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스타벅스라니? 내가 스타벅스라니! 불안 두 알이 떨어졌다. ‘네들은 얼마나 벌기에 그런 걸 마시나?’에 매달린 ‘경멸’과 ‘혐오’가 그란데 사이즈 컵 안에서 녹아내렸다. 불안 두 알 씻은 구정물 같은 아메리카노는 참회의 맛이었다. 사실상 보급형 고행자의 삶을 살고 있으니 자아실현이려나. 새로워진 일상은 몸에 잘 맞았다.
기프티콘 때문에 시작된 일이었다. 학부모님들께서 이런저런 이유로 기프티콘을 주셨다. 감사하고 난감했다. 쓸 일이 없었다. 커피는 기호품이라기보다는 카페인을 공급해 주는 기능성 식품이었다. 영양제를 먹으러 특정 장소에 가지 않듯, 카페인 섭취 때문에 카페에 가는 것은 부당했다. 최근까지도 카페에서 공부하는 것은 집중력 떨어지는 사람들 나름의 최선이거나 문화적 허영 취급했다. 혼자 마시는 카페인 국물은 테이크아웃으로만 정당했다.
나는 출근할 때는 커피를 들고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어 살 수 없었고, 퇴근할 때는 밤이라 살 수 없었다. 사람 만날 일도 드물었고, 선물 받은 것을 남 줄 수도 없었다. 기프티콘 유효 기간 연장하기가 성가셨다. 각종 앱 알람 우측 상단에 붙은 빨간 동그라미를 참지 못하는 인간에게 쌓여 가는 기프티콘은 미뤄둔 숙제 같았다.
불면으로 아침을 버티기 힘든 9월 어느 날, 집에 커피가 없어서 마트에 1,000원짜리 커피를 사러 가려다가 숙제를 의식했다. 여름이 길어졌다지만, 오전 햇살은 그리 따갑지 않은 날이었다. 아메리카노 한 잔 테이크아웃 해서 공원 벤치에서 마시다가, 커피 한 잔의 여유, 그 진부한 말에 문득 가을이 걸렸다. 카페에서 마시는 무모함 한 잔이 어때서, 라는 생각에 일교차 큰 날 늦은 오전의 따스함이 고여 들었다. 잠이 덜 깬 덕분이었고, 역시, 가을이었다.
주택가 스타벅스에 책 들고 갔다가 시끄러움에 댄 적 있었지만, 대학교 앞 스타벅스에 개점 시간에 맞춰 간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9시면, 수업이 있는 학생은 강의실로 갈 테고, 수업이 없는데 학교에 일찍 올 학생은 없었다. 굳이 그 시간에 카페에 나온다면 카공족 정도일 것이었다. 예상은 그럭저럭 적중했다.
스타벅스는 작업하기 최적 조건은 아니었다. 매장 음악은 크고, 템포가 빨랐다. 그러나 이미 나는 모든 소리를 소음 취급하며 클래식조차 낮은 볼륨으로 듣던 때와 달리 틈만 나면 폰을 만지작댈 정도로 산만해져서 우리는 동색이었다. 문화적 허영의 중심에 선 사실에도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내 방-공부방뿐인 일상 공간에 틈입한 새로운 공간이 신선했다. 새로운 공간은 새로운 자아를 요청했고, 나는 ‘네들이 얼마를 벌기에 그런 걸 마시든’에 그럴 수도 있겠거니, 응답했다.
기프티콘을 다 쓰는 동안 가을이 갔다. 겨울에 내 돈 주고 갈 일 있겠나 싶었지만, 매주 2, 3회 출근도장 찍을 정도의 일상으로 자리 잡혔다. 스타벅스는 커피가 아니라 문화공간이었다. 노트북 들고 가서 3시간쯤 뭉개면, PC방 이용하며 꽤 괜찮은 커피까지 마셨으니 4,500원은 비쌀 수 없었다. 당근마켓에서는 아메리카노 쿠폰 3,500원에 거래되었고, 텀블러까지 들고 다니면 커피값까지 깎아줬으니 실질 구매가는 더 헐했다.
스타벅스에 지불하는 비용이 점점 늘어갔다. 톨 사이즈 아메리카노만 마시다가 이젠 그란데 사이즈로 업그레이드했다. 주거래 쇼핑몰에서 월 2장 사이즈업 쿠폰을 제공하기 때문에 그란데 사이즈에 익숙해지다가 보니 지금은 두 손 안에 가득 잡히는 컵의 부피감이 든든했다. 당근마켓에서 매수한 기프티콘으로 구매하면 샌드위치도 편의점만큼 저렴해져서 종종 먹었다. 베이글은 억울했다. 선물 받은 것 때문에 크림치즈와 먹어 본 것이 입에 맞아버렸다. 베이글 정가 3,000원은 하늘을 뒤집고 또 뒤집어도 부당했지만, 크림치즈가 더해졌을 때의 단순한 풍미가 속수무책으로 좋았다. 스타벅스에 12월 식비 16.6%를 지불했다. 월초에는 아직 기프티콘을 썼을 때니 실질 사용 비율은 더 높을 것이다.
우리 동네 짬뽕 값에 준하는 비용을 카페에서 조식으로 쓰는 과소비는 내게 없던 산수였지만, 이제는 뭐 어쩌라고 싶다. 스타벅스 자체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가성비를 떠나, 개방성이 인상적이었다. ‘아이폰, 맥북 미지참 시 출입 금지’라는 농담은 허영의 배타성을 떠올리게 하지만, 정작 스타벅스는 프리퀀시를 손쉽게 주고받게 하고, 특정 기프티콘으로 다른 상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했다. ‘당신이 누구라도 괜찮다’는 듯한 무언의 호의, 스타벅스가 여자라면, 전화번호라도 물어볼 ‘용기’와 ‘열정’ 두 알이 부화할 뻔했다.
직원들의 무관심한 친절도 좋다. 도레미파솔‘라’에 맞춘 음높이로 생기 넘치는 톤의 친절을 구사하는 것은 NPC의 기본 설계 지침이었다. 그러나 요즘 개인 사업장에서 겪는 알바들은 ‘최저시급에 맞는 최저 노동을 하겠다’는 각오가 선 것처럼 건성건성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한 쪽 귀에 에어팟을 끼지 않은 것에 감사할 정도로 불성실했다. 노동은 팔되 친절은 팔지 않는 무뚝뚝함은 키오스크만 못했다. 그게 Z, A세대의 철학이라면, 나는 늙은 M세대로서 그대들과 선을 긋고 기꺼이 꼰대가 될 거다. 꼰대는 나를 익명으로 호명하는 스타벅스의 맹목적인 친절이 편안하다. 당신들의 친절 속에서 나는 성별도, 나이도 잊힌 익명이어서 자유롭다.
매번 개점 시간에 맞춰 가다 보니, 내가 직원들 분포가 파악되듯, 직원들도 내가 특정되나 보았다. 여직원 하나가 나를 아는 채했다. 스몰톡이 덧붙여졌다. 학생과 학부모와 대화에 익숙했지만 여성의 친근한 말투에는 어버버댔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건 익명의 기능이다. 스몰톡을 어정쩡하게 버티다 보면, 순환근무제인지 직원이 교체되었다. 나는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사람이다. 아, 너무 오래된 익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