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막창 사드릴게요.”
큰일 났다. ‘대구 음식’에 반사적으로 떠오른 것이 안지랑 막창 골목일 뿐, 안지랑에 가본 적도 없었다. 막창은 8년 전이 마지막이었다. 나는 막창을 구울 줄 몰랐고, 3개월 후에 만날 지도 모를 사람은 서울에 사는 학생이었다. 학생에게 집게를 넘기기 면구스럽다.
“탄다, 타. 고기 아무나 굽는 거 아니다.”
석 형의 말에 집게를 김에게 넘겼다. 내가 들고 있던 양념돼지갈비 한 조각은 이미 까맣게 타 있었다. 김은 가위로 탄 부분을 오려내며 능숙하게 구웠다. 그는 완연한, 남자 어른이었다.
나이에는 사회적 기댓값이 따른다. 마흔 넘은 남자라면, 실비 보험이나 청약에 대해서 척척 대답을 내놓을 수 있고, 장례식에 가서 조문할 줄도 알고, 운전도 할 줄 알고, 고기도 구울 줄 안다. 특별한 것이 아니라 살면서 자연스럽게 새겨진 흔적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못해서 마치 술․담배를 하는 10대만큼 내 나이에서 어긋난 듯하다. 불량하진 않아도 부족해 보인다. 아니, 40대는 뭔가를 쌓아 놓았어야 하므로 부족한 것이 불량이다. 불량 주제에 남자 어른이 구운 양념돼지갈비를 홀랑홀랑 잘 주워 먹었다.
굽는 고기는 사람과 사람을 잇대는 매개 음식이다. 대학 시절, OT, 신입생 환영회, 개강파티, 체육대회, 종강파티 등, 회식의 명목은 다양했으나 1차가 삼겹살로 시작될 경우 양념돼지갈비로 마무리되는 형식은 엇비슷했다. 내성적이고 술 못 마시는 사람에게 회식은 현실지옥이었지만, 주머니가 빈곤한 시절이어서 불맛 밴 고기 맛으로 불만을 상쇄했다.
새내기 때는 선배들이 ‘네가 뭘 알겠니?’라며 집게를 가져갔고, 내가 선배가 되었을 때는 후배들이 알아서 구웠다. 사회생활 초기 회식도 엇비슷하게 굴러갔다. 물론, 간혹 내가 굽기도 했지만 영 엉성했다. 고기 굽기를 학습하기 전에 사회생활이 단절되었다. 명절을 포함해도 사람과 먹는 끼니는 1년에 스무 번이 안 될 정도의 혼자로 존재했다.
작년 기준으로 10년 간 사람과 고기를 구워 먹은 것은 열 번 안팎인 듯하다. 가족들과 한 번, 학원에 있을 때 몇 번, 잠깐 몸을 담았던 소모임에서 몇 번이었다. 정작 친구들과 먹은 적은 없었다. 각자 자기 세계에 뿌리를 내리며 자기 가정 일구기 급급한 시간이었다.
나만 아니었다. 나는 내 세계에 뿌리를 내렸다기보다는 부레옥잠처럼 떠다닐 뿐이었다. 겨울이 오지 않은 덕분에 스물 몇 살에 머무른 채 나이만 먹었다. 일이 많을 때는 돈을 벌었고, 일이 적을 때는 글을 벌었다. 글은 거의 읽히지 않았으니 내 적자폭은 착실하게 늘어, 나는 스스로 겨울을 품었다.
그런데 올해만 벌써 두 번째 양념돼지갈비였다. 100여 일 전에는 석 형이 교수로 채용되어서 김과 함께 만났고, 두 번째는 석 형과 석 형의 연구실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며 강의도 겸하게 된 김, 석 형의 수업에서 특강을 하게 된 송이 모이는 자리에 내가 끼었다. 그날도, 다음날도, 다다음날도 일이 없는 것은 나뿐이었다.
석 형이 있는 학교에 한 시간 일찍 도착한 나와 송은 김의 수업을 청강했다. 여자 친구와 헤어진 날 밤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소리 지르던 김이 과제 발표가 아니라 대학 강의를 하는 것이 농담 같았다. 송과 카톡으로 수업 재미없다며 노닥대다가 10분 만에 나와 교수 방을 거리낌 없이 들락거리며(석 형도 수업 중이었다) 냉장고에서 아무 거나 꺼내 마시는 것도 농담 같았고, 말하기를 잘한다고 생각한 적 없는 송이 강연에 능숙한 것도 농담 같았다. 아무 기능 없이 그 하루에 끼여 있는 나만 농담이 아니었다.
“꿈만 꿨어요.”
