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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w Sep 13. 2023

두 번째 산티아고, 스물 여덟째 날

Miraz -Sobrado dos Moxes 25. 44km

2023. 5.11


어젯밤은 나를 포함에 총 3명이 알베르게에서 머물렀다. 지난 3일간은 아예 한 명도 오지 않았다고 하니 이렇게 따뜻한 분들이 지난 3일간 마음 나눌 곳이 없어 오랜만에 찾아온 내게 극진히 신경을 써주셨나 싶어 감사했다.


어제는 비행기 표를 검색하다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어제 찾아둔 표를 예매하려니, 그새 가격이 6만 원이 올라있다. 그래도 이리저리 검색한 수고 덕분에 저렴한 표를 잘 찾아낸 것 같다.


비행기 표를 예매한 후 아침을 먹으려니 식탁 위에 빵과 요거트, 피넛 버터와 누텔라가 준비되어 있었다. 미국인과 피넛버터는 한국인과 김치 같은 것이다. 첫날 만난 미국에서 온 메러디스가 한 말이 생각나는 순간이다. 미국 마트에 가면 질감, 색깔, 브랜드 등 피넛 버터 선반에 종류만 20가지가 넘는다고 했다.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고 다양성의 나라인 미국을 잘 보여주는 피넛 버터. 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온 피넛버터와 딸기잼을 빵에 바르고 바나나를 조금 얹어 먹으니 정말 맛있었다. 아침을 먹으며 비행기 표를 예매한 것을 생각하니 순례길이 끝나가는 것이 실감 났다. 이제 4일 후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다.


아침을 다 먹은 후 컵과 접시씻고 있는데 어제 파스타를 나눠주신 봉사자분이(성함을 여쭤봤어야  했는데) 단체 사진을 찍으려는데 혹시 사진을 찍어줄 수 있는지 물어보셨다. 알베르게 문 앞에 나란히 서서 포즈를 취하신 흰머리의 봉사자분들은 모두 세계 각지 멀리에서 순례자들을 위해 이곳 스페인 시골까지 오신 분들이다. 하루 종일 걷느라 지친 순례자들을 위해 잠자리를 살피고, 아침을 준비해 주시는 분들. 이분들 또한 이전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먼저 걸어오신 분들이기에 지금 걷고 있는 우리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시는 것이리라.


사진까지 다 찍어드리고 이제 나도 이곳을 떠날 차례였다. 배낭을 정리한 후 모든 분들께 진심을 다해 어제의 극진한 보살핌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포옹을 나눈 후 문을 나서려는데, 어제의 빨간색 티셔츠를 입으신 할아버지 봉사자분이 떠나는 순례자들을 위한 3가지 질문이 있으니 답을 한 뒤 출발할 수 있다고 하셨다.


첫째, Have you got lunch money? 점심값은 있는지?

둘째, Do you know where to go today?

오늘 어디로 가는지 는지? 

셋째, Did you pee, poo? 화장실은 다녀왔는지?

할아버지가 손주에게 물어볼 듯한 유쾌한 질문 덕분에 모두 예스를 외치고 웃으며 알베르게를 나섰다.


출발할 때 어젯밤 같이 지낸 레이디와 자연스럽게 함께 걷기 시작했다. 어제는 아픈 몸을 챙기느라, 아침에는 비행기표를 예약하느라 미쳐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었다. 지금쯤이면 길 위의 순례자들을 한두 번씩은 지나쳐 얼굴이 낯익은데 이 레이디는 여태 걸으며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다. 그런데 옷과 배낭이 심상치 않았다. 한국의 국방 카키색 같은 군용 배낭을 메고 있었던 것이다. 물어봤다.


슬로베니아에서 온 라라는 군인이면서 부동산 중개인도 하는 29살 레이디였다. 슬로베니아의 직업 군인 월급은 너무 적어 정규직이 아니고 부동산 중개인 외에도 부업으로 여러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라라는 30여 개국을 여행하기도 한 여행가이기도 했는데, 걷는 내내 여행하며 겪은 에피소드를 유쾌한 말솜씨로 나눠주었다.

길게 뻗은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순례길

오늘 목적지인 Sobrado dos Moxes의 수도원까지는 약 25km. 5시간 정도 거리인데, 우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모처럼 웃고 떠들며 25km를 걸어왔다. 보통 10km쯤 걸으면 중간에 길 어딘가에서라도 걸터앉아 쉴 법한데 얘기하며 걷느라 그야말로 쉴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10km쯤 걸었을 때 먼저 출발한 파스타를 주셨던 그 봉사자님과 조우하여 잠깐 이야기하느라 천천히 걸었을 뿐 그 외에는 동네 운동장을 빙 둘러 걷듯이 20km를 걸은 후에야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파스타 봉사자님을 뵈었을 때 나를 보시자마자 어제 온 미국인 봉사자들 이야기를 하셨다. 말씀에 따르면, 미국 플로리다에서 온 봉사자분들은 이곳 스페인까지 1등석 비행기를 타고 왔으며 비아리츠 공항에서 여기까지 차를 렌트하여 도착함과 동시에 트렁크에 한 달은 먹을 수 있는 많은 음식과 지내는 동안 그렇게까지 필요할까 싶은 용품들, 알베르게기증할 것들 등 많은 물질적인 것과 함께 도착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1등석 비행기를 타고 오다니"반복하신 것을 보아 파스타 봉사자님 눈에 그들은 휴가 차 봉사를 하러 오신 것처럼 비친 모양이다. 거기다가 파스타 봉사자님은 카미노를 걷고 계시다가 중간에 2주 동안 알베르게에서 봉사를 하신 후 오늘 다시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것이니, 미국에서 온 봉사자 분들이 당신과는 다르게 보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리라.


