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팬클럽 회원의 미스터 삼미슈퍼스타즈
누군가 내게 일해라, 절해라는 게 싫다. 네가 뭔데, 나에 대한 간섭은 일절 불허하고 싶다. 먹고 살자니 일은 어쩔 수 없어도, 불심(佛心)보다는 불심(不心)으로 살았으니 절은 떠나면 그만이었다. 최고, 최선들의 바깥을 살며 아웃사이더를 자처했다. 인사이드의 왕자는 강백호에게 맡기고 나면, 나는 감나라, 배나라의 고요한 왕, 갑(甲)이다. - 최선은 거들 뿐.
일단은 퉁쳐서 ‘반(反)최선주의’라고 명명하자. 주의(主義)는 주의(注意)가 필요할 텐데, 주의(注意)를 빼야 하는 주의(主義)는 이상하지만, 전여친이 주희도 아니고, 최선주도 아니니 뭐 어떠냐 싶다. 반최선주의는 이미 많은 청년들이 연애를 포기함으로써 꽤 실천되고 있다. 물론 그런 이름의 여친이나 남친을 갖고 있다면, 축하한다(슉, 슉슉, 슉 ㅣㅏㅗㅏ).
포기, 갓 담근 배추김치처럼 아삭한 말이다. 우리를 다시 살게 하는 마법이다. 우리가 을병(乙丙)으로 전락하는 을병(乙病)에 전염되는 것은 최선주의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만족의 낮은 눈높이다. 배추김치가 비싸면 깎두기, 깎두기도 비싸면 단무지를 먹어도 되는 무던한 식성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포기를 모르는 불꽃남자는 정대만에게 맡기고, 나는 포기를 잘 아는 물꽃남자 할 거다. 기대만 기품처럼 꺼뜨리면 된다.
최고와 최선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갑이 있다. 갑에 닿기를 포기하는 것이 감나라, 배나라의 방위 전략인 것이다. 굳이와 적당히 사이에도 섬이 있다.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200리보다 가깝다. 내 섬은 지도에서 지하철역 입구까지 도보 17분으로 안내된다. 그 누가 자기네 땅이라 우기면 떠나면 그뿐이다. 언제든 떠날 수 있기에 고향 같은 곳이 되어버렸다. 13.5년, 내 생에 가장 오래 머물렀고, 내년까지 계약 연장했으니 14.5년을 채울 예정이다. 내 섬의 월세는 17만원이다. 관리비도 없다. 21만 원에 계약해서 낡아가는 도배/장판 값을 깎아 온 것이다. 작년에 갱신하며 퇴실 시 청소비 5만 원 조건이 추가되었고, 올해 2월 청소비만 6만 원으로 올리기로 하며 재계약하기로 구두 합의되었다. 중심가에서 보면 공터와 공원으로 막혀 외지고, 방도 좁고, 주차 공간도 협소하다. 계약 만료에 노심초사하는 쪽은 건물주쪽일 것이다.
최선과 최고를 포기한 대신 나는 최고의 이웃, 공실을 얻었다. 세입자들도 대체로 나처럼 혼자를 파먹는 족속들이라 조용했다. 창을 열면 옆 원룸이 아니라 숲이 있었다. 아침에는 7미터 앞에서 새소리가 짱짱하고, 초여름밤에는 멀리서 개구리가 개굴거리고, 가을밤에는 풀벌레소리가 싱싱했다. 게다가 남향이었다. 지도에 안내되지 않은 샛길을 이용하면, 지하철역 입구까지 도보 10분이 안 걸리니 사실 섬인가 싶다. 갑을 좇는 사람들은 내 섬을 보지 못했다.
지인들도, 친구들도, 엄마도 내가 돈이 없어서 이곳에 유폐된 것으로 오해들 했다. 13.5년 전에는 절반 이상의 사실이었지만, 지금은 이 건물을 안 살 뿐이다. 건물주의 아우라는 빼자. 내 방 크기의 원룸 6개, 미투 4개의 지방 변두리 작고 낡은 건물이다. 나를 오해하는 지인들과 친구들이 사는 아파트값에도 못 미친다. 임대 수익과 건물의 감가상각비를 합산하면 내 기준에서 투자처로 매력적이지 않았다. 매달 세입자들과 부대끼는 것은 1년에 한 번 명절에 본가에 가야 하는 일만큼 번거로웠다.
전세든 매매든 아파트에 드는 것도 비슷한 이유로 꺼려졌다. 정착은 책임을 동반했다. 좁게는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을 구매/유지해야 하고, 넓게는 이웃과 사소한 갈등도 손수 해결해야 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보일러가 고장나든, 문손잡이가 고장나든, 옆방이 시끄럽든 내 알 바 아니었다. 집주인에게 전화 한 통이면 해결되었다. 1월 24일 연휴 마지막 날에 본가에 다녀 와 보니 화장실 문이 고장나 있었다. 1월 25일 오전, 고쳐졌다. 내가 들인 비용과 수고는 없었다. 나는 세입자라기보다는 주거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님’이었다.
