼개진 시간은 제각각 다른 방식으로 갈라지고 나뉘어 내 삶을 떠돈다. 그러나 그 조각들이 내 삶을 마구 헝클어뜨리는 쓸모없는 파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 나는 잘 안다. 아무리 긁어모아도 일 인분이 채 안 되는 시간일지언정 그 조각들을 한자리에 모아 정성껏 다듬기만 하면 얼마든지 아름다운 모자이크를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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