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밤]을 읽고
오정희에서 김애란으로 이어진 왕좌를 최은영이 계승할 것이라는 기대가 박살났다. 읽는 내내 여자 친구와 다투는 기분이었다. ‘내 기분이 상했으니 네가 틀렸다.’에는 할 말이 없었다. ‘앞뒤 다 자른 네 기분’을 마주한 내 논리는 네게 유해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잘못된 사람이 되었으므로 [밝은 밤]의 작가 최은영을 향한 짝사랑을 접기로 했다. 글밥 먹는 사람들은 내게 삿대질 할 것이다. 감히 최은영을.
어느 순간부터 글밥 세계에 젠더감수성으로 된 여성(女城)이 구축되었고, 젠더감수성은 절대 권력으로서 이견을 압살해 왔다. ‘이십대 개새끼론’의 연장선에서 ‘이대남’은 일베와 근친성으로 이해되었다. 이대남의 시체로 쌓은 성벽을 넘어 이젠 소수자가 된 내 소리를 세상에 전하고 싶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고, 그래도 지구는 도는 것을 외치는 기분으로 쓴다. 잘 가라, 84년생 김지영.
『쇼코의 미소』 때는 김애란 이후 공석이던 소장용 작가를 만난 것 같아 설렜다. 풋풋한 소녀 감성이 사회생활에 메말라가는 30대 아저씨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줬다. 책을 읽고 나면 잡스럽고 시끄러운 것들이 소곤소곤해지며 세상이 부드럽게 느껴졌다. 내 안의 여고생이라도 깨어나는 것 같은 주책맞은 민망함조차 상쾌했다. 그 촉감으로 ‘눈물이 이유가 되는’ 이해할 수 없는 여성의 마음 지도를 읽는 듯했다. 그래서 남성 필독서라고 여겼다. 중고생이든 아저씨든, 책을 읽겠다는 주위의 모든 남성들에게 권했다.
한 번은 우연일 수도 있지만 두 번은 의심스러웠다. 『내게 무해한 사람』에서도 남성은 배제되어 있었다. 물론, 여성만의 세계를 그리며 여성의 목소리를 낼 수도 있다. 오히려 여성 작가, 남성 작가가 자신과 다른 성의 인물을 그려내는 것이 대단했다. 그러나 「601, 602」에서 보여준 남성관은 레디컬 페미니즘을 빼박았다. 80년대 이전 남성성을 현대 남성 일반으로 규정하는 것을 너머 남성을 ‘일베’화했다. 일베에 짓밟혔으므로 차별로 인한 슬픔과 분노에 도덕적 정당성이 부여되었다. 『밝은 밤』은 선한 얼굴로 쐐기를 박았다.
이 책에서도 남성은 가부장의 권위를 누리는 무책임한 가해자였다. 지연의 증조부, 조부, 아버지는 부모 자격이 없었다. 식구를 사랑할 줄 몰랐다. 사랑의 부재는 식구들에게 유해했다. 지연의 희령행은 유해한 것들로부터의 도피였다. 심지어 어머니와도 사이가 나빴기에 공간으로서의 희령은 아무도 닿지 않는 텅 빈 마음의 중심이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삼십 여 년 만에 만난 할머니를 거울처럼 마주했다.
지연과 나는 제법 가까운 사이일지도 모른다. 내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내게 유해했다. 할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명절에도 혼자 취해 혼자 떠들었다. 작은 할아버지나 아버지와 다퉈 차례를 지내기도 전에 명절이 파토 나곤 했다. 할아버지는 젊었을 때는 할머니를 때렸고, 늙었을 때는 술에 취한 채 바닥에 오줌을 누며 할머니에게 밟혔다. 할머니는 오줌을 닦으며 어서 죽으라고 했다. 실제로 먼저 죽었다. 장례식에서 나만 울지 않았다. 그런 인간은 애도할 만한 가치가 없었다.
