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에, 개 한 마리가 따라왔다. 야식으로 먹으려고 산 닭강정 냄새를 맡은 모양이었다. 내가 뒤를 돌아보자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다가왔다. 사람의 습관을 버리지 못한, 버려진지 얼마 되지 않은 개 같았다. 나는 개 쪽으로 돌아서 발을 한 번 굴렀다. 개는 깜짝 놀라 주차된 차 아래로 도망가 고개만 빼꼼 내밀어 주둥이를 바닥에 붙였다. 나는 내 갈 길을 갔다. 뒤통수에 달라붙은 개의 시선을 모른 척했다. 너는 차라리 내 뒤통수의 풍경에 익숙해져야 했다.
공원을 가로지를 때면 예비 된 우울 하나가 꼬리를 치며 다가오곤 한다. 호기심 충만한 시선은 세상을 모른다. 눈앞의 시간만 킁킁대어도 세상은 꼬리칠 만큼 즐겁다. 저쪽에서 주인이 소리치자 하던 일을 멈추고 주인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주인의 말소리 속에서 너는 너의 이름을 용케도 구분해내어 주인에게 잽싸게 달려간다. 주인이 너를 쓰다듬거나 끌어안는다. 주인의 살과 너의 살 사이를 채우는 따스한 촉감이 네 우주의 뿌리일 것이다. 꼬리가 좌우로 바빠진다. 네가 휘젓는 허공에서, 나는 네가 휘젓지 않을 허공을 본다. 너는 아마 버려질 것이다.
이 동네에는 방 하나로 구획된 마음들이 많다. 부동산 업자 말로는 1500채 넘게 밀집해 있다고 한다. 혼자뿐인 방을 버티기 위해서 사람들은 너를 구매한다. 25만원 안팎의 월세 방에 기거하면서도 기어이 너를 들여야 할 만큼 사람들의 우주는 위태롭다. 네가 있는 동안, 그들은 너의 이름이 주는 울림과 너의 살이 주는 온기 속에서 마음의 박동을 유지했을 것이다.
원룸은 머무는 곳이 아니라 지나가는 곳이어서 그들이 이동할 때, 너는 깜빡 잊어버린 짐처럼 남겨지곤 했다. 한국 학생들은 휴학하며 집으로 돌아가거나 취업하면서 이곳을 떴고, 외국인 유학생들은 졸업하면서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런 곳에 있는 직장인들은 대체로 정규직이 아니어서 뜨내기처럼 흘러 다녔다. 다음 공간에서 너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그들이 어쩔 수 없이 너를 길렀듯이, 어쩔 수 없이 너를 버렸다.
나도 애완견을 기르고 싶었다. 자취 생활 4년째, 혼자에 지쳤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보는 불 꺼진 내 방은 늘 비어 있었다. 내가 방에 들어서서 불을 켜봐야 아무도 없어서, 나는 매번 스스로 혼자를 완성할 뿐이었다.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았고, 아무도 나를 만지지 않았다. 처음의 혼자는 타자와의 접촉면에 마모된 나를 재생하는 시간이었지만, 재생된 혼자는 고독(苦毒)처럼 나를 갉아먹었다. 집에 돌아오면 예능 프로그램 동영상부터 재생시켰다. 나를 바라보지 않는 웃음이더라도, 친숙해진 타인의 소리가 내 방에 있다는 사실이 편안했다.
예능 출연자들의 웃음을 만지고 싶을 때마다 기르고 싶어지는 너를 억눌렀다. 너를 기르면 너에게 미안해질 것이 뻔했다. 너에게 일방적으로 전가될 정물의 시간은 부당했다. 혼자 있는 나는 음악을 듣든, 인터넷을 하든 사방의 정물을 허물 수 있지만, 너는 내가 없는 동안 정물에 갇혀 정물화 되고 말 것이었다.
