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바집 - 수컷들의 식사

by 하루오

아마도 평일 오전 11시쯤 시작되는 전국적 고민, 점심 뭐 먹지? 어차피 갈 수 있는 식당은 거기서 거기이므로 객관식이다. 내 선택이 곧 정답이지만 마땅히 끌리는 데가 없어 난해하다. 정답을 확신하기 전에 점심시간이 되어버려 어영부영 메뉴가 정해진다. 살고 싶은 적 없이 태어난 관성에 떠밀려 살아가듯 점심 메뉴는 오답으로 성실하다. 오답은 급식이 부럽다.


나는 그냥 식사가 하고 싶다. 모든 끼니가 대단할 필요는 없다. 하루 세 번 일일이 귀하기는 피곤하다. 그것도 매일. 사실 지갑의 여력도 없다. 그렇다고 대충 먹겠다는 것은 아니다. 노동과 노동 사이에 찍힌 온점이면 족하다. 온점은 지루한 문장의 끝과 지루할 다음 문장의 시작 사이에 작은 숨구멍 같은 것이다. 이 숨구멍 속에서 자취생의 집밥보다는 낫고, 가격은 낮은 수준의 적당함을 허기와 타협하고 싶다.


공부방 근처에서의 점심은 애매했다. 가장 가까운 백반집은 2인 이상 손님만 받아서 갈 수 없었다. 그 다음 가까운 텐동집은 인스타감성의 요리를 팔았지만 노동 사이의 점심을 굳이 그 가격으로 치르고 싶지 않았다. 300미터 이내에 돼지국밥집, 중국집, 돈가스 가게가 있었지만 우리 동네보다 1,000원 더 비싸면서 맛도 덜해서 무난하되 사 먹기 억울했다. 50미터를 더 걸으면 김밥, 햄버거 가게 있지만 신호등 두 번 더 건너기 귀찮았다.


만만한 게 도보 100보 안의 편의점이었다. 공부방의 주식은 편의점 샌드위치나 도시락이 되었다. 샌드위치는 허기에 대응하는 미숙한 응급처치였고, 도시락 역시 밥이 적어 빛 좋은 응급처치에 지나지 않았다. 무엇을 먹든 온점심이라기보다는 반(半)점심이었다. 앞 문장도 충분히 길었는데 반점 찍고 얼렁뚱땅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자니 피로가 길다.


인생사 새옹지마, 아파트 공사장이 내 점심을 구원해줄지 몰랐다. 공부방은 밥을 벌어먹는 시간보다 내 서재로 이용되는 시간이 더 많았다. 공사는 평일 낮에 이뤄졌으므로 내 일터를 침해하지 않았지만, 내 서재를 망쳤다. 지반을 다지는지 종일 ‘땅’, ‘땅’ 대는 진동이 층간소음처럼 울려댔다. 규칙적인 리듬 덕분에 그럭저럭 적응해나갈 뿐, 가능하다면 공사 업체의 파산으로 공사가 영원히 중단되길 소망했다. 이 날선 감정을 함바집이 퉁쳤다.


함바집은 편의점 맞은편에 생겼다. 소설에서나 읽었지 실물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공사장 귀퉁이 가건물에서 억센 아주머니가 고군분투하는 풍경으로 상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존 빌딩 1층 간판 자리에 ‘OO함바집’ 현수막만 걸어 놓아 시한부임을 드러냈다. 통유리 외벽은 허리 정도만 가려졌고, 그 위로는 내부를 볼 수 있었다. 오픈 주방에 모든 인테리어는 간소했다. 메뉴판도 없었다. 특수 목적 식당이라는 생각에 방문을 머뭇거리다가 편의점 도시락이 떨어진 어느 날, 중국집까지 가기 귀찮아 물어나 봤다. 여기서 밥 먹어도 되나요?

사장인지 직원인지 모를 예순 언저리의 아주머니가 빈 테이블을 훔치다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네. 행주를 움켜쥔 손을 놀리면서 나를 빤히 바라봤다. 먹을 거냐, 말 거냐. 귀찮게 하지 말고 밥이나 먹고 가라는 무심함에서 밥 정도는 제대로 먹게 해주겠다는 자신감을 읽었다. 잡상인 취급당한 기분이었지만, 나는 얼른 지갑을 꺼냈다.


군대 급식소 같았다. 은색 스테인리스 급식판 대신 뷔페용 플라스틱 접시에 모든 음식을 덜어 먹었다. 밥, 국, 육고기나 생선 기반 메인 반찬, 김치,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지만 구색은 갖춘 세 가지 밑반찬으로 구성되었다. 애초에 특별히 맛있을 수 없는 메뉴였다. 특별할 것 없는 것들은 오랜 세월 단련된 손맛으로 그럭저럭 모나지 않는 한 끼를 완성했다. 짬뽕이 7,000~7,500원인 동네에서 6,000원으로 얻을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점심이었다.


