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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Dec 20. 2022

어벤져스 엔드게임 - 존버맨의 탄생

[적을수록 풍요롭다]를 읽고


네? 제가요? 그런 기분이었다. 나는 지지리 궁상 늙은 자취생일 뿐인데 닉 퓨리가 [적을수록 풍요롭다]의 얼굴로 나타났다. - 자넨 ‘어벤져스’야, 존버맨.


그는 내가 왜 존버맨인지를 차근차근 설명해줬다. 인권․환경 운동가들은 자기 도덕 감수성에 도취되어 선민의식을 웅변하곤 했지만, 그는 나의 언어인 자본주의로 나를 조곤조곤 설득했다. 내가 반박하는 지점마다 재반박까지 완벽해서 내가 존버맨임을 납득해버렸다. 이런 젠장, 귀찮아졌다. 인류가 맞이한 자본주의 엔드 게임(end game)에 필요한 사람은 내가 맞았다.


중위소득 근처에서 오그라든 내 어깨가 펴졌다. 취준생 시절의 PTSD든, 여전한 가난이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나는 이미 성장주의에 매몰된 소비지상주의를 역행해 왔고, 존버맨으로서 앞으로 내 정체성을 강화할 계획이라는 점이다. 나는 고고(枯槁)한 세상에서 고고(孤高)할 것이 아니라 고고(高高)할 것이다.


인류를 위협하는 것은 타노스가 아니다. 타노스가 누군지 모르겠다면, 알렉터, 에일리언, 프리저, 아무튼 우주의 악당을 상상하면 된다. 당신이 생각하는 가장 악랄한 그것, 아마 당신일 것이다. 이 글을 읽을 한국인이라면 세계 1등급 탄소 생산자에 가까울 테니까. 미세먼지의 중국을 기후 위기 악의 축으로 인식하지만, 평균 중국인에 비해 더 악랄한 게 평균 한국인이다. 아, 존버맨인 나는 빼고.


돌이켜 보면 내가 존버맨이 되기 시작한 것은 취준생 시절 편의점에서였다. 삼각김밥과 컵라면이 절반 이상의 점심이었고, 가끔 가장 저렴한 편의점 도시락으로 사치를 누렸다. 뭘 먹든 5분이면 충분했다. 어느 날, 그 5분이 울컥했다. 5분 만에 멀쩡한 도시락 용기가 쓰레기가 되었다! 사용가치가 유효한 것을 쓰레기통에 버릴 때, 나까지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기분이었다. 뚜껑이 닫힌 쓰레기통 속의 깜깜함과 내 암담함이 겹쳐졌다. 내 사용가치가 교환가치로 전환되지 않아 나는 도서관에 쌓인 악성 재고일 때, 도시락 용기는 재활용이라도 되었다.


사용가치가 남은 것을 버리는 일이 껄끄러워졌다. 마트에서 산 버섯이나 고추의 스티로폼 용기, 식수를 마시고 바로 버리는 종이컵, 아메라카노에 딸린 빨대마다 내가 있었다. 내가 나를 버리지 않기 위해 소비를 더 줄였다. 텀블러, 에코백의 습관은 직장인이 되어서도 이어졌다. 다들 7-8년은 되었으니, 탄소 득실에서 본전은 뽑았다. 최근 3년 간 새로 산 옷은 팬티 다섯 장 정도다. 헤져서 구멍 난 것은 버텼지만 재봉 주름을 따라 까만 곰팡이가 슨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 소비는 필요에 충실했다. 나이 마흔 넘어 올 상반기 월 평균 식비가 22만 원이 안 될 만큼 탄단지와 아이들의 문법에 충실했다. 그나마 약해진 기관지 때문에 마시는 도라지배즙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이다. 런치플레이션 이전부터 도시락을 싸 다녔고, 일주일에 한두 번은 찐 고구마로 점심을 대신했다. 먹방 이데아가 시대를 규정해도 맛집의 환상 속에 그대들이 있다고 단정하고 나면, 내 삶이야말로 찐찐찐, 찐이었다. 통풍, 이명, 혈압 약을 달고 사는 배불뚝이 친구들에 비하면, 고구마로 뿡뿡대는 내가 정의로웠다. 입고 먹는 일도 이 정도이니, 필요를 위장한 편리를 파훼하는 일은 타노스가 손가락 튕기는 것만큼이나 간단했다.


존버맨의 자격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1인 가구 기준, 매일 두 끼를 집에서 먹어도 설거지는 일주일에 한 번이면 충분했다. 밥그릇은 물만 담아 뒀다가 다음 끼니 때 슬쩍 헹궈 다시 썼다. 수저와 주걱은 밥그릇 헹구는 물을 훔쳐 썼다. 라면 끓인 냄비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세균이나 바이러스는 끓는 물에 죽을 터였다. 청소나 빨래는 에헴, 엄마만 안 보시면 그뿐이다. 농담 같은가? 여름 34도가 익숙해졌다면, 농중진담을 담담히 생각해볼 때다. 34도는 대구의 숫자였다.


