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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Dec 23. 2022

혼자 사는 지긋지긋한 평화

“쌤, 소개팅할래?”

“어떤 사람인데요?”


비혼은 정답이 아니다. 번식 탈락의 오답이다. 다양성과 등권성을 등치 하며 도덕의 탈을 쓴 자기만족은 현실을 곡해한다. ‘가치’는 우열을 전제하고, 가치에 값이 매겨진 질서를 이미 ‘사회’라 이른다. 유재석과 내 가치는 비교조차 민망하다.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한다면 당연히 내 쪽이다. 인간은 직관적으로 생명의 경중을 산술한다. 생명권, 나아가 인권은 발견된 것이 아니라 발명되었고, 발명품의 가치는 상대적이다. 나는 열등한 삶의 양식, 비혼이다.


번식 실패를 열등감으로 치환하지는 않는다. 열등함은 상대적 위계일 뿐, 살아 있는 한 존엄성 최저 기준 등급 컷은 넘은 셈이다. 인간은 다양한 방식으로 열등해질 수 있고, 알파 인간이 아닌 절대다수의 인간에게 열등함은 삶의 보편 양식이므로 열등감을 느낄 이유가 없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있으나 마나 한 익명으로서 존엄하다. 더군다나 나는 내 선택만큼의 인생을 살고 있으므로 내 열등함은 공정하다. 나는 지금 내게 주어졌던 연애 자원을 제때, 제대로 활용하지 않은 책임을 지는 중이다. 예상보다 무겁지만 감당 못할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감당하기 간편해서 장래가 절망적이다.


인간의 본질과 실존 다툼은 유전자 앞 키재기다. 무엇이 진리인지 모르나 인간이 유전자 전달 기계임은 100% 사실이다. 인간은 유전자 연합체가 세대를 갈아타며 영속되는 껍데기다. 결혼-출산-양육은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Evolutionarily stable strategy, ESS)이다. 유전자 연합체는 번식 기계를 조정하기 위해 행복 호르몬을 분비한다. 로맨스나 모성/부성은 옥시토신과 도파민의 확장된 표현형이다. 마약을 제외하면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가장 보편적 방식이어서 인류뿐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생물은 자식에게 중독됨으로써 유전자의 명령에 충실해 왔다. 자식이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비합리적 애착은 ‘네가 태어났을 때가 내 생애 가장 기뻤던 날이다.’로 무수히 증언되었고, 자식에게 스스로 등골을 빨려 주는 희생으로 증명해 왔다. 위기 상황에서 암컷과 새끼부터 구하는 것은 신사도가 아니라 유전자 생존 득실에 따른 본능이다.


물론, 유전자의 요청에 응하는 것이 정답인지 확신하기 힘들다. 닭은 유전자의 성공이 개체의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2018년 모 뉴스 기사가 인용한 논문에 따르면 닭은 상시적으로 전세계 230억 마리가 사육된다. 닭 다음으로 많은 조류인 홍엽조가 15억 마리로 추산되므로 닭 유전자는 압도적으로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그 해 전세계에서 닭 650억 마리가 도축되었고, 한국에서도 2018년 이후 매년 10억 마리 이상 도축(한국육계협회)되었다. 육계의 수명은 6주 정도고, 수평아리들은 태어난 날 분쇄된다.


기혼자들은 결혼을 닭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묘사하곤 한다. 결혼은 미룰 수 있을 만큼 미루는 게 좋다는 투정은 주인 잘 만난 산책 중인 개가 쓰레기통을 뒤지는 개의 자유를 부러워하는 것만큼의 기만이다, 한겨울에. 농담으로 흘릴 수 있는 행복의 확실성을 듣고 있으면 사람의 상상력이 얼마나 빈약한지가 체감된다. 실연 당하면 이별 노래들이 모두 내 이야기 같듯 사람은 경험해야 공감할 수 있다.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 갈 때의 해방감은 청소년 시절 부모님이 집 비울 때 해방감에 빗대진다. 게임기 살 때 아내 허락 받아야 하는 유부남의 한탄도, 경력 단절을 선택해야만 하는 유부녀의 억울함도 내 경험에서 살을 더하면 얼핏 그려진다. 그러나 당신들은 혼자가 지연되는 공허함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 같다.


미혼이 기혼보다 스트레스가 적다는 통계는 아마 사실일 것이다. 타인은 지옥을 함의한다. 자식이든 배우자는 유전적 근연도나 정서적 근연도가 높을지 모르나 각 개체는 결국 서로 분리된 개별자다. 내 개별성을 침범하지 않는 지옥이 없는 삶은 한없이 평화롭다. 그래서 나는 나영석PD가 구축한 힐링 예능류를 보지 않는다. 이미 여백이 그득한 일상에 여백을 한 시간 남짓 들이붓는 것은 자해였다. 이 또한 배부른 소리이며, 누군가에게 기만이겠지만, 별일 없는 오늘들이 지긋지긋하다.


