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으로 응원하기. 너의 전국제패를 위하여
친구의 생환이다. 네가 늙지 않아서 나도 늙지 않았다. 친 박수보다 칠 박수가 더 남았을 때 떠나버리고 생사를 전하지도 않더니, 26년 만에 불쑥 내 심박수를 늘린다. 손바닥을 비빈다. 연체된 박수를 몽땅 쳐줄 것이다. 해야 할 일들을 세금처럼 내며 살아가다가 기다릴 것이 생기다니, 내가 아직 뜨거울 수 있다니, 새삼 놀라웠다.
정말 좋아하나 보다. 이번엔 거짓이 아닌가 보다. 어쩌면 내 영광의 시절에 보내는 응원일 것이다. 난 헛된 시간을 보내었고 시간은 날 쓰러뜨리고 미국보다 먼 중년으로 나를 추방했다. 이곳에서는 무엇을 제압해야 인생을 제압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포기를 잘 아는 남자는 주저앉으며 ‘농구가 하고 싶어요.’라고 고백하는 기분으로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관람했다. 그것도 두 번이나.
나는 극장과 근친성이 낮다. 토니 스타크가 남긴 여운을 따라 1년에 한두 번, 이제는 마블을 손절했으니 당분간 갈 일 없을 거라 여겼다. 극장에 가는 일은, 귀찮다. 극장은 여가 생활하는 곳이 아니라 남녀가 노니는 곳이었다. 영화 관람은 노는 절차 중 하나가 될 수는 있어도 그 자체로 목적이기 아쉬웠다. 2시간 관람 때문에 1시간 이상 이동과 기다림에 시간을 쓰는 것은 타산이 맞지 않았다. 하지만 <슬램덩크>였다. 너는 갑자기 떠났고, 나는 아직 듣지 못한 이야기가 많았다.
나는 ‘뜨거운 코트를 가르며 너에게 간’ 적 없었다. 연재 중일 때는 <드래곤볼>만 못했고, TV에 방영될 때는 야간 자율 학습 중이었다. 중학생 때 농구공을 튀기며 놀았지만, 농구를 했다기엔 민망했다. 학령인구가 지금의 거의 두 배에 달하던 시절, 중학교에는 운동장 구석에 그물 없는 농구 골대 두세 개를 나란히 세워 놓았고, 초등학교에는 그나마도 없었다. 림 하나에 공 예닐곱 개가 들락거렸으므로 제대로 된 농구는 거의 불가능했다. 아파트 벽에 가상의 림을 그리고 그 앞에서 나는 드리블이나 자유투하며 노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드리블도, 슛도 별로인 데다가 비리비리해서 체육 시간에 편 가르기 하면 마지막에 남는 축에 속했다. 농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드래곤볼>은 선천적 추억이라면, 너는 후천적 추억이었다. 초사이어인1, 2, 3의 순간의 전율은 지금도 기억하지만, 네게서 전율한 것은 네가 떠나고도 몇 년, 혹은 십 몇 년이 지나서다. 나는 너를 보고 또 봤다. 일본판 애니메이션도 밤새 정주행했고, 단행본은 열 번도 넘게 봤다. <드래곤볼>보다 친숙해서 큰형 같은 채치수가 일개 고등학생으로 만만해졌을 때에야 너는 내게 감동이었다. 너를 읽는 동안 내 10대의 농구가 너로 보정되었다. 철이 일찍 든 아이는 농구공을 사달라고 엄마를 조르는 것에도 단호한 결의가 필요했고, 림을 독점하려고 새벽에 일어나 인근 중학교 운동장에 나갔고, 강백호의 자유투도 흉내냈고, 비리비리한 친구들을 모아 림 아래에서 각자의 왼손을 거들게 했다.
너와 <드래곤볼>은 다르다. <드래곤볼>은 신규 고객 유치로 유치해졌다. 주인공 중의 주인공 손오공은 싸움밖에 모르는 멍청이로 부관참시당했다. 작가의 완결 다짐이 몇 차례 번복되는 바람에 파워 인플레도 감당하지 못해 ‘뇌절’이 거듭되었다. 내 10대의 전율, 초사이어인이 싸구려로 폐기되었다. 지금의 손오공은, 마인부우로 마무리 되는 내 <드래곤볼>의 망령이다. 그러나 너는 그 시절 그대로의 너다.
