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루오 May 08. 2023

패배자 치료제 - 바다 독서

[노인과 바다]를 읽고

3~4년에 한 번 주기적으로 복용한다. 일종의 안티에이징이다. 기술은 몸의 노화를 늦췄지만, 마음의 노화를 가속했다. 자본주의 팽창 속도가 만들어낸 불확실성 속에서 나는 꿈꾸지 않았다. 꿈은 위험했다. 나는 손에 쥔 조그마한 현실에 안주하는 자, 벌써 노인이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아니 사실은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체념에 길들여졌다. 가장 높이 나는 갈매기가 떨어질 때 가장 아프고, 꿈이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압도적인 것은 통계적 사실이므로 꿈의 기댓값은 마이너스였다. 꿈을 꾸지 않는 것은 합리적이었다. 헬조선을 버텨온 N포세대는 꿈 대신 소확행을 선택했다. 소박함의 이면에 체념이 자욱했다. 고백컨대, 이 해무는 스산하다. 그 속에 있을 때는 잘 모른다. 산티아고를 만나보면 안다.


바다 독서는 내 소확행이다. 1년에 두 번, 낮 최고 기온 25도 안팎인 봄, 가을의 어느 평일 책 한 권을 들고 바닷가로 갔다. 파도 소리 배경 삼아 커피 하나 입에 물고 아무 그늘에 퍼질러 앉아 느리고, 느리게 읽었다. 작년 가을에 읽은 책이 『노인과 바다』였다. 나는 ‘내가 아니느라’ 지쳤다.


분명 산티아고보다 내가 더 잘 살았다. 훨씬 젊고, 건강하고, 풍족하다. 그러나 산티아고의 꿈에 나타난 ‘사자’가 사실은 내 마음 속에도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나면 나는 초라해진다. 산티아고의 사자는 ‘어흥!’할 것 같은데, 내 사자는 ‘야, 야옹……’할 것 같다. 아니, 들킬까봐 소리 내지 않고 숨어 지낸 것이 사실에 더 가깝겠다. 꿈을 꾸면, 아프니까.


내 사자는 영양 결핍이었다. 나는 직함의 규격에 나를 맞췄고, 맛집 주변의 식욕을 좇기 급급했다. 그것이 ‘나’가 아님은 오래된 노랫말 ‘전화를 하고 차를 마시고 책을 보고 생각에 잠길 때 요즘엔 뭔가 텅 빈 것 같아’에 누군가가 그립지도 않은 채 외로워지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일상으로 초대되어야 하는 것은 ‘너’가 아니라 ‘나’였다. 내 사자는 내 속에서 먹을 게 없었을 것이다.


동명이인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연금술사』에서 산티아고는 ‘자아의 신화’를 멀리까지 돌고 돌아 일상 공간에서 발견했다. 노인 산티아고는 바다의 일상에 누구보다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부이고자 했다. 가난을 숨기는 허세가 처음에는 측은하게 보였지만, 그의 내면에 깃든 사자를 알게 되자 그 허세마저도 건강한 어부의 일상적 자부심에 부합하는 삶의 결로 보였다.


『노인과 바다』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퇴물 취급 받는 노인이 2박 3일에 걸쳐 참치를 잡아내지만 귀환 도중에 상어에게 빼앗긴다. 이 단순함은 생생해서 뜨거웠다. 바닷가에서 읽어보니 헤밍웨이의 언어는 더 파닥거리는 듯했다. 산티아고는 책의 시작부터 끝까지 싱싱한 어부였다. ‘어부가 어부한다’는 사실은 내게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내가 하는 것은 무엇이냐고.


나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논리에 길들여진 사람이라면 애초에 출항하지 않았을 것이다. 낡아빠진 체력과 자신의 몸만큼 낡고 작은 배를 활용한 낚시의 기회비용은 아이의 보조를 받으며 항구의 다른 소일거리를 맡는 것보다 적었다. 실제로 참치를 낚시하는 과정에 배가 부서지고 몸도 상하지만 살점을 빼앗겨 손실이 컸다. 이 비합리성이 주는 뜨거움을 나는 잊고 살았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 없다’고 말한 산티아고와 달리 나는 ‘패배할 수 있을지 몰라도 파멸당하지 않은 채’로 살아왔다. 패배의 지속이 내 일상감이었던 것이다. 산티아고 식으로 말하자면 ‘나는 돈했다’. 통장 잔고의 논리로는 산티아고의 배에 매달린 뼈의 가치를 읽을 수 없다. 그것은 사자의 먹이였고, 나는 살찐 겁쟁이였다.


이미 많이 읽히고 많은 해설서가 나온 책이다. 게다가 고전이라고 하면 고리타분할 것이라는 인식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12살의 자신에게 당당하지 못한 기분이 든다면, 그렇게 자신 안의 노인을 발견했다면, 이 책을 복용하길 권하고 싶다. 이왕이면 바닷가에서 느긋하게. 바다 특유의 광활한 평온함이 내 안의 산티아고를 일깨울 것이다. 먼 바다에 나가보고 싶은 마음이 철썩철썩, 차오를 것이다.




2019년 1월에 수업에 활용하려고 쓴 글입니다. 학생들은 N포세대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N포세대가 등장할 때만 해도 그것이 유표적인 사회현상이었으나 이제는 당연해져 무표적으로 변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N포세대 등장 이후 떨어지는 출산율의 예각이 본격적으로 날카로워지기 시작한 듯합니다. 


딱 한 번, [1인용 식탁]을 가지고 포항 영일대 해수욕장에 가서 완독하고 온 적 있습니다. 주기적으로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코로나가 왔습니다. 그 이후 다시 간 적 없습니다. 오늘도 그렇고, 요즘 바다 독서하기 딱 좋은 날씨지만, 귀찮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늙은 이대남이 메갈리아의 왕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