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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w Sep 13. 2023

두 번째 산티아고, 스물 일곱째 날

Baamonde- Miraz 14.57km

2023. 5.10


3주 만에 쉬어가는 날을 갖기로 했다. 순례길 안내서 대부분에는 Baamonde부터 수도원이 있는 Sobrado dos Moxes까지 40km를 한번에 걷도록 안내되어 있는데 나는 사이에 위치한 Miraz에서 하룻밤 쉬어가기로 했다.


오늘은 15km만 걷는다고 생각하니 몸이 느긋해진다. 매일 서서 전날 남긴 바게트에 치즈만 넣어 먹던 아침도 식탁에 접시를 놓고 앉아 바게트에 어제 산 후무스를 바르고 샐러드를 넣어 먹은 후 다른 사람들이 다 떠난 후 마지막으로 알베르게를 나왔다. 여유를 부려 봤자 8시 10분이었지만.

엽서같은 현관문과 장미 나무

어젯밤은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하느라 거의 잠을 못 잤던 것 같다. 9시쯤 잠이 들었는데 계속 화장실을 갔었다. 아마 어제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목이 타서 물과 루이보스 차를 번갈아 마셨더니 그랬던 것 같다. 그래도 물을 많이 마신 덕에 아침에 일어나니 어젯밤과는 달리 목소리도 나오고 목이 한결 편안했다.


아침은 한국의 3월처럼 쌀쌀하고 추웠다. 순례길 중 가장 추운 아침이었던 것 같다. 몇 시간을 걸어도 몸에서 땀이 나지 않을 정도로 추운 안개 낀 날씨였다. 평소보다 30분 정도 늦게 길을 나온 것뿐인데 길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오늘 일정은 Baamonde에서 Sobrado dos Moxes까지 40km를 걷는 일정이기 때문에 모두들 일찍 걷기 시작했으리라.

산티아고데컴포스텔라까지 100km와 99km 사이 어딘가

어제 쭉 뻗은 아스팔트 도로 대신 오늘 걷는 길은 숲 속 길이다. 숲 길을 걸을수록 숨쉬기도 편하고 침을 삼킬 때마다 모래를 넘기는 느낌이 점점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2시간이 넘어도 아무도 보이지 않으니 내가 오늘 너무 여유를 부렸나 싶었는데, 저 멀리 앞에 강아지와 함께 걷고 있는 순례자가 보였다. 나보다 멀찌감치 앞에 걷고 있어 가서 인사하고 싶은 마음을 두고 뒤에서 강아지와 함께하는 순례길을 걷는다니 정말 부럽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구부러진 도로를 돌아 산 입구에 들어서니 그들이 멈춰 서서 마을 주민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 손으로 만질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웠어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아나스타샤와 그녀의 강아지 샘은 길에서 만난 덩치가 엄청 큰 개와 인사하고 있었는데, 마을 개는 두 발로 서면 내 키를 훌쩍 넘는 덩치였지만 성격이 순해 낯선 사람과 개를 보고도 짖지 않았다. 나도 그들의 인사에 함께 참여하게 되었는데 개 주인은 내가 개들과 인사하는 모습이 엄청 행복해 보인다며 먼저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사진으로 남겨주셨다. 내 개조카 구름이 사진도 보여드렸다.

선글라스 낀 얼굴

한바탕 길거리 인사가 끝난 후 같이 길을 걸으며 이름을 주고받았다. 아나스타샤와 샘은 러시아에서 온 순례자였다. 러시아에서 왔다고 하니 아무래도 순간적으로 드는 전쟁 생각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지만 말로 꺼내면 안 될 것 같아 주고받는 대화가 나도 모르게 조심스러워졌다.


아나스타샤도 그간 강아지와 함께하는 순례길이니 아무래도 여러 질문도 많이 받았으리라. 그래서 이런저런 질문을 하기보다는 같이 걷고 있는 숲 길에 대해 얘기하고, Irun부터 걸어온 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강아지와 함께하는 순례길이 어떠한 지에 대해 넘어가게 되었는데, 아나스탸샤는 샘과 함께 길을 다니기 때문에 야외에서 잘 수 있는 텐트를 챙겨 왔고  배낭은 무려 20kg쯤이라고 했다. 내 조카 몸무게보다 조금 덜 나가는 것이다. 초등학교 저학년을 엎고 순례길을 걷고 있는 아나스타샤. 배낭 안에는 샘의 사료와 밥그릇, 강아지 목욕 용품까지 다 들어있다고 했다. 그리고 길을 걷다가 강아지 출입이 허용되는 알베르게가 있으면 정원에 텐트를 치고 자고 그렇지 않으면 인근 숲 속에서 텐트를 치고 잔다고 했다. 순례자들 중에 이렇게 반려동물과 카미노를 걷는 사람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이렇게 만나 이야기를 해보는 것은 처음인지라 나는 이야기를 들으며 와우를 많이 반복했던 것 같다.

