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린 민트 초코 콜드 브루가 맛있어요.”
어떻게 그 이름을 외울 수가 있나? 너는 20년 후에도 그 취향을 유지할 수 있을까? 여중생의 천진난만한 스타벅스 취향은 위태로웠다. 부모님 덕분에 형성된 아비투스였다. 너는 취업 여부에 따라서 편의점으로 취향을 하향해야 할지도 모른다.
스타벅스에서 취향을 빚을 수 있는 적정 연봉은 얼마일까? 스타벅스나 그에 준하는 커피 매장을 가득 채운 대학생들을 볼 때마다 드는 의문이다. 학자금 대출 벅차다며? 취업 안 된다며? 한 손에 스타벅스를 쥔 채로 징징대는 ‘우리 힘들다’는 설득력 없다.
나 때는 지금보다 실업이 덜 심각했는데도 라떼에 시럽 넣어 마실 생각도 못했다. 식후땡으로 150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마셨다. 250원짜리 고급 커피는 엄두도 못 냈다. 카페인이 긴급할 때는 300원짜리 박카스 유사 제품을 마셨다. 김밥 한 줄 기준 15%짜리 식후땡이 이제는 150%로 폭등한 사태에 꼰대질이 참아지지 않았다.
알뜰함이 궁색함이 되고, 과소비가 플렉스가 되는 시대, 기호품에 관대해졌다. 한국은 더 이상 먹고 살기 위해 허리띠 바싹 졸라매야 하는 개도국이 아니므로 라떼 이야기는 꼰, 꼰, 꼰, 꼰이다. 그러나 실상은 썩 여유롭지 않다. 2020년 기준 월 평균 근로 소득은 320만 원인데, 중위 소득은 242만 원이다. 월 250만 원을 못 버는 사람이 절반 이상인 나라에서 짜장면보다 비싼 음료의 존재 이유는, 사치다.
소비는 주관의 영역이다. 내가 6,100원짜리 음료를 무모한 비용으로 치부하는 만큼, 한 번 읽고 꽂아두기만 하는 12,000원짜리 책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돈은 사회적 표준이 아니라 개인의 만족감에 지불하는 수단이다. 어쩌면, 사치는 만족감을 채우는 세련된 방법인지도 모른다.
사실 중위 소득 노동자도 1인 가구라면 월 10만 원쯤의 소박한 사치는 감당할 만하다. 희소성에 끌려 다니며 상대적 빈곤의 악순환에 빠지지 않는 한 사치가 일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내 메마른 30대로 반증한 바 있다. 가성비의 소비는 삶을 기능성 생물학으로 축소시켰다. 명품까지 가지 않더라도, 요플레 뚜껑을 핥지 않고 버려도 되는 여유에서 ‘나’는 기능으로부터 해방된다.
나는 내 경제력과 무관하게 스타벅스에 못 간다. 4,500원짜리 아메리카노는 ‘그래도 지구는 도는’ 문제다. 내 산수는 ‘3아메리카노 < 1짬뽕’이다. 결코 짬뽕에 맞서서 안 될 것이 감히 우리 동네 맛집 짬뽕 7,000원에 육박하는 것을 보면 배알이 꼴린다. 사람들과 어울릴 때는 관계의 세금 내는 치는 셈 친다. 그러나 얻어먹을 때조차 그 돈이 아깝고 억울하다. 부정에 굴복한 기분이다.
스타벅스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일상에 틈입했다. 감사했다. 아이스아메리카노 10잔, 아이스아메리카노 2잔+케이크 세트 2개 쿠폰이 쌓여 있다. 선물 받은 것을 남 줄 수 없어서 오롯이 내 몫이었다. 학생들과 나눠 마실 수 있지만 공부방에서 스타벅스는 멀었고, 집 근처에 스타벅스가 있지만 시간이 맞지 않았다. 커피를 들고 지하철을 탈 수 없어 출근길에도 살 수 없고, 오후 3시 이후로는 커피를 마시지 않아 퇴근길에도 살 수 없었다.
스타벅스에 가기 위해서는 사람을 만나야 할 텐데, 올해는 5개월 간 사람을 여섯 번쯤 만났다. 쿠폰을 써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무장되어 있지만, 하필 스타벅스가 없었다. 한 잔짜리 아이스아메리카노야 노력하기에 따라 올해 안에 소비할 수 있지만, 커플권은 참, 힘들다. 2인 세트 쿠폰 중 하나는 작년 8월에 받은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 선물 받은 ‘라떼+조각 케이크’ 쿠폰 덕분에 스타벅스에서 책을 읽은 적 있었다. 커피만 있었다면 테이크아웃하고 말았겠지만, 조각 케이크를 집에 가져 오는 수고가 번거로운 김에 나도 ‘된장 놀이’를 해볼 작정이었다. 된장맛은 기대 이상으로 쏠쏠했다. 촌스럽게도, 감각적 도시인, 세련된 허영으로 점철된 인스타그램 맛을 느껴버린 것이다. 그러나 스타벅스는 스타벅스를 소비하는 이미지가 유통되는 도떼기시장에 지나지 않았다. 대체 거기서 어떻게 공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30분도 못 채우고 나왔다.
커피는 여전히 아침 점심의 식습관이다. 믹스커피에서 카누로 바꾼 지는 세 계절이 지났다. 마시다보니 신맛이 엷어지는 적정 수위를 알게 되었다. 나는 신맛보다 구수한 맛을 선호했다. 다른 브랜드 커피와 달리 스타벅스에는 탄 누룽지 맛이 났으니 내 기호에 가장 잘 맞는 편이었다. 또한 스타벅스는 내가 고마워해야 할 곳이어야 했다. 술을 못 마시는 내게 저녁 식사 뒤풀이를 대체해준 구원이었다. 커피는 가성비가 떨어지는 식음료라도 되지만, 술은 독극물이었다. 회식 마다 ‘우리’의 이름으로 술을 사약처럼 들이키는 사태는 ‘롤린 민트 초코 콜드 브루’보다 부당했다. 왁자지껄 흥청망청한 분위기도 어지러웠다. 그러나 스타벅스 덕분에 저녁 모임 뒤풀이를 커피로 대신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아저씨들끼리 스타벅스에 가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스타벅스는 내 취향이 되지 못하고 있다. 내 가계부에 ‘롤린 민트 초코 콜드 브루’가 일주일에 너덧 번씩 찍혀도 무리 없을 만큼 먹고 사는데도, 나와 스타벅스 사이에 그어 놓은 선이 지워지지 않는다. 아직도 내게는 부족한 모양이다. - 사치할 수 있는 용기.
행복을 기준으로 본다면, 알뜰한 인생이야말로 시간 과소비인지도 모른다. 나는 생활에 써야 할 시간까지 생존에 과투자 해왔다. 오늘도 시간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헐값에 팔렸다. 나는 죽음에게 내어줄 가축이 아니므로 내게 귀한 것을 먹여야 한다는 것을 학습할 때도 되었건만 습관은 힘이 세고, 스타벅스는 사치품이다.
밀려 있는 쿠폰이 내게 새 습관을 만들어줄 수 있을까. 스타벅스 소비 적정 연봉 같은 고리타분한 생각으로 골이 따분해진 생활감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최소한, 올해 안에 커플 쿠폰 두 장은 모두 소비할 수 있를. 오늘은 커피 마시기 좋은 날씬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