서비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떠나면 그뿐이었다. 언제나 떠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유목민 감성이 장착된 정착민이 되었다. 내가 머무는 동안 세 번째 건물주를 맞았다. 부동산에 관리를 맡기던 이전 건물주들과 달리 그는 손수 건물을 관리하던데, 이 건물을 산 것을 후회하진 않을까, 묻고 싶다.
‘싼 것’에 갑의 길이 있다. 싼 것을 사용하면 언제든 버릴 수 있는 권력을 획득한다. 21세기 선진국 대한민국에 싼 게 비지떡인 시대는 저물었다. 한국인이 2022년 1인단 명품소비 세계 1위를 기록할 정도로 눈에 기름기가 꼈을 뿐, 싸도 기본은 했다. 나는 스마트폰도 중국산으로 5년째 쓰고 있다. 1년만 써도 괜찮다는 각오로 시도했다가 2번째 스마트폰도 같은 브랜드로 구매했다. 중국산도 통화, 인터넷, 카톡, 음악, 사진, 동영상 뭐 하나 빠지지 않았다. 그 가격에 지문 인식은 덤이었다. 배터리 수명과 충전 속도는 2년마다 수명이 급격히 떨어지는 한국산 스마트폰보다 나았다. 보안 이슈는 ‘Made in China’에 대한 거부감을 합리화 하는 수단으로 이해했다. 어차피 한국인의 개인정보는 어둠의 세계에서 20원 안팎에서 거래되는 공공재였다.
“쌤은 왜 보세만 입어요?”
학생이 물었다. 그럴 만도 했다. 학생의 아버지는 최선, 최고의 정점에 선 사람이었다. 강백호, 정대만은 최적을 누릴 권리가 있다. 나는 주연이 될 생각도, 자격도 없다.
“돈 없으니까.”
돼지 목에 진주 걸어봐야 돼지다. 마음속에 사직서를 징징 거린 채 ‘나를 위한 플렉스’는 뒤틀린 인과다. 가격은 필요의 본질이 아니라 ‘덤’들이 결정했다. 스마트폰은 접히지 않아도 괜찮았고, 신발에 명품까지도 아니고 나이키가 찍히지 않아도 괜찮았다. ‘없어져도 괜찮은 것’을 위해 ‘없으면 안 되는 나’를 노동에 팔아넘기는 산수는 아무래도 수지맞지 않았다. 물건에 몰입할수록 을의 마음에 강하게 종속된다. 애초에 소유는 갑옷이 되지 않는다. 없어도 괜찮은 것에 있어야 좋은 것을 지불하는 한, 소치 동계 올림픽에서 김연아를 딴 은메달의 기분을 알지 못할 것이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아니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어차피 노력이 미덕인 시대는 끝났다. 노력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말은 근력이 생산의 원천인 시절에나 통했다. 노력이 아니라 자본을 지배하는 자가 잘 먹고 잘 사는 시대다. 금융자본이나 유명세 같은 사회적 자본이 결핍된 20세기적 땀 냄새 나는 노력들은 먹고사니즘의 안정을 위해 월요일 아침의 마음을 끊임없이 크로노스의 시간에게 먹이로 던져줄 뿐이다.
기술의 발달로 사회는 충분한 잉여물을 생산해냈다. 중요한 건 생산이 아니라 분배다. 누구나 노력하지 않아도 되었고, 어차피 노력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모두의 노력은 과잉 경쟁으로 개인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뿐이다. 88만원 세대가 중년으로 편입되며 사회적으로 폐기된 후, 2030 세대는 자신도 부모만큼 살지 못할 것을 예감한다. 1020들은 이를 목격하고 감내할 각오중이다. ‘하면 된다’는 성장주의 시대의 망령이다. 해도 안 되는 시대다. 중요한 건 꺾여도 괜찮은 마음이다. 노력을 덜하고, 나를 더할 카이로스의 시간이 필요하다. 다시, ‘굳이’와 ‘적당히’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자유가 있다.
물론, 영광의 시절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강백호도, 정대만도 아니면서 영광까지 바라는 것은 뻔뻔하다. 슬램덩크와 3점슛은 그들에게 주고, 그냥 평범한 점프슛만 해도 안 될 건 없다.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난 다음에는 슬램덩크도, 레이업도, 점프슛도 같은 2점이다. 혹시 아나, 2만 번쯤 쏘다 보면 버저비터의 순간이라도 맞이할지. 최선을 다하지 않는 그냥 그런 성실함으로 최고를 추구하지 않는 차선주와 썸을 탈 때다. 그 정도 삶에게라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
화장실 손잡이 고쳐주러 오셨다가
건물주 : 아이고, 장판 누르고 도배는...
하루오 : 저 나가면 하세요. (다 돈인데)
건물주 : 언제까지 있으려고?
하루오 : 글쎄요.
2024년 2월까지 계약 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