갈색 털의 Sam

 주인과 이야기를 하는 나의 관심을 끌기 위해 내가 들고 있는 우산을 잡아당기기도 하고, 자기 몸통 만한 길이의 나뭇가지를 입으로 물고 와 던기지 놀이를 하자고 요청하기도 했다. 그렇게 셋이서 걸은 순례길은 마치 걸어서 세계 속으로의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스페인 시골 한편에서 나무로 빽빽한 숲 속 산티아고 순례길을 러시아 집 강아지와 나뭇가지 던지기 놀이를 하며 걷고 있다는 것이 사실 같지 않았다.


그렇게 30분쯤 걸었을까, 갈림길이 나왔다. 왼쪽 아니면 오른쪽을 가리키는 화살표에서 내가 가는 방향과 반대로 가는 그들과 인사를 하고 다시 혼자 걸었다.

또 다른 엽서같은 집

2시간쯤 더 걸으니 오늘의 목적지까지는 이제 1시간 남짓 남았다. 오후 1시. 아침마다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는 것이 습관이 되니 커피 마실 시간을 훌쩍 넘긴 것이다. 30분 정도 더 걸어 카페를 찾아 들어가 카페콘레체를 시켜 놓고 잠시 앉아 있었다. 카페에는 영국 억양의 여성분이 전화를 하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눈인사만 잠시 나누었다.

먼저, 한 모금 마신 후

오늘 머물 알베르게는 오후 2시 반에 연다고 되어 있어 카페에서 30분 정도 쉬었다 갈 셈이었는데, 희한하게도 카페 와이파이가 십분 정도 지나자 꺼져버렸다. 주인이 무엇을 만지더니 와이파이가 꺼진 것으로 보아 기계를 끈 것 같았다. 그렇게 예상보다 일찍 카페를 나선 후 남은 길을 마저 걸어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픈 시간보다 1시간 일찍 도착했는데 감사하게도 체크인을 일찍 해주셔서 짐을 풀고 어제 못한 빨래까지 하였다.


봉사자들로 운영되는 Miraz 알베르게는 오늘 마침 지난 2주간 머물렀던 봉사자들과 신규 봉사자들의 교대가 있는 날이라고 했다. 빨래를 다 한 후 알베르게에서 가장 따뜻한 곳을 찾아 난로 앞에 앉아 있는데, 오늘 새로 오신 미국인 봉사자분이 오시더니 혹시 발에 물집이 있는지 물어보셨다. 그래서 오래된 물집과 어제 새로 생긴 물집을 보여드렸는데, 황송하게도 티트리 오일과 소금을 섞은 물로 족욕을 해주셨다. 알베르게에서 이런 호사를 받다니, 감사한 마음을 넘어선 어떤 마음인데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운 그런 기분이었다.

발이 호강하는 날


그리고 같은 팀으로 오신 다른 여성 봉사자분이 오시더니, 며느리가 한국인이라며 나를 보고 매우 반가워하셨다. 나중에 가족 이야기를 들려주시겠다고 하시고는, 나에게 장난감 왕관과 목걸이는 걸어주신다. 오늘의 작은 이벤트 같은 것이데 원래는 순례자들이 많은 날이면 프린세스를 뽑아 사진을 찍고 했던 모양이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이 적어 최근 3일 동안은 순례자가 방문하지 않았고, 오늘 또한 나 혼자 밖에 없어 프린세스로 선택되었다고 설명해 주셨다. 흥이 많은 자원봉사자분들이었다.


욕이 거의 끝날 무렵 내 옆에 앉으시더니, 아들과 며느리가 어떻게 만났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며느리 되시는 분이 고려인인 것 같아 다시 여쭤보니 그러했다. 미국인인 아들이 우즈베키스탄에서 Peasce corp으로 근무할 때 영어를 배우러 온 고려인 여학생과 사랑에 빠져 2년 뒤 결혼까지 하게 된 것이다. 참으로 러브스토리는 어디에서든, 누구의 이야기든지 놀랍고 신비롭다. 지금은 세 아들과 함께 미국에서 살고 있다고 사진을 여러 장 보여주셨다.


점점 몸이 피곤해진 난 침대로 돌아왔는데, 이후로도 이곳 봉사자분들은 종종 내가 있는 침대로 오셔서 필요한 것이 있는지 물어보셨다. 특히, 내게 발 물집을 치료해 주신, 빨간색 티셔츠를 입으신 나이가 지긋한 봉사자 분은 내가 계속 괜찮다고만 하자, 내게 “당신이 편한 대로,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괜찮다.”는 말씀을 하시고 쉬게끔 자리를 비켜주셨다. 이 말은 하루종일 나로 하여금 내가 살면서 어떤 결정을 할 때 세 가지를 염두해 본 적이 있는지 계속 생각나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몸이 안 좋으니 입맛도 없어 저녁은 간단히 빵과 사과만 먹을 예정이었는데, 다른 봉사자이신 호주에서 오신 레이디가 오시더니 어제 만든 파스타가 남았다고 나눠 주셔서 예상치 못한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다음 주면 한국으로 돌아간다. 작년 9월에 떠났으니, 약 8개월 만에 한국으로 돌아간다.


오늘은 처음 본 사람들로부터 베풂을 받아 감사한 마음을 흠뻑 느낀 날이다. 내가 편한 대도,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괜찮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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