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 방에 코끼리가 있었다. 저녁 8시부터 잠을 자기 시작한 남자분이 코를 어마어마어마한 소리로 골며 잠을 잤기 때문이다. 하필 문 오른쪽에 계셔서 나갔다 들어오는 사람들이 머리를 좌우로 흔드는 것이 보였다.서로 말은 안 해도 머릿속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알베르게를 운영하는 포르투갈 사람인 마리아가 코를 고는 순례자를 위한 방을 따로 만들어야겠다고 한 것이 생각이 났다. 코골이 소음 때문에 알베르게를 피하는 순례자들도 있으니 말이다.
아침에 수도원을 떠나면서
한 방에 2층 침대를 여러 개를놓은 알베르게에서 잠을 자는 순례자들에게 그날 밤 같은 방에서 코를 고는 순례자를 만난다면 그날은 그냥 운이 나쁜 날 일뿐, 딱히 어떤 방안은 없다. 물론 아침부터 저녁까지20~30km를 걸어온 많은 순례자들이 코를 골기 때문에 대부분은 귀마개를 소지하고 있다. 하지만 어젯밤과 같은 경우는 귀마개를 뚫는 코골이의 수준이기 때문에 그런 날은 그냥 잠자는 것을 포기하곤 한다. 이렇게 좋은 매트리스에서 잠을 푹 자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
8시가 되기 전, 수도원을 나왔다. 일기예보에는 없던 비가 내리기 시작해 우산을 어깨에 걸치고 걷는데 아기자기하게 장식된 시골집 정원에 정신이 팔려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백설공주가 살고있을 듯한 정원
그 사실을 누군가 뒤에서 큰 목소리로 불러서 알게 되었는데, 오늘은 이 상황이 조금 달랐다. 나는 길을 알려주시려고 내게 오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걷다가 갑자기 너무 가까이 다가오시더니 지팡이로 내 가슴팍을 툭툭 치며 스페인어로 뭔가를 계속 말하는데, 알아들을 순 없지만 이상한 느낌에 순간 몸을 돌려 무작정 반대방향으로 뛰었다. 심장이 떨려 잘 뛰지도 못했다.
다행히 인근 주민들이 있어 그쪽으로 뛰어가 길을 저기 이상한 사람이 있다고 하니 자기들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한다. 길을 다시 물어본 후, 걷고 있는 다른 순례자 무리에 끼어들어 같이 걸었다. 뒤를 돌아보니 여전히 그 할아버지가 내 쪽으로 쫓아오고 있었는데, 다른 순례자들이 내 이야기를 듣고 다 같이 쳐다보니 그제야 뒤돌아 가버렸다.
큰 일은 없었지만 불쾌한 일이었던 것은 분명했다. 순례자들한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고 프랑스 길에서도 북쪽 길에서도 한 번도 없었던 일이라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산티아고를 이틀 앞두고 이런 일이 생기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순례자 무리와 조금 같이 걷다가 감사 인사를 하고 난 좀 더 빨리 걸었다. 걸으며 나쁜 일을 잊고 싶었다.
츄러스와 커피를 같이 마시면 좋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걸으니 찻길 옆에 카페가 한 곳 나왔다. 카페에 들어가 카페콘레체를 시켰다. 그런데 이곳은 커피를 시키면 작은 츄러스 2개를 같이 주는 카페였다. 작년 프랑스 길에서 콤포스텔라에 도착한 후 들린 바에서 커피를 시키니 츄러스가 같이 따라온 적이 있었다. 이쪽 갈리시아 지방에 있는 바에는 커피를 시키면 츄러스를 같이 내주는 것인가 싶었다. 사실 내일모레에도 그때 그 바에 갈 작정이었는데, 오늘 이렇게 미리 커피 잔 옆에 츄러스를 보니 좀 전의 안 좋은 기분도 조금 사라졌다. 마음에 안정을 되찾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몇 걸음 앞에서 걷고 있었는지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보니 이전에 만났던 호주에서 오신 노부부다. 이 분들께 어제의 코골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하니 이 분들은 그것 때문에 알베르게가 아닌 호텔을 주로 이용하신다고 한다. 그리고 나처럼 일요일에 콤포스텔라에 도착할 예정이신데, 콤포스텔라에서 며칠 지내시다가 마드리드에서 온 아들과 만나 피에스테라까지 함께 걸을 예정이라고 하셨다. 카미노를 함께 걷고 그 순간을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 부러운 일이다. 나도 순례길을 함께 걷고 나눌 사람이 생길까 궁금하고 기대된다.
나뭇가지 사이로 빛이 들어오는 모습이 멋있는 순간
이번에는 헤어질 때 콤포스텔라에서 만나자고 작별 인사를 한 후 그렇게 길에서 다시 헤어졌다. 그다음에는 다시 어제 인사를 나눈 엠마 톰슨을 닮으신 영국 어르신을 만났다. 길에서 계속 어르신들을 만나니 차례차례 아침 문안 인사를 드리는 느낌이란 생각이 잠시 들었었다. "How are you, ma’am?" 하고 문안인사를 드리니, 오늘 기분이 조금 이상하다고 대답하셨다. 그래서 어디 몸이 안 좋으신 건가 했더니, 콤포스텔라가 가까워오니 이제 이 순례길이 끝난다는 사실에 기분이 뒤숭숭하시다는 것이다. 나도 작년 프랑스길에서 같은 기분이었는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면 기분이 나아질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Maybe " 하고 대답하시는 엠마 톰슨을 닮은 영국 레이디와의 대화는 늘 짧고 간단명료하다.
Arzua 마을과 종종 보이는 표지판
오늘 도착한 마을은 프랑스 길과 북쪽 길이 만나는 지점에 있어 숙소가 굉장히 많은 마을이다. 그래서 그런지 숙소에 한국인 분들도여럿계셨다. 오랜만에 한국어로 대화를 한다.
이 마을에서 콤포스텔라까지는 38km밖에 되지 않는다. 어떤 순례자는 오늘 이 마을에 머물렀다 내일 콤포스텔라에 도착하기도 하고, 나처럼 이 길을 하루 더 늘리고 싶은 순례자는 그다음 마을인 A Rua에서 하룻밤 잔 뒤 20km를 걸어 콤포스텔라에 도착한다. 콤포스텔라에 도착하는 것이 기대되지만 빨리 끝내고 싶지는 않은 양가적인 마음에 나도 마음이 싱숭생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