어르신들은 국적에 상관없이 다 비슷하신 것 같다.

난 그냥 묵묵히 이야기를 듣는다.

어미닭이 내가 주머니에 병아리를 넣어갈까 싶었는지 다가가니 공격했다. 허락없이 가까이 가서 미안.

라라와 쉬어가기 위해 들린 바 안에 그저께부터 종종 길에서 인사를 나눈 흰머리가 지긋하신 영국인 레이디가 점심을 드시고 계셨다. 처음 뵈었을 때부터 굉장히 낯이 익은 느낌이었는데, 레이디 앞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문득 영국 배우 엠마 톰슨과 매우 닮았다는 것이 생각이 났다. 헤어스타일과 목소리가 여지없는 엠마 톰슨이었다. 정말 엠마 톰슨은 아니었겠지.

라떼와 작은 머핀

카페인 휴식을 취한 뒤 우린 나머지 5km를 걸어 수도원에 도착하였는데, 라라는 오늘 더 걸어 내일 산티아고에 도착하고 싶다고 하여 그렇게 우리의 5시간이 넘는 유쾌한 수다가 끝이 났다. 며칠 도통 기운이 없었는데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것처럼 우연히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오늘의 순례길을 걷게 해 준 슬로베니아에서 온 라라, 콤포스텔라까지 부엔 카미노가 되길.  


라라를 보낸 후 수도원으로 들어와 체크인을 하려는데, 유리안에는 순례자들이 있지만 문은 잠겨 있다. 노크를 하니, 접수창구에 계신 연세가 지긋하신 신부님께서 오시더니 다짜고짜 암호를 대라고 하셨다. "부엔 카미노? 우트리아?" 하고 이것저것 카미노와 관련된 단어를 생각나는 대로 답했지만 모두 틀렸다. 껄껄 웃으시더니 암호는 호스텔이라고 하면서 신부님께서 유창한 영어로 나를 맞아 주셨다.

멀리 보이는 Sobrado 수도원

오늘 머무는 Sobrado 수도원은 2020년 코로나로 알베르게 운영이 중단되었을 때 정부 지원을 받아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하였다고 한다. 주방은 마스터셰프에 나오는 주방같이 반짝반짝 빛나고, 침대는 2층으로 올라가도 1층이 절대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프레임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무엇보다 매트리스가  침대에 눕는 것처럼 편안했다. 돌로 만들어져 많이 춥고 쇠약한 침대 위에서 잠을 잘 이루지 못했던 이전의 수도원 알베르게와 달랐다.


접수할 때 신부님께서 2층에서 자도 괜찮겠는지 먼저 물어봐주신 것 또한 다른 경험이었다. 사실 처음 듣는 질문이기도 했다. 순례자들 대부분은 2층에서 자는 것을 꺼리는데 비교적 젊은 층에 속한 나는 프랑스 길에서 자동으로 2층에 배정되곤 했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을 하신다는 것 또한 배려가 깊다고 느껴졌다. 난 물론 괜찮다고 말씀드린 후 침대를 배정받은 까지 같이 동행하며 신부님께 간단히 수도원 안내를 받았다.

수도원 내부 정원

짐을 정리한 후, 마을은 둘러보고 작은 슈퍼에 들러 쌀, 계란, 채소와 참치캔을 사서 늦은 점심을 만들어 먹었다.

밥을 다 먹은 후 수도원 내부 살펴보았다. 밖에서 볼 때는 수도원이 워낙 커서 성 같아 보였는데, 들어와 보니 내부는 더욱 거대했다. 번호가 매겨져 있어 미술관처럼 순서대로 감상해 본다.

돌로 문양이 세겨진 성당 내부

수도원 건물 전체가 돌로 세워졌고, 곳곳에 조각한 돌기둥을 만들어 놓기도 하였는데 이렇게 큰 건물을 돌로만 짓다니 구경하면서도 감탄이 나왔다. 이곳은 순례자뿐만 아니라 외부인도 방문할 만큼 역사가 깊은 수도원이다.


순례길을 걷고 있다는 이유로 이렇게 역사가 깊은 수도원 한편에서 머물 수 있게 허락된 것에 감사하다. 약 한 달간, 순례자의 신분으로 살면서 순례자이기 때문에 허용되고, 낯선 곳에 받아들여지며, 길에서 순례자가 아니면 경험하지 못했을 특별한 경험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이 났다.


이제 3일 뒤면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에 다시 한번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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