독신은 외롭다? 최소한 내 경우는 아니다. 나는 엄마를 제외하면 그 누구에게도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내 모든 식사 약속은 상대 덕분에 잡혔다. 귀찮지만 고맙고 고맙지만 역시, 귀찮았다. 카톡 알림음을 파리 소리로 지정했다. 극단적인 내향성 인간이 아니더라도 문명 안에서는 외로움에 진지하기 힘들어졌다. 외로움은 유전자가 개체에게 사회성을 강제하는 압력이겠지만, 유튜브, 넷플릭스, 스포츠, 게임, SNS 덕분에 외로움은 간단하게 상쇄되었다. 언 발에 오줌 누는 격이지만, 따뜻한 오줌은 무한히 쏟아졌다. 서울에는 둥지가 없고 지방에는 먹이가 없다는 시대에 비혼과 비출산은 문화적으로 안정한 전략(Culturally stable strategy, CSS)인지도 모른다.


다만 시시해졌다. 산책을 하고, 차를 마시고, 책을 보고, 생각에 잠길 때, 요즘엔 뭔가 텅 빈 것 같았다. 일상이 반복되며 똑같은 것들이 겹겹이 누벼질수록 텅 빔의 밀도가 높아졌다. 기혼자들은 여행이라도 가라고 했지만, 그들에게 간절한지도 모르는 혼자가 나는 지나치게 많았다. 어딜 가나 그곳은 혼자로 그득한 일상 공간에 수렴했다. 결국 일상으로 누군가를 초대해야 해결될 문제겠지만, 지독한 살어리 살어리랏다, 얄리얄리얄라숑 얄라리얄라, 굿바이 얄리다. 매일 조그마한 무덤을 쌓는 기분이고, 그 옆에 핀 꽃의 이름은 라젠카다.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려 탄식은 내일을 가린다. 멸망의 무감함이 지배하는 이곳, 희망은 날개를 접었다.


뭘 해도 재미가 미미했다. 인간이 뭔가를 욕망한다면 금기 덕분인 듯하다. 가정은 지키고 싶은 가장 큰 금기이고, 그 금기 안쪽에서는 바깥 것들이 반쩍거려 보일 것이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것이 모두 별은 아니다. 인공위성의 잔해도 반짝인다. 아니, 진짜 별은 가까이에서(갈 수도 없지만) 보면 죽는다. 사람이 살 만한 곳은 당신들이 이룬 지구, 9.8N의 세계다. 내가 사는 곳의 중력은 무언가를 잘 끌어당기지 못한다. 좋아하던 게임, 만화, 드라마를 군것질 거리와 밤새 뒹굴어도 어렸을 때 먹은 초콜릿 한 조각 쾌락만 못하다. 마카롱을 들이부어야 평형이 맞춰지는 달달함이 그립지도 않다. 귀찮음으로 응집된 평화의 응결핵을 지키는 실천 원리는 하나다. 행복의 최댓값만 포기하면 된다.


비혼은 쾌락의 공리를 증대시키는 방법이다. 결혼은 행복도를 높일 수 있는 선택지이되, 고통 확률도 높인다. 00-10년 혼인상태생명표(통계청)에 따르면 결혼이 이혼으로 종결될 확률은 25%가 넘는다. 개인주의가 강화되고 이혼에 관대해진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 숫자가 더 작아질 것 같지는 않다. 이혼에 이르는 과정과 이혼 근처를 버티는 가정을 감안하면 결혼의 행복 기댓값은 음수일지도 모르겠다. +100 ~ -100의 높은 산포도 사이에서 어떤 산수가 발생할지 알 수 없다. 반면 미혼은 높은 신뢰 수준에서 산포도가 0에 밀집된다. 고통도, 쾌락도 밋밋한 완벽한 개체 보존, 비혼이다.


행복의 산포도 0에 수렴하는 자포자기의 평화. 심심하지도, 외롭지도, 우울하지도 않지만, 참을 수 없이 무가치해지는 평화가 내 새끼 입에 들어가는 치킨 한 조각을 회득하기 위한 세계와의 쟁투보다 가치 있을까? 하루하루 적당히 잊히는 것에 만족하며 ‘그저 있을 뿐’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돌멩이처럼.


“OO시, 공무원. 나이는 쌤하고 비슷하지 싶다.”

“OO시요?”

“뭐 어때서? 주말에 만나는 거지.”

“제가 주말 근로자라…….”
 몇 년 만에 들어온 소개팅은 시작도 못했다. 그렇게 별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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