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학자의 노트]를 읽고
인스타그램을 탈퇴했다. 나는 너무 ‘엔케팔라르토스 우디(Encephalartos woodii)’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엔케팔라르토스 우디가 영국왕립식물원 온실에 수그루 하나만 남았듯이 나도 방구석에서 멸종 중이었다. 이 책을 읽은 후에야 나는 인스타그램 속에서 가짜 영양 생식해 온 사실을 발견했다. 꽃을 피우지 않아도 괜찮을 만큼 삶이 시시해서는 안 되었다. 사실, 무한 초록이 지겨운 지는 좀 됐다.
나는 저출산의 첨단에 서 있다. 지금은 안 낳은 것과 못 낳은 것을 구분할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20대 때도, 결혼 적령기 때도, 아이를 가질 생각은 없었다. 시쳇말로 양육은 ‘힙’하지 못했다. SNS에 자기 아들, 딸 사진으로 도배함으로써 침식당한 자기 인생을 전시하는 사람들이 한심했다. 그들과의 대면 관계에서 그들이 스마트폰에 저장된 자식 사진이라도 꺼낼 때면 난감했고, 우리 대화에 3자(네 새끼들)를 끼워 넣는 무례를 무례하지 않은 것처럼 대응해야 해서 답답했다.
MZ세대 당사자들은 서로 다른 세대를 하나로 묶는다고 투덜대지만, M세대의 큰형으로서 체감되는 Z세대와 우리의 핵심은 같았다. ‘난 나야.’의 자기중심적 인간들이다. Z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신을 죽이고 그 자리를 인간이 차지한 지 몇 백 년 지나지 않아, 인간마저 죽이고 ‘나’를 채워 넣은 것이다. ‘나’는 신성불가침 영역이므로 ‘네가 뭔데 날 판단해?’가 정언명령에 준했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둘 곳 없는 종속들, MZ세대였다.
싸이월드와 인스타그램은 혈통이 같았다. 타인의 존재 가치는 나를 칭송하는 대상으로 제한되었다. 인스타그램에서 나는 꽤 힙했다. 결혼한 친구들은 아이 사진을 올리며 빠르게 촌스러워졌다. ‘아빠/엄마’로 몰개성해지는 친구들과 달리 나는 내 사진으로 나 스스로 나였다. 내가 간 곳, 내가 먹은 것, 내가 구매한 것, 내가 가꾼 몸들로 ‘나는 내가 나일 자유’를 마음껏 과시했다. 내 돈으로 내가 사고, 한 번뿐인 인생 마음껏 즐기는 내게 부러움의 댓글이 달리고 ‘좋아요’들이 꽃처럼 폈다.
좀 더 일찍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보도블록 사이에 핀 제비꽃이라도 자세히 봤다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 지도 몰랐을 텐데. 인스타그램은 적녹색맹을 유발했다. ‘좋아요’는 초록색이다. 내 삶은 그저 ‘좋아요’의 열대 우림이었다. 나는 길을 잃은 지도 모른 채 길을 잃어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이 내게 던진 질문은 단순했다. - 네 꽃은 무엇이냐?
식물에게 꽃은 정체성의 근본이었다. 식물은 대체로 꽃으로 이름이 규정되었다. 꽃이 아닌 것들은 몰개성한 초록이었다. 물론, 자세히 보면 뿌리, 줄기, 잎도 내 상상 이상의 다양성을 보이지만, 사회 속의 익명으로 존재하는 나처럼 숲의 거대한 초록 앞에서는 사소해졌다. 초록빛 미로 속에서 빛깔을 내고, 향을 풍기는 것은 역시 꽃이었고, 모든 초록은 꽃을 향했다.
내게는 꽃이 없었다. ‘좋아요’를 꽃이라고 여겨왔지만, 세밀화로 표현된 다양한 꽃들과 그 꽃이 피기까지의 초록의 구체적인 여정과 사연을 보고 나니 빨간색 하트 모양에 가득 담긴 가짜가 보였다. 수국의 가짜 꽃은 유성화를 둘러싸고 있어 아름다울 가치가 있었지만, 내 가짜 꽃이 두른 것은 서로 ‘좋아요’를 품앗이 하는 성실한 무심함에 불과했다. 나는 김춘수 시인의 그 ‘몸짓’으로 전락한 기분이었다. 나는 그들이 부를 이름이 없었다. 관습적으로 불려온 이름은 한없이 초록에 가까운 권태였다.
나는 생식 생장 하는 종(種)이라는 사실이 새삼 ‘아차!’로 다가왔다. 인스타그램 속에서 꺾꽂이 하듯이 나를 복제했고, 내 복제품마다 달리는 ‘좋아요’의 숫자를 삶의 가치로 환산해 왔지만, 내 복제품은 ‘나’의 과시는커녕 타인의 승인을 구걸하기 위해 위장된 ‘나’이므로 제대로 된 꺾꽂이조차 되지 못 되었다. 인스타그램 밖의 나는 인스타그램 속에 연출되기 위한 존재인양 주객전도 되었던 것이다. 이건 제대로 된 삶이 아니다. 행복의 효율이 나빴다.