자막이 아니라 더빙으로 봤다. 음향 품질이 떨어지더라도 너는 너여야 했다. 너는 내게 쇼호쿠의 사쿠라기 하나미치로 존재한 적 없었다. 오직 북산의 강백호였다. 윤동주가 헤었던 별처럼, 채치수, 정대만, 송태섭, 서태웅이어야 했다. 내 이름을 덮어버린 숫자의 흙먼지를 네 이름들이 털어준다. 인생에서 숫자는 거들 뿐이어야 하지만, 나는 살아도, 살아도, 풋내기여서 내가 숫자를 거들었다. 내가 N회차 관람이라는 비합리성에 굴복 당하게 될 줄은 몰랐다.
펜 선으로 인물이 그려지며 다섯 명의 주인공이 걸어 나오는 오프닝에서 초사이언1, 2, 3에서 폭발했던 전율이 눈가로 촉촉이 고여 들었다. 그날, 그곳에서 추억은 거들 뿐이었다. 26년의 수직선이 한 점으로 응축되며 블랙홀처럼 과거를 당겨내는 시간의 물리 법칙은 우주적으로 경이로웠다. 산왕전은 닳도록 아는 이야기지만, 극장판에 삽입된 송태섭 서사는 지루했지만, 어차피 혼자 갔지만, 꼭 극장이어야 했다. 대사가 제거된 산왕전 마지막 12.7초가 영상으로 구현된 고요는 극장의 공간감 속에서 시계 소리로 입체화되었다. 우리 사이에 생략된 시간이 무덤처럼 쌓인 팽팽하고 묵직한 심박 속에서 나는 ‘왼손은 거들 뿐’을 들었다.
너를 보고 온 날, 나는 뜨겁게 달아오르되 조금 쓸쓸했다. 너를 공유할 친구가 없었다. 친구들 모두 네 존재는 알지만, 네게 관심 없었다. 미술을 전공하고 애니메이션을 취미의 한 축으로 삼고 있는 친구는 네가 너무 유명하다는 이유로 너를 배척했다. 신현철을 넘지 못한 채치수가 대학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체력이 보강된 불꽃남자 정대만과 농구 그 자체 서태웅 중 누가 더 높은 연봉을 받게 될지, 강백호와 김판석이 부딪치면 어떻게 될지, 슛이 보강된 송태섭은 no.1가드가 될 수 있을지, 영화 관람 후일담을 시끌벅적하게 유치해지고 싶지만, 나는 커뮤니티와 유튜브를 훑으며 너를 공유하는 익명의 이야기 부스러기를 조용히 관음했다.
내가 관음하는 동안 너는 관객수 150만 명을 돌파했다. 처음에는 그 숫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호들갑은 ‘천 만’의 몫이었다. 그러나 역대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관객 순위 5위라는 뉴스가 새로운 불꽃을 당겼다. 네가 지배하기를 바랐다. 1위 <너의 이름은>(379만 명)은 전국제패만큼 막연하지만, 2위 <하울의 움직이는 성>(261만 명)은 산왕을 쓰러뜨린 기적처럼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26년, 누군가는 아들을 데리고 올 수 있는 시간이다.
코로나 펜데믹 기간 동안 영화표 값이 반발심이 들 정도로 올랐으므로 2004년의 261만 명, 2017년의 379만 명은 의미가 다르다. 2017년의 379만 명은 그해 흥행기록 16위지만, 2022년 16위는 198만 명이다. 2023년 1월 29일까지 너는 182만 명을 기록하며 2022년 기준 18위로 올라섰다. 시대를 보정하면 너는 <너의 이름은>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다. 그러나 너라면 시대를 초월해서 제압했으면 좋겠다. 전국 제패에는 실패했지만 이번만큼은 1위였으면 좋겠다. 천재니까.
2회차를 예매했다. 같은 극장, 같은 관, 같은 자리에서 너를 응원할 것이다. 표만 예매하고 관람하지 않는 영혼 없는 ‘영혼 보내기’ 따위는 하지 않는다. 시간 쪼개자니 귀찮지만, 진심을 더한다. 너와의 대면은 나의 생환이다. 그 누구와도 너를 공유할 수 없으니, 네게 너를 누벼, 너에게 가득한 나를 응원한다. 점프슛도 같은 2점이지만 이왕이면 역시 슬램덩크다. 네가 시시하지 않아서 다행이고, 고맙다.
또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