내 아버지는 할아버지보다는 나았다. 최소한 나를 귀하게 여기긴 했다. 그러나 포악했다. 바람피우지 않고, 처자식 굶기지 않는 것으로 가부장의 도리를 다했다고 여겼다. 자신이 정의로우므로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은 부정(不正)으로 단정했다. 한겨울에도 식구들에게 물세차를 시켰고, 화가 나면 선풍기나 전화기를 내던지거나 유리창을 박살냈다. 사람은 때리지 않았다며 화풀이를 정당화했다. 내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16, 7년 전 어머니 측 증인으로서 법정에서였다. 동생은 아버지와 간간히 연락하는 것 같던데, 나는 굳이 관계를 복원하지 않았다.
할머니와 어머니를 보며 남성은 여성의 기생충 같다고 생각했다. 남성은 여성이라는 숙주에 알을 깐다. 숙주가 있어야 기생할 수 있으므로 숙주도 자손을 볼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자연 성비는 남성이 더 많은 것이다. 나도 남성보다 여성이 편하다. 구멍가게에 가도 할머니가 계산대를 지키는 곳이 더 좋다. 그러나 지연처럼 외골수가 되지는 않았다. 유해한 것들을 솎아내면, 서로 사랑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무해한 것들끼리 안온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텐데 저 유독성 존재는 왜 저리 나대는가, 최은영은 딱 이정도의 이분법 속에 매몰되어 있었다.
최은영은 가련한 피해자의 얼굴로 남성 혐오를 부추긴다. 남성은 일단 불필요한 존재다. 20세기 초, 아직 생산 수단으로서 근력이 절대적 가치를 지닌 시대에 ‘내가 너 밥 굶을 일 없게 할 거야. 너 이제 다신 안 굶는다(p.66)’라며 남성으로부터 경제적 독립을 선언하고, ‘앞으로 내가 널 더 많이 사랑할게. 이제 사랑받는 기분이 뭔지도 느끼며 살아(p.102).’라며 남성을 정서적 연대의 대상에서도 배제한다. ‘어깨에 기대는 사람도, 어깨를 빌려주는 사람(p.300)’도 여성이다. 증조모-새비, 조모-희자, 어머니-명희, 지연-지우는 세대만 다른 같은 조합이다. 심지어 지연의 교통사고에서 지연을 구한 사람은 여성 목수지만, 음주운전을 한 가해자는 성별을 밝히지 않음으로써 남성을 함의한다. 이것이 억측일까, 목수가 우연히 여성인 것이 더 억지일까.
책 뒷면의 소개말처럼 지연은 ‘백 년의 시간을 감싸 안으며 이어지는 사랑과 숨의 기록’자라기보다는 ‘백 년의 차별을 자신에게 껴입히는 피해 의식의 기록’자다. 증조모-조모-어머니 세대와 지연의 이야기를 병치하는 구조를 통해 구시대의 여성차별 이미지가 지연에게 그대로 이입된다. 위안부를 피하기 위해 결혼하는 것은 ‘주인’을 만들어주는 것(p.40),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죄가 있다면 그건 여자로 태어나고, 여자로 사는 것(p.57), 평생 처음 친구가 있는 멕시코로 여행갈 때도 남편 밥을 걱정(p.132)하는 것, 자식의 결혼에서 딸은 ‘가져가는’ 존재인 것(p.216), 중혼한 남자에게 속은 여자에게 잘한 것 없다(p.248)고 비난하는 옛날 냄새를 지연이 물려받는 것이다.
그래놓고, 내 아버지보다 어릴 현재 지연의 아버지를 늙은 일베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피해 의식을 완성한다. ‘너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이렇게 부모 개망신 시켜야지 속이 후련해? 씨발. 이혼이 자랑이야? 니가 뭐 잘난 게 있다고 어른을 가르치려고 들어(p.275)?’란다. 내 아버지도 하지 않을 망언이다. 남편은 바람피우고도 당당하다. 현재의 지연 또래 남성이라면 누구나 이들을 비난할 것이다. 지연은 『82년생 김지영』처럼 ‘우연히’도 그런 남성들만 겪음으로써 가해자 남성을 형상화 한다. 여기에 100년의 역사가 더해지니, 김지영의 경우보다 지독하다. 지연이, 남성이 아니라 귀리나 현미 같은 반려 동물에서 ‘따뜻한 애착(p.335)’을 느끼는 것은 필연이다. 지연에게 남성은 개만도 못한 존재다.
