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버려진 이유

by 하루오

넌 버려진 게 아니야. 쓸모없지 않아. 내가 잃어버렸을 뿐이지. 내 실수 때문에 네가 스스로를 오해하지 않았으면 해. 너는 한결같이 멀쩡한 너야. 나는 지금도 내 방 어딘가에서 네가 짠, 나타나길 바라.


도무지 기억이 안 나. 네가 있어야 할 곳은 뻔하잖아. 업무용 가방, 도서관용 배낭, 나들이용 힙색, 바지 호주머니, 그곳이 아니면 있을 이유가 없어. 대체 어디서 널 흘렸을까? 내 뻔한 동선을 추적해 봐도 혐의를 둘 만한 곳이 없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내 루틴이 깨졌던 것일까.


너는 이동할 때 불쑥 침입해 들어오는 불쾌함으로부터 나, 아니, 사람들을 지켜주는 호신장비였어. 나는 내 과민함을 알아. 공공장소에서 떠드는 것들을 맹렬히 치우고 싶어. 전화로 수다를 떤다거나 도서관에서 소곤댄다거나 이어폰 없이 영상을 시청하는 것들의 머리통을 박살내는 거지. 대단한 일은 아니야. 그냥 선을 넘어온 이물질을 닦아내는 거니까. 그것들이 지금 살아 있는 이유는 내 최소한의 준법정신과 네 기능 덕분이야. 너를 귀에 꽂으면 slipknot의 ‘people=shit’이 토닥토닥, 그들을 이 세계에서 지워줘. 네가 주는 고요함의 가치를, 너는 모를 거야.


그러니까 너는, 나를 정상인으로 만들어주는 필수품이라는 거야. 너는 네가 생각하는 너보다 더 훌륭한 존재야. 내 마음의 인공심장, 혈액투석기 같은 거니까. 그 얘기를 할 기회가 영영 사라져버렸겠지만, 명백한 사실이야. 아마 세상에 너보다 ‘대단한 이어폰’은 없을 거야, 윌버. 이어폰을 넘어선 이어폰, 네가 구한 목숨이 몇 개니.


너는 2015년 9월에 샀어. 사진을 찾아보니, 너 이전의 이어폰은 9월 7일에 고장났더라고. 그날을 기억해. 중화냉면을 먹으러 갔다가 고장난 이어폰 사진을 찍었으니까. 2015년이면 새 음악을 듣지 않은 지 꽤 오래 되었을 무렵인데도 사진으로 기념할 만큼 이어폰은 내게 의미가 되었던 모양이야. Rock에 열광하던 시절이 남긴 공허한 습관 같은 것이었겠지.


너는 내가 지금까지 샀던 이어폰 중에서 가장 비쌌을 거야. 이전 이어폰보다는 좋은 걸 사려 했고, 상품에 대해서 모를 때는 비용이 성능과 비례한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니까. 음질은 높일 때는 모르는데 낮추면 확연히 느껴져. 그래서 아주 천천히 올려 갔었지. 나름 기타와 베이스가 중요한 음악을 주로 들었으니까. 그래 봤자, 20,000원 남짓 했겠지만.


이어폰은 소모품이었어. 걸핏 하면 단선되잖아. 단선은 예측할 수 없어서 이어폰 수명은 복불복이었고. 그래서 좋은 녀석을 사기 망설여지기도 해. 이번에는 단선이 잘 되지 않는다고 하는, 줄이 천으로 된 너를 샀었어. 과연, 넌 8년 동안 건강하더구나. 짱짱한지는 몰라도 내가 불만을 느끼지 못할 정도의 음질을 유지했어. 너는 내 이어폰 역사에서 가장 비싸고 오래된 이어폰이었어. 그런 네가 이렇게 허무하게 떠날 줄이야.


콩나물 대가리 같은 무선 이어폰이 등장했을 때도 관심을 두지 않았어. 걔들은 수시로 충전해야 하잖아. 이어폰이란, 가방 구석에 처박혀 있다가 수시로 꺼낼 수 있는 만만한 것이어야 해. 그런데 일일이 배터리 안부를 확인하며 모시라니, 이건 명백한 주객전도야. 물론, 선이 없는 편리함을 겪어보지 못해서 호감을 느끼지 못한 것일 수도 있어. 하지만 애초에 난 음악을 듣지 않는 몸이 되어버렸는걸. 10년 넘게 거의 업데이트 되지 않는 음악 목록은 지겨워. 귀에 뭘 꽂고 있자니 답답하기도 하고.


공공장소의 모든 소음에 발작하는 건 아니야. 무뢰배를 견디는 사회성 정도는 있어. 다만 내 기분이 나쁠 때와 상대가 선을 좀 과하게 넘었다 싶을 때가 겹치는 날 드물게 사용하지. 한 달에 몇 번 쓰지 않을 이어폰을 배터리 잔량 확인해 가며 상비하는 것은 여간 번거롭지 않잖아. 그런데 최근에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 OST 덕분에 널 자주 사용하긴 했어.


가방과 바지, 셔츠 앞주머니까지 뒤졌지만 너는 없었어. 한 번 더, 두 번 더, 몇 번을 반복하고, 네가 있을 수 없는 서랍과 책장 뒤도 확인했지만 마찬가지였어. 8년이야. 나와 함께한 그 8년이 갑자기 무화되는 게 안타까운 거야. 너를 사용하지 않아도 네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든든했는데, 네가 사라져버렸어.


새 이어폰을 샀어. 9,900원짜리 무료배송 되는 최저가 제품이었어. 이젠 음악 감상이 아니라 세계를 캔슬링하는 기능만 하면 되니까 음질은 어떠랴 싶었지. 게다가 시간이 지난 만큼 음질 개선 기술도 발전했을 거라고 믿었고. 근거 없는 믿음은 사용 10초도 안 되어서 박살나더라. 기타와 베이스가 뭉개지는 소리를 못 참겠어. 최소한 네 수준의 이어폰을 새로 살지 말지 망설이는 중이야.


망설이다가, 익숙해져버렸네. 난 그냥, 그렇게, 있어.


내가 안녕하지 못한 것보다 네가 더 안녕하지 못하겠지? 누가 낡은 유선 이어폰을 주워가겠니. 지금쯤 너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겠지. 하지만 잊지 마. 넌, 최고야. 내가 잃어버릴지도 모를 나를 네가 지켜줬는데, 정작 내가 널 잃어버려서 미안해. 누군가가 널 주워갔으면 좋겠어. 네가 얼마나 대단한 역사를 만들었고, 섬세한 음질을 낼 수 있는지 알아줬으면 좋겠어.


다시 말하지만, 네가 지금의 너인 건, 네 탓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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