내가 사는 건물에도 너를 기르는 집이 있었다. 내가 복도로 나가기만 하면 너는 자신은 정물이 아니라 너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이 짖어댔다. 내 발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너의 적개심이 짜증났지만, 그래도 이 건물을 통틀어 나를 아는 척해주는 것은 얼굴도 모르는 너뿐이라는 사실이 고마웠다. 여전히, 내 방에서는 너 대신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이 성실하게 웃어댔다.
혼자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혼자 있는 너도 많았다. 혼자 짖어대는 네 소리를 듣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혼자 쓰레기 봉지를 뒤지는 너를 보는 것도 흔했다. 덩치가 작은 너는 오래된 길고양이에게 쫓기기도 했다. 땟국이 흐르는 털은 부스스해졌고, 항문에는 마른 똥이 엉겨 있기도 했고, 배는 홀쭉해져 털이 짧을 경우 갈비뼈의 윤곽이 드러나기도 했다. 너는 어느새 바람에 날리는 먼지뭉치처럼 거리의 바닥에 내려앉은 정물이나 다름없어졌다. 네 눈에는 세상을 향한 기대 없음이 그득했다.
거리의 시간이 오래될수록 꼬리가 사타구니와 가까워졌다. 꼬리를 휘저으며 허공에 담아두었던 사람의 감촉을 이제는 너의 살로 위무한다. 사타구니를 핥아도 너의 살은 주인의 살처럼 나른해지지 않는다. 너의 살은 쓰레기 봉지라도 뒤지지 않으면 살을 채워낼 수 없는 간절함일 뿐이다. 꼬리를 흔들게 되면 주인과 맞대던 살의 기억으로, 너는 너의 혼자에 압사 당할지도 모른다. 사람에게 꼬리치는 방법을 잊어야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체득한다. 똥과 오줌이 반복되는 자리에서 너의 혼자가 여문다.
너는 사타구니 사이에 말아 넣은 꼬리를 풀지 않는다. 너의 길은 주인과 거닐던 공원의 중앙로가 아니라 수풀 사이로 바뀌었다. 사람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먹을 것을 찾아 헤맸다. 한 번은 주인의 뒤를 쫄랑쫄랑 좇아가는 강아지를 바라보는 너를 본 적이 있다. 강아지는 네가 그랬듯이 꼬리를 치며 ‘앙’인지 ‘멍’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주인의 다리를 앞발로 부여잡으려고 했다. 너는 수풀과 쓰레기통 사이에서 강아지의 동선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내 시선을 느끼고서야 고개를 돌려 공원을 빠져나갔다. 나는 너의 뒷모습을 좇지 않았다.
내 뒤를 따라오는 너의 기척이 느껴졌다. 닭강정 한두 개 나눠 주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너를 쓰다듬어주고 싶어질 것과 네게 내 체온까지 전해질 것을 걱정했다. 나는 너를 키울 수 없으므로 우리의 허공은 애초에 교차되어서는 안 된다. 버려지는 것은 한 번이면 족하다. 닭강정 포장을 뜯어 두 점을 쓰레기봉투 위에 놓았다. 너는 먹되, 너를 위해서 내게 꼬리를 쳐서 안 된다. 각자의 꼬리는 각자의 사타구니 사이에 꼭꼭 숨겨둬야 혼자 속에서 살 수 있다. 집에서 먹으려고 했는데, 걸어가며 나도 한 점 먹었다.
2013년 생일에 완성한 초고다. 내가 혼자에 지쳐있었음이 새삼스럽다. 10년 후, 나는 같은 곳에서 네 번째 건물주를 맞았다. 누래진 벽지, 천장 모서리마다 낀 검은 물곰팡이, 울어서 찢어진 장판이 네 털 같고, 꼬리 같다. 올해 생일에는 아침을 굶었고, 점심에 하던 대로 복국을 먹었고, 저녁에 특별히 회덮밥을 먹었다. 유재석은 아직도 내 식사를 함께 하고 있고, 너희들은 급하게 나타났다 급하게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