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루오 Nov 13. 2023

자기과잉 시대 필독서

[계속해보겠습니다]를 읽고

외로움, 현대인의 만성 질병이다. 마르크스가 예언한 자기 소외보다 우리는 더 이기적인 외로움에 걸렸다. ‘나’ 때문이다. 우리는 ‘나’가 아니라 ‘나나’로 산다. ‘나’는 나나나, 나나나나, 암세포처럼 끊임없이 증식된다. 오래된 노랫말처럼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다. 소외를 자처한 아암(我癌) 덩어리가 덩그렇다. 『계속해보겠습니다』는 묻는다. 계속 그렇게 살겠느냐고.


나도 만만찮지만, 이 책의 소라와 나나는 상식을 초월했다. 그들은 피아 구분이 엄격했다. 엄마조차 엄마라고 부르지 않고 이름 그대로 ‘애자 씨’라고 불렀다. 우리가 엄마의 개별성을 잊은 채 오직 엄마로만 대상화 하는 것과 달리, 얼핏 엄마를 하나의 주체로 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나도 타자에 의해 대상화 되지 않겠다는 황금률의 실천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나, 너는 너일 뿐, 관계의 여지는 없었다. ‘타자를 제대로 생각(p.117)’하지 않았고, ‘타자의 고통도 생각(p.130)’하지 않았다. 이들은 사르트르의 ‘타자는 지옥이다.’를 성경처럼 따르는, 타자가 살균된 순수 독립적 자아의 수호자 같았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없이 좋아하지 않는 것만 잔뜩 있다(p.87)는 나나의 독백은 내 마음의 지문과 동일했다. 언젠가부터 나는 대상에 대한 호불호에 무뎌졌다. 감정 에너지를 쏟는 게 귀찮았다. 사람이 없으면 재미가 없지만 스트레스도 없었다. 무색무취의 일상은 무난하게 흘러갔다. 타자와 충돌하지 않을 정도의 예의(무관심을 세련되게 표현하는 방법)면 아무도 내 영역 안에 들이지 않을 수 있었다. 익숙한 것을 우선 선택하고 아닌 것에 거리를 뒀다. ‘혼밥’은 목가적 평화로움을 위장, 혹은 착각하고 있음을 알지만 나는 1년에 사람과 먹는 끼니가 30회를 넘지 않았고, 괜찮았다.


이만하면 나는 소라, 나나와 동족일 텐데, 감정이입은커녕 그들이 혐오스러웠다. 그들에게는 접근 금지의 자장이 둘러쳐진 듯했다. 자장의 정체는 감정의 진공이었다. 감정이 숨을 쉴 수 없었다. 타인이 나를 볼 때도 그런 답답함을 느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꽤 망가져 있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 사이를 둥둥 떠다니는 귀(鬼)가 떠올랐다. 나는 내 오래된 혼밥이 괜찮지 않아야 했다.


비단 내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나나 매운맛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나나 순한맛을 살고 있다. 자의식 강화로 인한 관계적 자아의 퇴행은 이미 사회 현상이었다. ‘썸’은 과잉된 자의식을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사랑은 나인 채로 누군가를 향하는 감정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받는 감정도 아니다. 2개의 O 원자와 O2 분자 성질이 다르듯, 사랑은 자아의 절반 안팎을 맞교환 해 화합물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알콩달콩한 호감은 교환하지만 자아의외피를 벗고 속살을 교환해야 할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내 자아는 소중하므로 함부로 허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개를 키운다. 개만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사랑했다. 개를 사랑하듯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다.


관찰형 예능이 유행하는 것도 내 세계는 유지한 채, 내가 보고 싶은 타자만 수용하기 때문이다. 타자는 또 다른 주체가 아니라 소비재로 전락한다. 이런 족속들의 인터넷은 소통을 강화하지 못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과의 소통은 자기 동일성을 반복 경험함으로써 자의식만 비만해지기 때문이다. 외로움이 만져지지 않을 정도로, 자의식의 피하지방이 두꺼워졌다. 식탐의 포르노가 난립했다.


소라와 나나가 관계의 허공에 부유하지 않도록 중심이 되어준 것은 나기였다. 나기는 평범한 게이였다. 전심전력을 다 한 사랑에 실패한 이후, 애자 씨처럼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상을 살아갔다. 소라와 나나는 나기와 함께 할 때 유대감을 드러냈다. 나나는 ‘소라, 나나, 나기가 합체하면, 나비바(p.203)’라고 했다. ‘소라나나나기’가 아니라 ‘나비바’인 것이 의미심장했다. 나나의 젓가락 끝에서 물방울 세 개가 합쳐져 하나의 큰 물방울이 되는 것처럼, ‘나’란 자아를 원료로 타자와 합체해 더 큰 인격을 형성하는 것을 반복하는 유동적인 존재인 것이다. 나는 ‘나’가 아니라 ‘누군가의 딸이자, 동생이자, 엄마이자 ……친구’로 된 총체다. ‘나비바’일 때, 나나는 ‘살았다’고 했다.


소라와 나나의 관계적 자아는 나나가 모세의 아이를 임신하고 모세와 헤어지는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성장했다. 나나는 모세와 몸싸움할 때 자신을 돕는 소라를 언니라 불렀고, 임신한 후에는 스스로를 엄마로 지칭했다. 타자에 의해 대상화된 호격을 수락함으로써 관계적 자아를 인정한 것이다. 개별자 간의 경계를 허무는 것은 결국, 사랑이었던 것이다.


사랑은 인생의 생기(生氣)다. 소라는 ‘자신이 만든 도시락이 맛도 멋도 생기도 없(p.42)’었지만 ‘새끼를 키워본 손맛(p.43)’의 나기 엄마의 도시락은 맛있다고 했다. 몇 년 전부터 ‘집밥’이 ‘썸’처럼 부각되는 것도 파편화 된 생활사 속에서 생성된 생기 결핍의 반작용이다. 한편 나나는 모세 씨 가정에서 ‘생기가 사라져 인형 같은 모습(p.108)’에서 반면교사를 얻었다. 삶을 ‘계속해보겠습니다’라고 마음먹게 만든 것은 이 생기의 태동인 것이다.


책을 덮고 나서 내 혼밥의 날들을 뒤돌아봤다. 나는 식사를 한 것이 아니라 양분을 섭취했다. 사육도 아니고 재배였다. 주말에 혼자 일하는 직업 특성상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10년 넘은 연애 공백도 문제였다. 확실히 생기 없이 밋밋한 날들이었다. 나는 인생을 계속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특정 구간을 반복하며 하루치의 개별성을 삭제하는 중이다. 이러다 정말 나도 진짜 나나가 될 것 같다.


매운맛 나나와 순한맛 나나에게 필요한 것은 아마도 개츠비가 아닐까? 세 번을 읽어도 알 수 없던 개츠비가 소라와 나나 덕분에 진정 위대해 보였다. 우리는 타인을 향한 ‘전심전력(p.104)’을 너무 아낀다. 머뭇거리는 사이에 하루가 가고, 시절이 가고, 세월이 간다. 인정컨대, 사람을 살고 싶게 만드는 것은 사람이다. 그래서 ‘나나나’ 다이어트를 시작할 때다. 어두워진 가리워진 나의 길을 밝혀주는 그 노래는, 너다.


2018년에 썼던 리뷰입니다. 10월, 11월에는 글 쓸 여력이 안 되어서 묵혀둔 글로 생존신고 합니다. 12월에는 새 글로 뵙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벗꽃 Anding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