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누굴까? 보통은 버려진 물건에 집중했지만, 이번에는 당신이 더 궁금했다. 생활 쓰레기 절반 이상이 무분별하게 버려지는 동네에서 멀쩡한 인형이 규격 쓰레기봉투에 버려진 것은 처음 봤다. 쓰레기봉투를 뚫고 나오는 노란 정직함은 쓰레기 무더기 속에서 유독 빛났다. 열대야가 잇대지는 여름 아침, 새삼 뽀송뽕뽀송했다.
인형 뽑기 유행 이후 인형 쓰레기는 흔했다. 1인 가구가 절대 다수인 동네에 유기견이 흔하니 인형은 말할 것도 없었다. 수험생들이 500원짜리 성취 경험에 목매는 현상을 언론이 조명할 때, 나는 이미 그 판을 은퇴한 지 오래였다. 여전히 싸구려 성취 경험이라도 필요했지만, 성취 결과의 무용성을 겪어 버렸다. 인형이 차지한 부피가 내 무용성을 가시적으로 증명하는 듯했다. 쌓일수록 깊어지는 유용성을 향한 기갈, 가짜 성취는 허탈했다. 게다가 인형 뽑기 기계가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더니 인형 뽑기방까지 생기니 심각하게 시시해졌다. 베스트셀러는 일부러 읽지 않는 어긋난 고집 같은 것이었다. 인형 뽑기 기계 앞에 달라붙은 성취감 거지 떼들을 지나칠 때마다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며 속으로 의기양양했다.
유행은 빨리 죽었다. 기계 조작이 공공연한 사실로 밝혀졌고, 몇 번 해 보면 터무니없이 엉성한 집게 힘이 보였다. 성취가 아니라 운의 게임, 그것도 운영자에게 유리한 게임이라면 이미 인생에서 겪고 있는데 그걸 굳이 돈 들여가며 할 이유는 없었다. 인기가 시들해지자 다시 관심이 생겼지만, 역시 나는 운이 없었다. 한창 때는 이만 하면 이득이다 싶을 정도로 뽑았지만, 은퇴를 번복하고 돌아왔을 때는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쓰레기를 생산하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었다. 그럼에도 간간히 돈 들여가며 인형 배와 등을 긁어주곤 했다.
인형은 흔하게 버려졌다. 오직 ‘귀여움’만이 존재 이유라서 필요에 따라 쉽게 처분될 수 있었다. 귀여움 정도야 없어도 먹고 사는 데 필요 없었다. 방 정리하며 기분 전환할 때, 대체할 수 있는 귀여움이 생기거나 귀여움이 식상해질 때, 인형은 문득 수명을 다했다. 이유 없이 사랑 받았으므로 이유 없이 철회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더군다나 원룸촌이라면 이사할 때 짐을 줄여야 하는 필연적 이유가 생겼다. 당근마켓이 보편화 된 이후 인형 쓰레기가 줄어드는가 싶어도 버려질 건 버려졌다.
처음 눈에 띈 건 노란 덩어리였다. 쓰레기봉투는 자신이 무슨 색상이든 이것저것을 마구잡이로 우겨 담고 있어서 단일 색상을 띄기 힘들다. 그래서 봉투에 찍힌 까만색 ‘재사용’ 글씨가 선명하게 보일 만큼 샛노란 덩어리는 존재감이 이질적으로 생생했다. 신호등 노란 깜빡이를 본 것처럼 나는 일단 멈췄다. 가까이에 가보니 볏 달린 병아리였다. 쓰레기봉투는 입구가 묶여져 있어 관공서 팸플릿에 쓰여도 좋을 만큼 모범적이었다. 껌 종이 하나 없이 노란 덩어리 하나만 오롯했다.
일요일 아침 출근길, 재활용 쓰레기봉투를 들고 털레털레 걸어가서 편의점에서 얼굴 마주하고 아침을 먹었다. 그날은 공부방 화장실에 화분으로 제작하려고 주워둔 변기통 위에 두었다가 월요일 퇴근길에 가져 왔다. 세탁기 돌릴 때 같이 빨 생각이었다. 집 근처 돼지찌개집에서 나란히 앉아서 한 주를 마무리했다. 일흔은 되어 보이는 사장 할머니는 참외인 줄 알았다고 했다. 다 큰 아저씨가 웬 인형이냐고 하시기에 그냥 웃었다. ‘제가 유기인형입양소를 운영 중이거든요. 마침 변기 화분 아래 한 자리가 비는데, 거기 제격일 것 같아서요. 인조 잔디를 바닥에 깔았더니 이 노란색은 초록빛과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라고 대답할 순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쓰레기봉투 꼭지를 풀면서 ‘버리는 예의’를 생각했다. 이장할 관을 여는 것 같았다. 쓰레기봉투는 오직 인형을 위해 제작된 관이었고, 꽉 묶인 것은 관 뚜껑을 제대로 덮은 정성이었다. 관이 이승과 저승의 이(異)세계를 넘나드는 택배 상자라면, 인형은 새 세계에 잘 도착했다. 당신 덕분이다. 병아리는 빨래와 함께 세척되어 빨래 건조대에서 잘 말랐다. 태어났다.
공부방에 갖다 둔 날, 학생들은 병아리를 쓰다듬고 껴안았다. 부드러운 촉감을 사랑스러워했다. 때 타면 또 빨아야 했지만, 병아리 빨래는 별일이 아니어서 내버려뒀다. 병아리 출신을 얘기해 줘도 상관하지 않았다. 남학생이 껴안고 있던 사진을 보여줘도 여학생들도 상관하지 않았다. 자기 애착 인형까지 가져와 나란히 놓아두기까지 했다. 책상 반대편에 앉아 내 수업에 참관까지 했다. 나는 그 풍경이 귀여웠고, 병아리가 부러웠다. 그렇게, 유용했다.
버리는 것에도 예의를 다하는 사람이라면 당신에게 소중하지 않은 건 무엇일까? 다른 주워온 물건들은 본래 주인들보다 잘 보살필 자신이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당신보다 잘 보살필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내 학생들이 소중히 대해주고 있다. 당신이 예의를 다한 것은 그렇게 안녕하다고, 당신에게만큼은 전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