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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Dec 18. 2022

소설가 지망생이었던 이의 실패한 독후감

독서의 완성은 독후감이다. 책을 내게 새겨 넣는 않는 독서는 책을 액세서리처럼 두르는 허영에 지나지 않는다. 내 이야기를 남기지 못할 책이라면 애초에 읽지 말았어야 하고, 읽었다면 책에 내 이야기를 남겨야 한다. 나는 대체로 허영꾼이다가 가끔 독서를 한다.


공모전에 출품하는 독후감은 가장 싫은 글쓰기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책이든 ‘책이나 글 따위를 읽고 난 뒤의 느낌’을 댓글 정도로 달 수 있겠지만, 2000자 이상의 지적/정서적 오르가슴을 위장하자니 진 빠진다. 쓸 말을 읽어내는 것이 독자의 능력이므로 독자로서 내 무능력이겠거니……는 개뿔, 우리 솔직해지자. 힘을 준 독후감 쓰기는 옷깃만 스친 느낌을 침소봉대해서 필연으로 포장하는 호들갑에 수렴한다. 이를테면, ‘앙, 기모찌!’ 같은 거. 독후감을 쓸 때면 지하 아이돌을 전전하다 AV 배우로 전락한 중고 신인의 비애가 몽글거린다. 이거라도 잘하고 싶다.


매년 독후감 공모전을 기웃거린다. 읽고 쓰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밥벌이이므로 읽고 쓴 결과물로 상을 받는 것은 밥벌이의 자격 증명이자 오랫동안 소설가 지망생으로 살아온 낡은 풋내기 최후의 자기 증명이었다. 학생들이 불러주는 ‘선생’만으로는 나는 내가 납득되지 않았다. 학생들이 선생의 칭찬에 어깨가 으쓱해지듯, 나도 권위로부터 인정이 필요했다. 막상 상을 받으면 결국 글 좀 쓰는 '아마추어'를 인증한 셈이지만, 그것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것이 객관적인 내 수준이었다. 낙선할 때가 더 많았다. 상위권에는 안도하고, 낙선에는 이틀쯤 우울하다가 심사위원과 내 취향이 다르다며 정신 승리라도 했다. 그러나 장려상 수준의 수상은 꽤 오래 참담했다. 변명의 여지없이 어중간했다. 2022년에 어중간한 적은 없었다.


상금은 생활비로 합산했다. 글로 돈을 버는 일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되고 싶은 내게. 내가 되고 싶지 않은 내게 특별한 일이었지만 시치미를 뗐다. 아니, 애초에 돈을 제대로 쓸 줄도 몰랐다. 소설이 아닌 인생을 삶의 여집합 취급해 왔다. 연애도 삶의 군더더기 취급해가며 20대와 30대를 노트와 노트북 앞에 보내고 나니 정작 내 인생은 소설가 지망사(死) 되어 있었다. 인물, 사건 없이 숫자만 또박또박 올라가 내 나이에 이르렀다. 상금의 규모는 충전되는 자존감의 크기로만 유의미했다. 오래된 배터리처럼 쉽게 방전되는 자존감을 충전하기 위해 크고 작은 수상 실적이 필요했던 것이다. 내 글이 공적으로 기록되는 경험, 글밥 한 줌 먹었다는 착각으로 소설가가 되지 못한 원죄를 갚아 나갔다.


사실 작은 수상도 난망했다. 심사자는 내 문장부터 싫어할 가능성이 높았다. 내 소설 선생님은 ‘명사 중심의 돌덩이 같은 문장’부터 뜯어고치라시며, 내 취향이 아닌 어느 신춘문예 당선작을 필사해 보라고 하셨다. 내가 닮고 싶은 사람들로부터 내 스타일은 다른 것이 아니라 모자란 것으로 판명 받았고, 그 모자람이 납득되지 않지만 그들을 설득할 자신은 없었다. 몇 년 전부터 소설에 재능이 없음을 내심 예감하고 있던 터였다. 내가 소설이랍시고 쓴 잡문들은 이야기의 탈을 쓴 조잡한 설명문이나 사소설에 지나지 않았다. 인생의 매몰 비용 때문에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태는 ‘5년이든 10년이든 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다.’고 변명할 수 있었지만, 문장은 속수무책의 ‘나’였기에 어찌할 자신이 없었다.


독후감을 제대로 아는 것도 아니다. ‘감상’문을 써야 했으나 평론가도 아니면서 나는 분석 결과를 어설프게 정리해 댔다. 시행착오 끝에 내가 이해한 독후감은 책과 연관된 주제의 수필이면서 책과 약한 연관을 보여주는 글이었다.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얼마든지 조작되었다. 소설가로 실패한 경험 덕분에 독후감을 ‘중년으로 접어든 우울한 자취생’ 캐릭터의 사소설로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주제에 따라 나는 결혼도 했고, 자살 시도도 했고, 가본 적 없는 곳을 여행도 했다. 친구 하나는 자살로 죽었다. 거짓 감상들 중 몇 개는 크고 작게 수상했다. 비문학의 경우, 책을 읽지 않고 목차만 훑어본 후 주제에 맞는 글을 써서 수상하기도 했다. 소설가가 되고자 했다가 거짓가가 된 꼴이 우스우면서도 실패가 자위 되는 양가감정을 아직, 정리하지 못했다.


모자란 문장과 앙상한 감수성으로 승부를 봐야 하므로 늘 꼼수에 매달렸다. 장자가 될 수 없는 서자의 마음으로 내 딴에는 필사적으로 참신하고자 했다. 꼼수에 진정성을 담아내면 성공했지만, 꼼수는 태생적으로 작위적인 데다가 열등감 때문에 꼼수가 과해져서 진정성을 떨어뜨리는 모양이었다. 성공보다 실패가 잦았다. 그래도 300전 300패 한 소설보다 후한 성적이니 남는 장사다.


거짓이든, 진실이든 쓰고 나면 책은 보다 진하게 남았다. 내 책을 만들지 못한 시간은 내 인생을 기각시켰으므로 책이라도 읽었다는 사실로 내가 존재했던 과거를 증명했다. 누군가들은 여행지와 맛집을 사진으로 남기지만, 나는 내게 ‘무려’였던 ‘고작’들로 고장난 인생을 잇댔다. 노트와 노트북 앞에서의 시간은 글쓰기 연습으로서 알게 모르게 손에 기능이 누적되어 있겠지만 처참한 효율이다. 그 무재(無才)해서 무제(無題)한 유산을 내게 무해하게 만들고 싶었다. 읽혀야 무재(無在)로부터 무죄 방면될 수 있을 것다고 믿었다. 노트북 속에 영원히 폐기될 수십 편의 습작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마음으로 독후감은 꺼내 보기로 했다. 독후감은 소설을 끊은 이후 가장 정성들인 인생이다. 또, 인생이 휘발되게 놔두자니 내가, 불쌍하다.


글로 밥 벌어 먹기 전까지는 독후감을 써야만 하므로, 브런치에 독후감을 남기지 않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브런치에 남길 독후감은 수상에 실패했지만 당시 내가 남길 수 있는 최선의 인생이었다. 인생 독후감은 퍽 지긋지긋하다. 이런 독후감은 가장 싫은 글쓰기다.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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