우리의 만남 다음 날, 수면제를 타러 가서 의사에게 이 말을 하고 나올 때, 양념돼지갈비를 새롭게 이해했다. 인생은 양념돼지갈비처럼 살아야 했다. 약 없이는 선잠만 반복되는 밤처럼 생은 난삽했다.
살코기만이 전부가 아니다. 비계가 윤기를 더한다. 어렸을 때는 비계를 떼고 먹어 부모님께 혼나곤 했지만, 지금은 비계의 의미를 혓바닥과 이로 이해한다. 부드럽고 찰진 질감이 살코기에 고소한 풍미를 입힌다. 여기에 ‘단짠’이 더해진다. 알맞은 간에 단맛이 몸을 섞으니 맛에 빈틈이 없다. 양념은 제 몸을 태우며 불까지 고기에 입힌다. 맛의 절정이 육즙으로 흘러내린다. 여기에 각종 쌈 채소에 고추, 마늘, 양파가 더해져 온도와 영양의 균형을 잡는다. 이후 밥과 냉면은 선택이다. 폭식하지 않는다면 더없이 풍요롭고 건강한 식사다.
석 형과 김, 송은 꿈을 위해 현실을 등한시 하지 않았고, 현실을 위해 꿈을 등한시 하지도 않았다. 석 형은 교수가 되기를 원해서 교수가 되었고, 김은 석 형의 뒤를 밟고 있고, 송은 원하던 대로 공무원이 되었다. 다들 결혼했고, 약속이나 한 듯이 스마트폰 바탕화면에는 아이가 있었다. 경상도 남자들의 대화 속에서 자식들 이야기는 ‘아는 잘 크나? - 어. 잘 큰다.’ 수준으로 축약되지만, 축약할 수 있는 힘으로 그들은 그들의 인생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맛있어져 있는 사실을 모른다. 맛보지 못한 내가 더 잘 안다.
나는 인생을 꿈으로 채우고자 했다. 공무원이 되겠다며 도서관에 처박힌 학우를 안쓰러워 한 시절도 있었다. 인간은 먹고 싸다 죽으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나’를 실현하려고 태어난다는 것을 강박적으로 추종하던 때였다. 나의 ‘나’는 글이었고, 글이 아닌 모든 것들은 잡스런 비계 취급했다. 친구들에게 먼저 전화하지 않는 것도, 연애에 관심을 두지 않은 것도, 취향을 가꾸지 않은 것도 글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돌이켜 보면 내가 물고 빤 것이야말로 비계였다. 몸체 없는 윤기는 이토록 쓸모없었다.
범박하게 말하자면, 인생은 먹고 싸다 죽는 게 다다. 이제 와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고 하더라도 지워진 2030은 보상받지 못한다. 영겁의 우주 속에서 인간은 하찮은 농담이다. 그런 찰나에 ‘나’ 따윈 무의미하다. 그저 행복해야 했다. 현실과 꿈 중에서 무엇이 살코기가 될지 모르나 적정 비율을 맞추고, 취향을 양념처럼 뿌려야 했다. 내가 방치해둔 살코기는 저품질 육포가 되었다. 이제야 비계와 양념을 그리워하며 후회를 수분처럼 빨아들이고 있으니 곧 부패할 것이다.
지금도 나는 이런 잡문이나 쓰고 있을 때가 아니다. 밥 벌어 먹는 사람으로서 이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경영으로 전환을 모색할 때다. 하다못해 유튜브 영상이라도 제작해서 홍보에 이용해야 한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돈이 될지 알지만, 제 버릇 개 못 주고 있다. 집-도서관의 수험생이 나이 먹어 집-공부방의 N수생이 되었다. 내가 구운 인생은, 타지도 않고 익지도 않고 미지근한 채로 남았다. 물먹은 인생, 불맛이 그립다.
3개월 후에 만날지도 모를 학생은 스물일곱 살이다. 강연을 하고 싶어 교수가 꿈이다. 석박사 동안 생계를 일반 회사에서 이을지 사교육에서 이을지를 고민 중이다. 나를 어른 대접하며 어른의 말을 기대할 텐데, 나는 막창도 굽지 못하는 당신 또래의 늙은 장수생에 불과하다. 아니,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건 반면교사니, 나쁘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최소한 나처럼 살지 않기를 바란다.
막창 맛은 기억나지 않는다. 8년 전까지 너덧 번 먹어 본 게 다다. 지금은 막창도 양념돼지갈비처럼 내가 읽지 못한 맛의 입체적인 조합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어쩌면, 내 학생이었던 당신에게 그걸 배우게 될지도 모르겠다. 당신의 자소서는 그 나이의 나보다 알찼다. 그러나 불 앞에 서지도 못한 내게 막창 굽는 방법을 가르쳐 주길. 그리고 당신, 제대로 익어가길, 이제 시작이니. 어쩌면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