단, 남자 기준에서다. 식사를 대하는 남자와 여자의 태도는 달랐다. 남자보다 여자가 음식에 더 집착했다. 여학생들과 친해졌다 싶으면 수업 시간에 먹는 이야기가 자주 나왔다. 책이나 제시문에 음식명이 나올 때마다 어 이거 맛있는데-나 그거 먹어 봤는데-우리 동네에 가게 있는데-그것보다는 이게 더 맛있는데-저녁에는 뭐 먹기로 했는데-난 이거 먹을 건데-쌤 배고파요. 여학생들은 뜬금없이 뭔가가 먹고 싶어졌고, 그걸 들은 누군가는 진지하게 상대해줬다. ‘그래서 어쩌라고?’의 남학생반과 상반된 분위기였다. 임산부들이 먹는 것에 서운함을 느끼는 것에 공감할 수 없어도, 여중생들을 보며 여자들에게는 그냥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맛있는 요리를 먹으려고 작정하지 않는 한, 남자들의 식사 눈높이는 낮았다. 남자에게 식사는 배터리 충전에 가까웠다. 초등학생 때부터 점심은 속도전이었다. 입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을 후딱 집어넣고 운동장에 나가야 했다. 여자들은 식사에서 말로 관계적 행위를 했지만, 남자들은 운동장에서 땀으로 관계적 행위를 했다. 거주지 근처에서 자녀를 돌보며 채집했던 여자와 거주지 멀리 나가 사냥해야 했던 남자의 생태가 유전자에 남은 것이다. 직장은 현대의 사냥터이므로 본능적인 식습관이 우러나온다. 자영업자들이 괜히 2030 직장인 남성 손님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함바집 식사 시간은 남성성의 진창이었다. 남자의 행위는 목표의 달성과 실패로 설명된다. 사냥터에서의 식사 목표는 관계가 아니라 허기 제거다. 식사는 쉬는 시간이 아니므로 얼른 식사를 끝내고 쉬어야 했다. 땅, 땅, 소리는 11시 55분 이후에 멈췄고, 함바집에는 12시 30분쯤에만 가도 제법 한산해서 혼자 4인 테이블을 차지할 수 있었다. 기다릴 것 없이 바로 내 몫을 내가 원하는 만큼 먹었다. 인부들은 삼삼오오 무리지어 먹더라도 왁자지껄하지 않았다. 대체로 티비 뉴스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수 있을 정도로 먹는 일에 집중했다. 학생들이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것처럼, 내가 일부러 공부방에 나와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처럼, 나는 이 목표 지향적인 식사의 진창에서 입맛이 돌았다. 본능의 일체감은 최고의 인테리어였다.


여자는 드물었다. 건설현장의 성비를 감안하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재수생 남학생들이 없는 것은 의아했다. 편의점 건물에 중형의 재수 학원이 있었고, 인근에 독학재수학원도 많았지만 점심때는 편의점만 북적거렸다. 이곳 재수생의 끼니는 그리 궁색하지 않았다. 삼각김밥에 컵라면만 먹는 것이 아니라 음료, 치즈, 핫바 등이 곁들여졌다. 그 돈이면 함바집이 효율적이었다. 어린 만큼, 내가 함바집에 가졌던 거리감을 더 크게 느끼는 모양인가 본데, 다행이다. 재수생들이 몰라서 내 점심은 매번 여유롭다.


잔반은 남기지 않았다. ‘내가 음식물 쓰레기통은 아니잖아?’라며 마음껏 잔반을 남기는 것을 내 안의 유교와 도교는 허락하지 못한다. 내가 먹어야, 식재료들은 재배/사육된 목적을 이룬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식재료들의 실존적 우울에 공감하지 못하는 소시오패스적 윤리는 밥맛없다. 어차피 나도 삶의 목적에서 위배된 지 오래라서 잔반과 동병상련으로 연대한다. 매번 과식하게 되는 것은 음식을 과하게 담은 내 책임이다.


식사의 마무리는 입구에 비치된 무료 자판기 커피였다. 설탕과 크림이 들어간 커피를 끊은 지 5개월이 넘었지만, 함바집의 식사는 자판기 커피로 마침표를 찍어야 할 것만 같았다. 마침표는 투박한 포만감을 달달함으로 도포했다. 그 어이없는 힘으로, 누군가들은 자신의 노동 소득을 평생 모아도 살 수 없는 아파트 짓는 일을 견딜 것이고, 나 역시 내 생에 사지 못할 아파트 만들어지는 소리를 견딜 것이다. 정답은 아니지만 오답도 아니라는 안도감이면 충분하다. 잘 먹었다.


집 근처에 이런 식당이 있다면 과연 몇 번이나 갈까 싶다. 그러나 사냥터에서는 필요하다. 그 덕분에 보잘 것 없는 졸고를 사냥했다. 다음 사냥감은 ‘다이어트’인데, 함바집은 썩 도움이 되지 못한다. 사장님 손맛을 버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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