토르에게 뮬니르가 있다면 내게는 당근마켓산 7만 원짜리 자전거가 있다. 지하철 네 정거장 이내에 있는 극장, 병원, 대형마트에 갈 때는 자전거를 이용했다. 애초에 승용차가 없었다. 내 세계에서 승용차는 필요가 아니라 편리였고, 그 편리는 1인 가구 기준 이기적이었고, 육중한 쇳덩이가 고작 한 사람을 위해 움직여야 하는 것은 지구 낭비였다. 단순 배기가스와 교통 혼잡이 만들어 내는 문제뿐만 아니라 차량 생산․관리․폐기에서 뿜어낼 탄소를 생각하면 경악스러웠다. 물론, 면허는 있지만 차가 없는 내 처지에 따른 인지부조화일 수도 있다. 그러나 존버맨이 되고 난 이후로는 훌훌 털었다. 이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교통 인프라가 잘 갖춰진 대도시에 사는 1인 가구주가 승용차를 소유한다면 - 꿇어라, 이것이 너와 나의 눈높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나 존버맨은 구질구질한 선민의식으로 편리에 중독된 하찮은 그대들을 내려다본다. 한국은 뿌리 깊은 성장주의 사회다. 식민지 착취 없이 선진국에 올라선 유일한 나라다. 오히려 식민지 출신이기에 성장은 ‘내가 해봐서 아는데’로 절대 근거가 되었다. 개발도상국에서 태어나 선진국에서 살게 된 MZ세대에게 과소비와 알뜰함은 각각 플렉스(flex)와 청승맞음으로 대체되었다. ‘내 돈 주고 내가 산 것’이 정의여서 스웨그(sweg)조차 구매력에 의존했다. 성장주의 사회 대다수의 패배자들이 소비로 자존감을 때우는 것이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정언명령인 시대에, 환경 윤리는 빙하 위에 위태롭게 선 북극곰 사진에 ‘좋아요’ 누르는 수준으로 무책임해졌다.


엄마는 실밥이 터지고 누레진 흰 티를 보며 무슨 청승이냐 했다. 나는 친환경주의를 생각한 적 없는 친환경주의자로 살아온 셈이다. 그렇다고 마음이 풍요로워진 것은 아니었다. 돈을 안 썼으니 돈이 쌓였다. 쌓인 돈을 주체하지 못하고 주식, 가즈아, 했다가, 존버가 되었다. 코스피 2600~2700일 때 이미 타노스가 한 번 이상 다녀갔고, 그 이후로 주식창으로 안 보고 있으니 내 노동 소득의 몇 년 치, 그저 반토막이 희망이다. 그렇다. 그래서 내 이름은, 음, 그렇다.


이렇게 살아서일까. 미혼. 자식 없음. 이보다 더 친환경적인 사태가 있을까(엄마 미안). 저출산이야말로 인류 평화에 이바지하는 최선이다. 하위 계층 노동자들이 타국가 이주민으로 대체되겠지만, 그게 어때서? 환경을 공짜처럼 여겨왔던 기존의 자본주의 패러다임조차 바뀌는 판에 민족의 패러다임도 바뀔 때가 되었다. 어차피 내겐 BTS보다 서태지, 노블레스, 어벤져스, 타짜를 아는 사람이 ‘우리’다. 아니, 이러다 다 죽을 판에 편 갈라 오징어 게임 할 때도 아니다.


스태그플레이션도 인류의 기회다. 이 글 초고를 쓰는 시점에 유가 100달러가 붕괴된 것은 공급이 줄어드는 것보다 소비 위축 속도가 더 빨랐기 때문이었다. 스태그플레이션이 자본주의의 본질을 바꿔 놓지는 못하더라도, 시간을 벌 수 있게 되었다. 존버맨이 한 명이라도 더 많아지는 시간, 혁명이 느리게 진행될 수 있는 시간! 물론 이 혁명도 하위 계층,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고통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만이 14,000,605가지 미래 중에 유일하게 인류가 승리할 수 있는 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 주식은?


그래, 그 돈, 묻고 더블로 간다. 이것이 더 블루 스카이를 위한 존버맨의 산수다. 세계의 누군가는 일자리를 잃고, 쪄 죽고, 수장되겠지만 나는 뭐, 혼자 필요를 감당할 수준은 벌어먹는다. 그러나 지금, 혼자 싸우기는 벅차다. ‘Avengers : endgame ost portals’의 2분 1초에 터지는 그 울림이, 뭔지 모르겠다면 어, 베토벤의 ‘운명’ 빰빰빰-빰, 하는 그 웅장함이 가슴 밑바닥에서 울려 퍼져야 할 때다. 어차피 인류의 운명이다. 나는 첨단 슈트도 없고, 거미줄도 뽑을 줄 모르고, 초록 괴물로 변신도 못하고, 캡틴도 아닌, 할 줄 아는 건 그냥 버티는 것밖에 없지만 딱 한 번 진지하고자 한다. - “어벤져스 어셈블(assemble-모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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