식물에게서 배웠다. 그동안 식물을 오해했다. 식물은 외부 변화에 일방적으로 당하는 무기력한 객체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외부에 대응해 나가며 기어이 꽃을 피우고 마는 끈질긴 주체였다. 식물보다 동물이 우월하고, 동물이 인간보다 우월하고, 저 평범한 인간보다 내가 우월하다는 속 좁은 세계관을 철회한다. 식물은 자신의 생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꽃으로의 의지’다. 식물은 나보다 조금 느린 동물이고, 나는 식물보다 조금 빠른 식물이다. 속도의 차이일 뿐, 인간 역시 호르몬으로 작동하는 생명체이므로 ‘꽃으로의 의지’는 생의 당위다.
식물의 다양성을 ‘초록’으로 뒤덮어 버렸지만, 초록은 동색이 아니라 십색이었다. 저마다의 생태 환경에 따라 최적화 된 색깔에 수렴진화 했다. 잎 색뿐만 아니라 잎맥, 잎 모양과 배열 방식도 광합성 최적화 형태로 적응한 것이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돈합성에 최적화 된 형태로 수렴진화 했다. 내 재주와 쓰임에 따라 소득이 결정되고 내 취향에 따라 소비가 이뤄짐으로써 생활사가 형성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인스타그램 속 나는 나잇값 못하는 다른 아저씨들과 동색이었다. 나이를 이겨 먹으려고 하지만 드러나고야 마는 나이의 애처로움이, 이제는 보인다. 좋아요 가득한 스웨그(sweg)와 플렉스(flex)에서 숫자를 빼고 나면 앙상한 중년만 남았다.
돈합성이 곧 행복합성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름에 광합성 효율이 절정이듯, 행복합성이 효율적인 시기가 있다. 이제는 100,000원짜리 한 끼를 먹어도 유년기 100원짜리 과자의 행복감을 충족하지 못한다. 알았기에 숫자로 된 과시에 더 집착했는지도 모른다. 식물이 계절에 맞는 색을 지니듯, 나도 계절에 맞는 색을 찾아야 했다. 유성 생식하는 종(種)이 영양 생식만 지속하니 돈합성 효율이 떨어진 것이다. 열매를 맺고, 낙엽을 떨구는 것이 사계절을 사는 최적 효율이고, 나는 여름이 지났다.
[어린왕자]의 말을 빌리자면, 밤하늘이 아름다운 이유는 별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고, 초록이 아름다운 이유는 꽃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점은 꽃은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피우는 것이다. 북극이나 사막에도 꽃이 피는데, 내 초록빛 감옥에서 꽃을 피우지 못할 리 없다. 명절마다 한 귀로 흘렸던 결혼 잔소리와 심심찮게 들어오는 선 자리가 새삼 감사했다. 뿌리가 먼저이듯 인간이 먼저겠지만, ‘나’는 인간에 선(先)하는 존재이므로 꽃을 향한 결심은 나의 선(善)이다.
초록의 시간을 끝내려고 한다. 생식 성장하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픈 용기가 생겼다. 물론, 내가 결심한다고 될 일은 아니다. 배우자로서의 내 상품성은 꽤 무너져 있다. 그러나 식물이 모든 환경에서 느리지만 최선을 다해 답을 찾아가듯, 나 또한 꽃의 시간을 위해 모든 것을 행할 것이다. 제 아무리 폭염이 거칠어도 가을은 온다. 가을, 겨울이 지나야 다시 봄이 올 것을 안다. 내 봄의 시간, 1,000원짜리 과자에 온 세상을 얻은 듯한 내 아이의 얼굴에서 내 돈합성은 행복 최적 효율에 도달할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의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양극화로 인해 가정을 꾸리기 힘든 시대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가정을 꾸리길 노력하길 바란다. ‘난 혼자도 그럭저럭 괜찮아.’는 사실 비겁한 변명이라는 거, 스스로가 알고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최선을 다한 초록이었다. 상대화 된 행복의 기준에 다다르지 못할 까봐 겁먹고 다음 생장 단계를 회피했을 뿐이었다.
돈도 중요하지만 사랑할 줄 안다면, 꽃은 맺힌다. 독도에도 60여 종의 식물이 살 듯, 척박한 환경에서 어떻게든 살아지기 마련이고, 길가의 잡풀에도 이름이 있듯, 시난고난한 사랑도 ‘의미’가 있다. 부모님이 내게 쏟았던 사랑은 희생 의무가 아니라 행복 합성의 결과였을 것이다. ‘좋아요’의 숫자가 아니라 ‘아빠’ 한 마디 듣고 싶은 마음이 피어난다. 그 체온의 이름이 내 꽃일 것이다. (끝)
다시 읽어보니 딱딱하긴 합니다. 내용도 정리가 덜 된 것 같기도 하고요.
인스타그램은 유지하고 있습니다. 팔로워 64명이었는데, 방금 '단기간 고수익' 스팸들을 삭제하니 58명이 되었습니다. 제가 힙한 아저씨는 아니고, 그냥 밥벌이 홍보용입니다. 독후감 속에서 주제에 맞게 컨셉을 잡았을 뿐입니다.
이 책은 호불호가 크게 갈릴 것 같습니다. '과학적 사실+인문학적 사색'인 것은 맞지만, 그 사색의 깊이 편차가 큽니다. 그러나 세밀화가 자체만으로도 소장 가치 있는 책인 듯합니다. 봄이면 피어 나는 이름 모를 꽃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에게는 추천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빼앗긴 이름에 꽃이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