변변치 않은 남자 어른을 겪은 나와 지연이 이토록 달라진 것은 내가 남성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책은 결혼, 출산, 양육의 차별에서 비켜나서 여성의 감성에 주목한다. 그래서 차마 『82년 김지영』에게는 주지 못했던 문학적 가치를 『밝은 밤』에 당당히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연의 문제는 바로 그 감성이다. 과잉감수성이 세상을 오독한다.
지연은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다. ‘어린 내 몸 안에는 외로움이 전기처럼 흐르고 있어서(p.281)’, 행복한 가정을 보고난 날은 ‘그저 십 초라도 좋으니 누군가가 나를 꼭 안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했다.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몰랐을 때부터도(p.273)’. 그러나 지연에게 타인은, 나를 함부로 여기지 않고 귀하게 여기는(p.86 p.216) 사람이어야 하고, 이는 인간관계에서 필요한 덕목일지 모르나 지연은 지나치게 예민하다. ‘해결하기 어려워 보이는 상처로부터, 상처받을 가능성으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정한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사람을 진심으로 깊이 사랑하고 가슴이 찢기는 고통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감정적인 가능성으로부터 차단된 채로 미지근한 관계 속에서 안전하게 살아가고 싶었다(p.298).’며 정서적 거리두기를 실현한다. 심지어 엄마와도 멀어지고, 삼십 여 년 만에 할머니와 가까워지는데도 초식동물처럼 조심스럽다. 지연은 자신을 향한 가해자이자 스스로 피해자인 셈이다.
나는 지연과 달리 외로움을 잘 못 느꼈다. 성별 불문 사람은 피곤했다. 지금 당장 기능하지 않은 것들을 군더더기 취급했다. 누군가로부터 오는 안부 전화도 ‘지금 여기의 나’를 방해하는 무례로 여기는 편이었다. 휴대 전화를 바꿀 때마다 새로 연락처를 입력하지 않는 것으로 인맥을 정리했다. 덕분에 명절을 포함해도 사람과 먹는 끼니는 1년에 스무 번이 되지 않았다. 대신 사람을 만날 때 까다롭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새비 아저씨를 닮았을 것이다. 새비 아저씨야 사람을 좋아해서 사람을 존중했지만, 나는 내가 존중하는 만큼 나도 종중 받고 싶어서 타인을 존중할 뿐이었다. 존중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적정 거리를 만들었다. 내가 결혼하지 못한 것과 혼자 늙어가다 고독사 하게 될 것은 우울한 일이 아니라 내 무능과 폐쇄성이 만들 사회학적 사실이었다. 어쩌면 내가 나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받지 못한다는 절망감의 분풀이로 세상의 절반을 혐오하지는 않는다.
사회학이 배제된 인간의 이해는 자기 감성으로 매몰되어 지연처럼 편협해진다. 조모의 이야기와 지연의 이해 속에 역사는 없었다. 일제 강점기 모두가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니겠지만 독립운동의 중심에는 남성이 있었다. 외부 침략에 무리를 지키기 위해 수컷이 나서는 것은 본능이었고, 위기 상황에서 수컷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것은 암컷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전략이었다. 전쟁도 마찬가지다. 지연의 말대로 전쟁에서 여성이 적군과 아군 모두로부터 강간 위협을 받는 것이 사실일지 모르나 그 여성을 지키는 것도 남성이다. 오히려 남성은 먼저, 더 많이, 죽는다. 지금도 청년들이 군대에서 다치거나 죽는다. 여성이 여성이기에 받는 차별도 존재하지만, 남성도 남성이기에 억압된다. 유해성과 무해성의 기준은 자기중심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 안에서 종합적으로 따져 봐야 한다. 지연의 말을 지연에게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 지연은 남성(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단 한 번이라도 공감해보기는 했을까(p.275).
남성에 비해 여성이 손실에 더 민감하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믿는다. ‘남자가 지질하게’의 편견인줄 알았다. 그러나 공리주의 관련 설문조사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2만 원을 줍거나 잃어버렸을 때, 남자 중학생은 주웠을 때의 쾌락이 여자 중학생보다 더 컸고, 여자 중학생은 잃었을 때 고통이 남자 중학생보다 더 컸다. 표본 19명은 신뢰하기 힘들었지만 서울에 있는 친구 도움으로 중학생(48명), 고등학생(77명)을 통해 실시한 동일한 조사에서 더 극명한 차이를 얻어냈다. 물론, 사교육 강사 차원에서 이뤄진 사적이고 투박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주목해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김지영 이후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젠더감수성은 주관화 된 피해의식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이 글이 고까운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대전으로 간 지연이 남성과 적정 관계를 맺을 수는 있을까? 지연이 희령에서 받은 위로는 거울을 보며 읽은 자기합리화다. 오직 여성으로만 구성된 위로는 나름의 힘을 주겠지만, 그 힘은 편협함도 강화할 것이다. 내가 지연에게 바라는 것은 그저 한국 남자 성기 6.9cm를 은유하는 손 모양 삽화를 보며 은밀히 웃는 구제불능이 되지 않는 정도이다.
나는 지연이 싫다.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더 가증스럽다. 내가 겪은 지연들은 말이 통하지 않았다. 모든 논리는 ‘나는 이렇게 순하고 선한데, 나를 상처 받게 하다니!’로 귀결되었다. 네가 잘못해서 시작된 말다툼도 내 사과로 끝나야 하는 어이없는 사태에 충분히 질렸다. 금성에서 온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아니, 이해할 생각도 없어 보이지만) 화성에서는 납득되지 않은 채로 미안하다고 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 패배를 선언함으로써 당신을 귀하게 여기는 행위다. 화성에서의 승패는 금성에서보다 훨씬 중요하다.
82년생 김지영 씨의 쌍둥이 자매 같은 지연 씨, 당신은 모르겠지만, 당신이 결혼할 수준의 외형을 갖추고 있다면, 지금까지 남성으로부터 아무 이유 없는 양보와 호의도 받으며 살아왔을 것이다. 남성 사이에서는 결코 없을 배려다.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한, 당신은 피해의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그 무심한 온기를 읽을 수 있을 때, 당신 상처를 보다 객관적으로 치유하여 여성이 아니라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최은영, 여전히 싫다. 메갈리아의 적장자 조남주를 물리치고, 왕위에 오른 천재라서 더, 더. 그러나 최은영의 ‘소녀소녀’한 감수성은 할아버지 장례식에서 혼자 울지 않으며 우는 사람을 경멸하던 인간에게도 물기를 돌게 만든다. 여성(女城)의 신하들이 용비어천가를 써대니 지금 가고 있는 길이 바른 길인지 아는 모양인데, 기껏해야 절반의 길이다. 부디 이 무례한 상소가 온화한 얼굴의 폭군에게 닿기 바란다. 그래서 왕이 쓰는 ‘인간’을 통해 이 구제불능의 무감성을 구원해주길 바란다. 내 문제의 해답을 당신에게서 찾아야 하다니, 분하지만 지금은 그러하다.
예상된 낙방이었습니다. 독후감이라기보다는 아주 어설픈 평론에 가까웠으니까요. 게다가 문단에서 절대 정의가 되어버린 젠더감수성에 반기를 들며 심사자들까지 비아냥댔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소수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주지 않을까 싶었지만, 저는 이 세계에서 틀린 모양이었습니다. 여성 독자가 더 많은 브런치에서 이걸 공개해도 되나, 머뭇거리다가 공개합니다.
제 생각에 반박한다면 네, 님 말이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